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단상·박원종>민주주의는 동의로부터 시작된다
박원종 전남도의원
입력 : 2025. 07. 17(목) 15:35
박원종 전남도의원.
“민주주의는 동의로부터 시작된다.” 이 말은 거창한 이념이 아니라, 아주 단순한 상식에서 출발한다. 모든 정부의 정책이 정당하려면, 주민이 이해하고 수긍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설명 없는 사업, 주민을 배제한 채 일방적으로 이뤄지는 결정, 그리고 질문조차 허용되지 않는 회의는 아무리 좋은 의도를 담고 있다 해도 민주주의에 맞는 방식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최근 여러 국가를 위한 국책사업들을 둘러싼 갈등 속에서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라는 표현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이는 당시 밀양 송전탑 건설에 맞선 주민들의 외침으로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마을의 일상과 사람들의 삶터가 위협받고 있다는 경고였다. 하지만 이 말은 단지 피해를 호소하는 감정에 머무르지 않는다.

지금 우리는 되물어야 한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과연 성숙했는가, 우리는 진정 주민의 삶을 기반으로 정책을 세우고 있는가.

우리가 늘 이야기하는 민주주의는 국책사업, 미래 개발, 국가발전이라는 그럴듯한 이름 뒤에, 정작 주민의 목소리가 빠지는 일들이 반복되고 있다. 주민과의 소통은 생략되고, 갈등은 예고 없이 닥친다. “내 지역만 아니면 된다”라는 식의 지역 이기주의도 문제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정책 결정의 시작과 끝에서 주민이 빠져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우리는 지역 이기주의를 비판한다. 그러나 이기주의를 말하기에 앞서, 주민들이 왜 동의하지 못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주민 수용성은 갈등의 원인이 아니라, 갈등을 예방하는 가장 근본적인 해법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성숙한 민주주의가 지켜야 할 첫 번째 원칙이다.

중앙정부든 지방정부든, 자율성과 권한을 말하기 이전에 그 주체는 ‘주민’이다. 지역의 환경과 정체성, 삶의 방식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정책이라면, 그 시작도 끝도 주민의 참여 위에서 이뤄져야 한다. 전력망 설치, 재생에너지 개발, 대규모 도시계획, 해양 자원 활용 등은 단순히 기술적, 경제적, 논리로만 설명될 수 없다. 주민이 이해할 수 있는 설명, 충분한 공론화, 실질적 참여가 함께할 때 비로소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올해 9월부터 시행예정인 ‘국가기관 전력망 확충 특별법’ 역시 이러한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보상 기준은 일부 강화되었지만, 정작 그 과정에 주민의 존재는 미미하다. 전력망이 왜, 어떻게 우리 마을을 지나게 되었는지 설명을 제대로 듣지 못한 채, 주민들은 사후에야 통보를 받고 반발한다.

전남 서해안의 경우 영광 신안 구간을 중심으로 초고압 송전선 경과예정지에 대한 반발이 거세다. 반대하는 주민들은 입지선정 과정에 배제됐을 뿐만 아니라 마을 설명회조차 사후 요식행위라고 비판하고 있다. 갈등 예방, 투기 차단 등을 이유로 정보 공유를 제한하고, 주민 의견을 배제하는 방식은 오히려 갈등을 증폭시킨다. 전선 하나가 마을을 가르고, 이웃 간의 정을 멀어지게 만들며, 정부와 지역 사회에 대한 신뢰마저 무너뜨리고 있다.

고압 송전선 설치, 해상풍력 및 에너지 생산 단지, 국방기지, 항만, 공항개발 등 전국 곳곳에서 추진되는 대규모 개발사업도 마찬가지다. 일부 지역은 ‘햇빛연금’과 같은 이익 공유 모델을 도입해 긍정적 변화를 만들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다수 지역에서는 정보 부족과 형식적 절차에 대한 불신이 쌓이고 있다.

주민들의 “우리는 말할 기회를 달라 한 것이지, 돈을 더 달라 한 것이 아니다”라는 성토는 단지 보상이 아니라 정당한 참여와 동의를 요구하는 절박한 목소리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제도 그 자체에 있다. 현재의 공청회나 주민설명회 제도는 대부분 ‘의견 청취’에 그치며, 실질적인 협의나 변경 권한은 거의 없다. 주민이 개발의 초기 기획단계부터 입지선정위원회에 참가하고, 운영방식과 수익 분배 구조에 관여할 수 있어야 한다. 진정한 ‘참여형 개발’은 단지 설명회에 참석하는 것이 아닌 초기 기획단계부터 함께하고 주민들이 공동운영조합 등을 통해 이익은 공유하고 위험은 분산하며 공공성은 제도적으로 확보되는 구조를 의미하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신재생에너지, 탄소 중립, 지방소멸 대응 등 거대한 전환의 갈림길에 서 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더욱 신중하고 정당한 절차 위에서 정책을 결정해야 한다.

정책 추진의 정당성은 법과 절차를 넘어, 주민과의 신뢰 위에서 세워져야 한다. 이를 위해 주민 의견 수렴은 선택이 아닌 법적 의무 절차로 정비되어야 하고, 수용성 없는 사업 강행에는 명확한 책임을 묻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하며, 보상 중심 개발을 넘어서 주민이 개발의 주체가 되는 참여형 모델이 제도화되어야 한다. 아울러 환경 영향 최소화, 정보 공개, 공정한 협의 구조, 공론화의 장이 제도적으로 더욱 보장되어야 한다.

지금의 방식은 민주주의를 돌아보게 만든다. 개발의 방향이 아무리 옳다고 해도, 그 과정에 동의가 없다면 그것은 정당성을 갖기 어렵다.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는 그 외침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가 아직도 그 말 앞에서 멈추지 못한다면, 성숙한 민주주의는 실현되지 않은 약속일 뿐이다.

지방자치는 단지 권한의 분산이 아니다. 주민이 스스로 삶을 결정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민주주의의 생활화이다. 성숙한 자치는 성숙한 시민으로부터 시작되며, 그 출발점은 언제나 ‘동의’에 있다.

선을 그어 땅을 나누는 건 개발이지만, 마음을 잇고 공감을 모으는 건 민주주의다. 동의 없는 발전은 결국 단절이고, 동의 위에 세운 변화만이 진짜 미래가 된다.
민주주의는 언제나 동의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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