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멈춰있던 상여… 비로소 모란 피는 봄을 기다린다
455 소리굿 ‘누산네 니단이’
입력 : 2025. 07. 17(목) 16:33
세월호. 황인솔 에디터
어찌 가을이 오겠는가/ 봄을 모두 잃었는데/ 차마 열매가 남겠는가/ 못다 핀 꽃이 다 졌는데

찢긴 달력처럼/ 돌아오지 못할/ 내 영혼의 시간은 쭉정이/그대 서투른 희망을/

함부로 말하지 말라/뉴스가 세상을 덮고/ 천지는 기도로 가득하고

돈과 권력이야/ 그토록 난무했지만/다시 핀 꽃 한 송이/ 그대 아직 보았는가

눈물보다 하얀 진실을/ 그대 정말 보았는가



노화욱 극동대 석좌교수의 시편이다. 2014년에 지은 시로, ‘무유’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시작 노트에는 다음과 같이 붙여뒀다. “봄을 잃었으므로 꽃을 보지 못했다. 수분 되지 않았으므로 내 영혼의 가을 또한 없다. 비 없는 장마에 흐르지 못한 강은 마르고, 생명을 외면한 세상에 거짓과 독선의 권력이 진실과 정의마저 옥죄고 있다. 시간은 길을 잃고 공간은 미궁이다. 내년이면 빼앗긴 봄을 찾을 수 있을까? 잃어버린 꽃들을 어디서 또다시 피울 수 있을까?” 노교수가 그렇게 시를 끄적인 지 11년이 지났다. 지금은 진도항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당시의 팽목항에 나부끼던 흐느낌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태풍보다 더 펄럭이고 성난 파도보다 더 울렁이던 포효들을 기억한다. 세월은 그렇게 흘러만 갔고 제대로 된 세월호의 내력이 알려진 것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세월이 비정해서인가, 사람들이 매몰차서인가. 사실은 국가권력의 행로에 그 일단의 답이 있을 텐데. 마치 이 시에 응답이라도 하듯, 아니 11년의 세월을 두고 서로 영감을 주고받기라도 하듯, 지난주 진도 소재 국립남도국악원 정기연주회가 열렸다. 소리굿 제목이 ‘누산네 니단이’였다.



소리굿 ‘누산네 니단이’가 말해주는 것들

이 소리굿이 세월호를 상징한다고 말하거나 표방한 적은 없다. 미장센의 현란함이나 뮤지컬의 쇼스토퍼도 없다. 대규모 단원들이 동원되는 스펙터클도 없다. 진도씻김굿에 비유해 말하자면 각종 악기와 지무들이 동원되는 큰굿이 아니라 당골과 악사 한두 명이 펼치는 손굿 같은 풍경이었다고나 할까. 노래극 혹은 소리극이라 하지 않고 굳이 소리굿이라 호명한 까닭이 있을 것이다. 그런 점이 오히려 주효했는지도 모르겠다. 극의 시작부터 끝까지 세월호를 떠올리게 했으니. 물론 노래나 연기가 아니라 뭔가 설명하려고 애쓰는 점들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국립기관에서 그것도 정기연주회를 통해 세월호 혹은 정부에 반하는 기획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미 1년 전부터 준비된 극이므로 국민주권 정부로 바뀌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게 아니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니단이’는 진도지역 아가씨들을 부르는 호칭의 하나다. 첫째 딸부터 큰가, 장가, 시단이, 니단이 등으로 호명한다. 반면에 남자아이들은 큰놈, 두바, 시바, 니바, 오바, 육바 등으로 호명한다. 실제 이름을 이리 짓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전경수는 이를 종지명제(從地名制, geononymy)가 적용된 사례로 해석한다. 다른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보이는 ‘택호(宅號)’라는 뜻의 풀이다. 나 또한 본 지면 2017년 7월28일 자에 ‘다니와 바가 무엇일까’라는 제목으로 자세히 풀어두었으니 참고 바란다. 부언하자면 인격이나 존재 그 자체의 이름이 아니라 ‘존재하지만 불린 적이 없던 존재’의 소환인 셈이다. 기록되지 못한 죽음, 마치 지난해 이태원 사건에서 무명의 상태로 안치되었던 희생자들을 떠올리게 한다. 국가라는 시스템은 그들의 이름조차 정확히 불러주지 않았다. 이름 없는 위패와 리본 거꾸로 달기 등의 국가적 강압이 주는 상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반동적이며 반인륜적이다. 기회가 되면 차차 풀어 설명하겠다. 소리굿은 움직이지 않는 상여 장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죽은 이를 보낼 상여가 움직이지 않는데 그 누구도 손을 대지 못한다. 사회적 애도와 장례의 중단을 상징하는 장면이랄까. 그러기에 초반부터 세월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죽은 자를 제대로 떠나보내지 못하는 사회, 바로 그 상처를 진도 상장례의 정지된 상여 이미지로 형상화했다고 볼 수 있다. 세월호 사건 직후 국가와 언론에 의해 저질러진 애도의 금지와 조직적 훼방, ‘가만히 있으라’는 언설을 기억하자. 극중 ‘위유사’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양반은 ‘이름도 부르지 말라’고 명령한다. 기억하지도 말며 떠올리지도 말라고 명령한다. ‘가만히 있으라’와 ‘기억하지 말라’는 정치적 명령이며 죽음마저 정치화된 현실을 반영해주는 대목이다. 지난 11년 우리 사회가 그러하지 않았는가. ‘이제 제발 그만 좀 하자’, ‘잊어야 산다’ 등 이런 사회적 담론 만들기는 국가의 책임과 권력의 부조리를 희석시키려는 망각의 서사 만들기였다. 극 중 양반네는 기억을 지우는 권력자, 곧 현실의 국가와 언론 권력의 상징이다. 곧이어 혼을 삼킨 새라는 초혼조가 등장한다. 당골이 등장하고 굿을 통해 기억을 복원하며 잊힌 이들을 불러내는 장면들이 흐른다. 초혼조는 기억의 중재자다. 세월호를 망실하지 않으려는 유가족들, 예술가들, 시민들이 오버랩되며 특히 존재 부재의 니단이 이름 부르기를 시도한다. 그 이름이 ‘봄’과 ‘사월’이다. 작가의 혜안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세월호가 일어난 2014년 4월16일의 그 사월, ‘봄’이라는 계절의 상징을 버무린 이름짓기이기 때문이다. 이 이름은 니단이 개인의 귀환이기도 하면서 공동체의 회복, 기억의 공동체로 나아가는 전환을 의미하기도 한다. 넘버곡이 두드러지지 않아 아쉽긴 했지만, 씻김굿 등의 상장례, 진도지역의 노래 등을 기반으로 작곡된 노래들은 지역을 반영한다는 의미가 있다. 침몰한 배, 죽음, 이름 없는 이름, 상여, 굿, 기억, 봄과 사월 등 우리네 역사 특히 진도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매우 낯익은 풍경들이다. 이러한 이미저리를 간단없이 출몰시킨 까닭은 말할 수 없고 부를 수 없었던 죽음들을 어떻게 예술로 승화할 것인가라는 고민 속에서 불러낸, 작지만 귀한 성과라고 평가할 수 있다.



남도인문학팁

노화욱의 ‘무유’에 대답한 소리굿 ‘누산네 니단이’

니단이의 이름은 봄, 즉 사월이었다. 시에서 말한 잃어버린 봄은 세월호와 함께 침몰하였지만 ‘가만히 있어’야 했고, 정책 부재로 죽임당하였지만 ‘이름조차 내걸 수 없었던’ 풍경의 은유다. 애도의 부재, 삶의 순환질서마저 정지시키는 국가적 강압으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멀리 와 버렸을까? 산 자들의 외면과 더불어 떠나지 못하는 죽은 자들의 혼령이 지난 정권 내내 한반도를 휘감아버렸다. 극 중 상여는 움직이지 않았다. 시에서는 달력이 찢기고 마치 쭉정이처럼 시간이 해체됐다. 진도와 한반도를 떠도는 망혼들을 씻기지 못한 채 서투른 희망만을 말했다. 책임도 외면하고 형식적인 위로와 망각을 부채질했던 권력과 언론, 기만적 국가 애도 시스템을 비판한 것이다. 니단이의 소환, 니단이가 이름 없는 이름으로 호명됐다가 봄이라는 이름을 회복하는 장면이 이를 전복시킨다. 드디어 상여가 움직인다. 모란꽃밭 아래 손에 손잡고 저 벽을 넘어 강강술래로 모인다. 어제 이재명 대통령이 세월호 희생자, 제주 여객기, 오송, 이태원 참사 유족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국가 차원에서 사과했다. 내가 보기엔 일종의 해원굿 한판이었다. 진상규명과 처벌, 지원 등의 과제들이 남아 있지만, 11년의 격차를 두고 노화욱의 시에 국립남도국악원의 소리굿이 답하듯, 진일보한 발걸음이었다. 이 대통령은 ‘국가 제1책임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시인과 예술가들은 말할 수 없던 것을 말하고 부르지 못했던 이름들을 부르며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는 일을 하는 것이 가장 큰 임무일 것이다. 니단이가 이름을 찾았으니 비로소 모란 피는 봄을 기다려도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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