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석대>키높이 구두
김성수 논설위원
입력 : 2025. 04. 22(화) 17:35
하이힐은 처음부터 멋이나 장식을 위한 신발이 아니었다. 중세 페르시아의 기마병이 말안장에 발을 고정하기 위해 신었던 실용적 구조물이 그 기원이다. 그 구조는 유럽으로 전파되며 귀족과 권력자의 상징으로 변모했다. 굽이 높을수록 지위도 높았고,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위로 향했다. ‘높게 보여야 한다’는 욕망과 ‘높은 자를 보고 싶다’는 심리가 맞물리며, 굽은 단순한 장치를 넘어 상징이 됐다.

21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당별 경선과정에서 ‘키높이 구두’가 거론됐다. 최근 열린 국민의힘 경선 토론회에서 홍준표 후보가 “왜 키높이 구두를 신느냐”며 한동훈 후보를 향한 인신 공격성 질문을 던졌다. 홍 후보는 “앞으로 정치 계속 하려면 이미지 정치를 하지 말라”는 취지의 발언이라고 했다.

한 후보의 키높이 구두는 이제 단지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보여주기 정치’의 한 장면이 되었고, 장식이 아닌 선언으로, 리더십이 아닌 연출의 상징으로, 무게가 아닌 높이의 정치로 읽혔다.

키를 높이려는 장치는 리더십의 대체제가 될 수 없다. 굽 위에 당당히 서 있는 듯하지만, 그 굽을 벗는 순간 흔들린다면 그것은 중심을 가진 리더가 아니다. 높이는 언제든 연출할 수 있지만, 무게는 삶과 사유, 책임의 시간 속에서만 얻을 수 있다.

이번 국민의힘 경선 토론회는 8인의 대선 후보 중 4인을 가리는 중요한 분수령이었다. 외교·안보, 경제, 윤석열 전 대통령의 탄핵 등 국가적 중대 사안들이 오갔지만, 토론의 중심에는 정작 ‘국민’도, ‘대한민국의 미래’도 없었다. 대신 누가 더 키가 크냐, 누가 더 트럼프와 잘 협상할 수 있느냐, 누가 더 당당해 보이느냐는 이미지 전쟁이 주를 이뤘다. 치열한 공방은 있었지만, 그 치열함이 반드시 깊이를 담보하진 않았다.

정치인이 굽을 신는 이유는 둘 중 하나다. 존재감 없는 키를 감추기 위해서거나, 무게감 없는 말과 태도를 부풀리기 위해서다. 이번 토론회에서 국민의힘 후보들이 보여준 모습은 어떤 쪽에 더 가까웠을까. 윤 대통령의 탄핵이라는 헌정사 초유의 사태 앞에서도, 누구 하나 책임을 자처하지 않았다. 그 정부에 함께했던 인물들이 자신들의 역할은 외면한 채, ‘정권 재창출’이라는 프레임 속에서만 경쟁했다. 사과보다 계산이 앞섰고, 성찰보다 진영 구도가 우선했다.

정치란 무게로 견디는 것이지, 높이로 과시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정치는 연출이 아닌 실체로 말해야 할 때다. ‘키높이 구두’가 주는 허상의 높이는, 위기의 정치를 결코 지탱해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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