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석대>무(無)로 돌아갈 결심
김성수 논설위원
입력 : 2025. 04. 15(화) 17:43

“사리는 찾지 말고 수의는 절대 만들지 말고 내가 입던 옷을 입혀서 태워 달라. 그리고 타고 남은 재는 봄마다 나에게 아름다운 꽃 공양을 바치던 오두막 뜰의 철쭉나무 아래 뿌려달라. 그것이 내가 꽃에게 보답하는 길이다.”
무소유를 삶의 신념으로 지킨 법정(法頂) 스님은 생전 유언에 따라 관도, 수의도 없이, 화장된 뒤 강원도 수류산방 인근에서 비공개로 산골(散骨) 했다. 중국의 덩샤오핑(등소평)도 “각막은 기증하고 시신은 해부용으로 쓴 다음 화장해 바다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실천했다. 그의 유골은 홍콩 앞바다와 중국과 대만 사이의 바다에 뿌려졌다. 그는 “죽은 사람이 산사람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난센스”라며 이 같은 유언을 남겼다. 그는 사후에 자신의 기념관을 세우지 말고 동상도 만들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자연으로 돌아가겠다는 결심은 멀리 있는 이상이 아니다. 삶과 죽음을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한국적 생사관의 한 축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매장지는 포화 상태고, 화장 이후에도 대부분의 유골은 봉안당에 보관된다. 여전히 장례는 허례허식으로 흐르고, 죽음은 자연이 아닌 건축물 속에 갇힌다. 올해 초 화장한 유골의 뼛가루(골분)를 산이나 강, 바다에 뿌려 장사를 지내는 산분장(散紛葬)이 시행됐다. 아직 인식은 여전히 낯설고, 법적 기반은 부족하다.
산분장의 가능성을 말할 때, 일본 나가노현의 ‘바람의 정원’을 빼놓을 수 없다. 그곳은 무덤이 없다. 대신 들꽃이 흐드러지는 야산에 이름 없는 재들이 뿌려져 있다. 남겨진 가족들은 해마다 같은 계절, 같은 자리에 찾아온다. 죽음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 삶을 기억하러. 이와 같은 자연장 개념은 일본에서는 ‘후소(風葬·풍장)’라는 이름으로 오래전부터 논의돼 왔고, 특히 2000년대 들어 생태장 운동으로 확산됐다.
여전히 “무덤 없는 죽음은 허망하다”고 말한다. 어느 정도는 문화다. 어느 정도는 관습이다. 그러나 그 속에는 오랫동안 이어진 허례허식의 매장문화가 있다. 이런 풍경은 더는 효도도, 추모도 아니다. 공간은 부족하고 비용은 커졌다. 남은 자를 위한 장례가 아니라, 죽은 자로부터 남겨진 짐이 되어버렸다.
산분장은 ‘대안’이 아니라 ‘필요’다. 죽음을 화려하게 치르기보다, 조용히 보내는 문화. 더는 누군가의 공간을 빼앗지 않고, 자연 속에 다시 돌아가는 게 바로 삶의 마무리다.
산분장은 아직 낯설다. 하지만 점점 더 많은 이들이 죽음을 통해 자연으로의 복귀를 꿈꾼다. 허례허식 없는 장례, 단출하지만 풍성한 작별,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남기는 마지막 흔적. 그것이야말로 다음 세대를 위한, 가장 아름다운 작별 인사가 아닐까.
김성수 논설위원
무소유를 삶의 신념으로 지킨 법정(法頂) 스님은 생전 유언에 따라 관도, 수의도 없이, 화장된 뒤 강원도 수류산방 인근에서 비공개로 산골(散骨) 했다. 중국의 덩샤오핑(등소평)도 “각막은 기증하고 시신은 해부용으로 쓴 다음 화장해 바다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실천했다. 그의 유골은 홍콩 앞바다와 중국과 대만 사이의 바다에 뿌려졌다. 그는 “죽은 사람이 산사람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난센스”라며 이 같은 유언을 남겼다. 그는 사후에 자신의 기념관을 세우지 말고 동상도 만들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자연으로 돌아가겠다는 결심은 멀리 있는 이상이 아니다. 삶과 죽음을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한국적 생사관의 한 축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매장지는 포화 상태고, 화장 이후에도 대부분의 유골은 봉안당에 보관된다. 여전히 장례는 허례허식으로 흐르고, 죽음은 자연이 아닌 건축물 속에 갇힌다. 올해 초 화장한 유골의 뼛가루(골분)를 산이나 강, 바다에 뿌려 장사를 지내는 산분장(散紛葬)이 시행됐다. 아직 인식은 여전히 낯설고, 법적 기반은 부족하다.
산분장의 가능성을 말할 때, 일본 나가노현의 ‘바람의 정원’을 빼놓을 수 없다. 그곳은 무덤이 없다. 대신 들꽃이 흐드러지는 야산에 이름 없는 재들이 뿌려져 있다. 남겨진 가족들은 해마다 같은 계절, 같은 자리에 찾아온다. 죽음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 삶을 기억하러. 이와 같은 자연장 개념은 일본에서는 ‘후소(風葬·풍장)’라는 이름으로 오래전부터 논의돼 왔고, 특히 2000년대 들어 생태장 운동으로 확산됐다.
여전히 “무덤 없는 죽음은 허망하다”고 말한다. 어느 정도는 문화다. 어느 정도는 관습이다. 그러나 그 속에는 오랫동안 이어진 허례허식의 매장문화가 있다. 이런 풍경은 더는 효도도, 추모도 아니다. 공간은 부족하고 비용은 커졌다. 남은 자를 위한 장례가 아니라, 죽은 자로부터 남겨진 짐이 되어버렸다.
산분장은 ‘대안’이 아니라 ‘필요’다. 죽음을 화려하게 치르기보다, 조용히 보내는 문화. 더는 누군가의 공간을 빼앗지 않고, 자연 속에 다시 돌아가는 게 바로 삶의 마무리다.
산분장은 아직 낯설다. 하지만 점점 더 많은 이들이 죽음을 통해 자연으로의 복귀를 꿈꾼다. 허례허식 없는 장례, 단출하지만 풍성한 작별,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남기는 마지막 흔적. 그것이야말로 다음 세대를 위한, 가장 아름다운 작별 인사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