김정숙 교수의 필름 에세이>성공한 리더의 광기, 그가 만든 악마적 음악
데미언 차젤 감독 ‘위플래쉬’
입력 : 2025. 03. 24(월) 17:40
데미언 차젤 감독 ‘위플래쉬’. (주)NEW 제공
데미언 차젤 감독 ‘위플래쉬’ 포스터. (주)NEW 제공
소아 스트레스를 풀어줄 목적으로 어린 아들이 드럼을 배울 수 있도록 실용음악 학원에 보내는 이가 있었다. 아들이 갖는 환경적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수단이라는 그녀의 이유가 남달랐다. 그 후로 필자는 드럼에 대한 또는 타악기에 대한 또 다른 시각인 ‘카타르시스’의 시선을 덧붙이게 되었다. 타악기는 지구촌 전체를 관통하는 공통의 ‘소통’ 수단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사물놀이가 보는 이의 넋을 앗아갈 만큼 압도하는(어느 경우는 서양음악보다 더) 것으로 이 설명을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주 영화관에 다시 등장한 영화 ‘위플래쉬’(2015)에 감독은 이렇듯 압도하는 타악기의 위력을 악마적으로 대입하고 있다.

재즈로 유명한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 음악학도 앤드류(배우 마일즈 텔러)는 이 대학 최고의 실력자 플레처 교수(배우 J. K. 시몬스)에게 우연한 기회로 발탁된다. 최고의 실력자인 플레처는 자신의 밴드에 영입한 앤드류에게 재즈계의 전설적인 드러머가 될 희망을 불어넣는다. ‘재즈계의 전설’로 추앙받는 찰리 파커. 그가 어느날 리듬 섹션과 박자도 못 맞추는색소폰 연주를 선보이자, 참다 못한 드러머 조 존슨이 그에게 심벌즈를 내던졌던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찰리는 ‘버드’라는 별명이 붙었고, 이 치욕이 찰리 파커를 지금의 전설로 이끌게 한 전환이 되었다.

플레처 교수는 그러한 일화를 제자들에게 들려주며 “내가 존슨이 되어서 너희를 찰리 파커로 만들겠다”고 선언한다. 선언에 담긴 욕심 만큼이나 플레처는 한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 지독한 방법으로 밴드를 이끌어간다. 연주가 시작되고 플레처 교수에게만 들리는 실수가 나오면 그만의 잔인한 독설이 시작된다. 그의 행동은 ‘가르침’의 차원을 넘어선 ‘인격 모독’이자 영혼을 파괴하는 언어폭력 그 자체다. 플레처는 새 제자 앤드류가 갖고 있는 어린 시절의 상처를 폭언에 사용한다. 폭언과 학대 속에 좌절과 성취를 동시에 안겨주는 플레처의 지독한 교육방식은 천재가 되길 갈망하는 앤드류 내면의 집착을 끌어내고 결과적으로 효과가 있기는 하다.

플레처 교수의 악마적인 교수법은 광기를 끌어내고 광기에 휘둘린 앤드류는 맹렬한 연습의 도를 넘어 집착 및 편집증의 단계에까지 이른다. 마치 그의 뇌 지도에 드럼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사람처럼. 영화 ‘위플래쉬’는 음악을 소재로 한 음악영화이다. 그런데 음악이 키워드가 아니다. 영화는 예술인이라면 한 번쯤 겪어보았을 ‘뛰어넘음’에 대한 고충 및 천재성에 대한 염원 등 심리적 변이를 세세하게 그려나가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천재성보다는 인간심리 내면 저편에 도사리고 있는 괴물 같은 욕망이 뿜어내는 광기를 유감없이 끌어내 보이는 데 포커스를 맞추는 영화.

음악이 소재인 영화인만큼 클라이맥스 및 대단원은 연주로 이어진다. 앤드류는 교수직에서 파직당한 플레처의 복수심리 및 플레처의 광기에 대한 앤드류 쪽의 도전, 즉흥성, 폭력과도 같은 엄청난 분노 등 귀추를 알 수 없는 얽힌 스토리와 심리적 변이를 연주로 보여준다. 이러한 심리를 파헤쳐 볼 수 있는 연주라면, 이미 음악이 아닌 게 아닐까? 이도 광의의 음악으로 보는 게 맞을까? 하는 혼란도 동반되었다. 한바탕의 연주를 영화를 통해 잘 보고 나왔다는 느낌보다는 좀 멍해진다. 광기로 자신을 몰아쳐서 얻어낸 ‘명성’을 ‘예술혼’으로 수용하기에는 어딘지 찬성할 수 없어서다.

‘위플래쉬(Whiplash)’는 드럼이 중심이 되는 재즈 연주 음악이다. ‘채찍’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 곡은 아름다운 열정으로 연주해야 할 음악이라기보다 광기 어린 전율의 연주를 요한다. 드럼에 미치지 않으면 연주로 표현될 수 없는 곡이다. ‘교육’의 한자어에는 ‘교敎’ 안에는 ‘때린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가르침에 매(채찍)를 동반하는 것을 당연시했다. 그러나 이 의미를 서양의 플레처 교수가 앤드류에게 부여하는 교육이라며 대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플레처 교수는 우리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성공한 리더의 어두운 이면을 상징한다. 세간의 존경을 얻는 리더나 유명인들의 이면에는 천재성과 명성을 얻기 위해 잃은 것이 있게 마련이다. 영화에서 플레처는 광기와 편집증으로 명성을 완성해 나가고 욕망을 달성함으로써 인간성을 상실한 인물이다. 그가 연주하는 아름답고 감성적인 음악 속에는 자신의 악마적 인간성이 도사리고 있다. 영화는 이 부분에 집중한다. 백제예술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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