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45주년>윤상원 “오늘 진다고 해도 영원히 패배하진 않을 것”
●소년이 왔다, 광주는 끝나지 않았다
<3>최후 항쟁 이끈 대변인
지도부 이끌며 ‘광주 진실’ 알려
외교관 꿈꿨지만 시민운동 투신
용기있는 선택 시대의 귀감으로
<3>최후 항쟁 이끈 대변인
지도부 이끌며 ‘광주 진실’ 알려
외교관 꿈꿨지만 시민운동 투신
용기있는 선택 시대의 귀감으로
입력 : 2025. 05. 12(월) 18:41

1970년 무렵 전남대학교에 입학하기 전, 윤상원 열사가 평소 즐기던 취미인 퉁소를 연주하고 있다. 윤상원기념사업회 제공
“표정에는 부드러움과 친절함이 배어 있었지만,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읽을 수 있었다. 지적인 눈매와 강한 광대뼈가 인상적인 그는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울 것입니다(We will fight until the last man)’고 말했다.”
5·18 당시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본 ‘볼티모어 선’ 블래들리 마틴 기자가 1994년 한 국내 월간지에 게재한 내용이다.
1980년 5월 26일 오후 5시께 광주 전남도청 2층 대변인실에 외신기자들이 모였다. 윤상원 대변인이 이튿날 새벽으로 예정된 계엄군의 진압을 앞두고 ‘광주의 진실’을 세계에 전하기 위해 기자회견을 연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당시 국내 언론은 대부분 신군부와 계엄군의 입장을 중심으로 보도하고 있었기에, 시민군은 외신을 통해 광주의 실상을 알리고자 했다.
출입증을 발급받은 외신기자들이 하나둘 대변인실로 들어섰고, 출입구에는 전남대학교 학생 김윤기, 안길정, 19세 박종섭이 카빈총을 들고 경비를 섰다.
통역은 순천 태생의 선교사 집안 출신, 미국인 인요한이 맡았다. 대변인실 안에는 오랜 대치로 지친 시민군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의 얼굴엔 피로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고, 손에 쥔 총기는 여전히 어색했다.
윤상원은 새롭게 꾸린 시민군 지도부 ‘민주투쟁위원회’의 입장과 계엄군 측과의 협상 결과, 피해 상황 등을 간략히 브리핑했다. 이어 외신기자들에게 두 가지를 요청했다.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 대사와의 연결, 그리고 국제적십자사의 구호 개입이었다. 그는 미국을 통해 이 상황을 중재하려는 마지막 방책을 시도하고 있었다.
윤상원은 회견 말미에 “우리가 오늘 설령 진다고 해도, 영원히 패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고 말했다. 그는 다음날 새벽, 도청 진압 작전에 나선 계엄군의 총탄을 맞고 숨졌다. 그의 말은 45년이 지난 지금도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왜, 끝을 알면서도 싸움을 택한 한 사람을 기억해야 하는가?’ 그의 죽음은 단순한 개인의 희생을 넘어, 공동체의 존엄과 자유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저항이었기 때문이다.
1950년 전라남도 광산군(현 광주광역시 광산구)에서 태어난 윤상원은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재학 시절 외교관을 꿈꿨다.
그러나 선배 김상윤을 만나면서 그의 삶은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김상윤을 통해 사회 현실을 직시하게 된 윤상원은 졸업 후 부모님의 바람대로 주택은행에 입사했지만, 6개월만에 사직서를 내고 사회운동에 투신했다.
이후 김상윤이 만든 광주 운동권의 거점인 ‘녹두서점’에 드나들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979년에는 들불야학 1기 강사로 참여해 노동자들에게 사회 과목을 가르쳤다.
1980년 5·18이 발생하자 처음에는 녹두서점에서 화염병을 만들어 후방에서 지원하는 활동을 했다. 그러다 무자비한 계엄군의 진압과 시민들을 간첩으로 몰아가는 현실 속에 ‘무장투쟁론’을 주장하며 점차 지도부의 핵심 역할을 맡게 된다.
당시 윤상원의 가장 가까운 동지였던 김상집(69)씨는 “윤상원은 사람의 마음을 잘 읽고 시원시원한 성격의 소유자였다”며 “비록 ‘시민군 대변인’으로 불렸지만, 실상은 광주를 대표하는 운동가로서 어쩔 수 없이 시민군을 이끌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회상했다.
윤상원은 시민군의 대변인이자 내부 질서를 유지하는 책임자였고, 외신과 시민을 연결하는 통로였다.
최후 항쟁 전날인 5월 26일, 그는 외신기자들과의 회견을 마친 직후 시민군 앞에서 마지막 연설을 남겼다. “우리의 의지는 확고하다. 전두환 살인마가 우리 부모형제들을 무차별 살육하고 있고, 오늘도 공수들이 암매장한 시신들을 찾아왔다. 소식을 모르는 행방불명자들이 이미 수천 명이 넘는다. 자유와 민주를 위해 싸우고 비통하게 숨진 열사들의 숭고한 뜻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는 총을 들고 싸워야 한다…민주정부가 수립될 그날까지 끝까지 투쟁하자. 끝까지 싸울 수 있습니까?” 윤상원의 호소에 시민군은 일제히 “네!”라고 답했다.
5월 27일 오전 4시, 전남도청 안으로 진입한 공수부대는 본관 1층을 장악한 뒤, 곧장 2층으로 진입해 시민군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퍼부었다. 본관과 경찰청으로 통하는 통로에 있었던 윤상원은 공수부대의 M16 총에 하복부를 맞고 쓰러졌고, 결국 사망했다. 그와 함께 도청을 지키던 시민군들도 연이어 쓰러졌다. 시민군의 저항은 1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끝났고, 도청은 함락됐다.
윤상원의 사인을 두고 한때 자상, 화상, 총상이라는 엇갈린 견해가 있었다. 계엄군은 그의 사인을 자상이라 주장했으나, 목격자 증언과 화재 흔적을 통해 총상으로 최종 확인됐다. 시민군 김영철이 윤상원을 매트에 눕혔는데, 최루탄 때문에 불이 붙은 커튼이 매트에 떨어져 누워있던 윤상원 시신에 화상 흔적이 남게 된 것으로 조사됐다.
국립 5·18민주묘지 1묘역 2구역 11번째에 윤상원 열사의 무덤과 묘비가 있다. 윤상원과 영혼 결혼식을 올린 들불야학 교사이자 노동운동가인 박기순과 함께 묻혀있다. 그의 묘비 뒤편에 새겨진 ‘전남도청에서 장렬히 산화’라는 글씨는 윤상원의 죽음과 그의 삶을 생각하게 했다.
윤상원과 가깝게 지냈던 이재의 5·18기념재단 연구위원은 5·18 당시 그의 삶이 우리 시대에 귀감이 된다고 말했다.
이 위원은 “죽음 앞에서 두렵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나. 대의명분을 위해서 그리고 앞서 사망한 사람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 위해서 죽음을 선택한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용기있는 선택을 했다”고 말했다.
이어 “매사 진지하며 책임감과 배려심이 많고, 유머가 있었던 윤상원이었다. 그의 투쟁은 비극적인 종말을 가져왔지만, 역사에 오래 남을 것”이라고 윤상원을 평가했다.
대한민국 역사의 한 조각인 광주 5·18민주화운동 중심에 있었던 윤상원은 비록 이 세상에는 없지만, 그가 남긴 말과 행동은 아직도 우리 시대에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정유철 기자 yoocheol.jeong@jnilbo.com
5·18 당시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본 ‘볼티모어 선’ 블래들리 마틴 기자가 1994년 한 국내 월간지에 게재한 내용이다.
1980년 5월 26일 오후 5시께 광주 전남도청 2층 대변인실에 외신기자들이 모였다. 윤상원 대변인이 이튿날 새벽으로 예정된 계엄군의 진압을 앞두고 ‘광주의 진실’을 세계에 전하기 위해 기자회견을 연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당시 국내 언론은 대부분 신군부와 계엄군의 입장을 중심으로 보도하고 있었기에, 시민군은 외신을 통해 광주의 실상을 알리고자 했다.
출입증을 발급받은 외신기자들이 하나둘 대변인실로 들어섰고, 출입구에는 전남대학교 학생 김윤기, 안길정, 19세 박종섭이 카빈총을 들고 경비를 섰다.
통역은 순천 태생의 선교사 집안 출신, 미국인 인요한이 맡았다. 대변인실 안에는 오랜 대치로 지친 시민군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의 얼굴엔 피로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고, 손에 쥔 총기는 여전히 어색했다.
윤상원은 새롭게 꾸린 시민군 지도부 ‘민주투쟁위원회’의 입장과 계엄군 측과의 협상 결과, 피해 상황 등을 간략히 브리핑했다. 이어 외신기자들에게 두 가지를 요청했다.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 대사와의 연결, 그리고 국제적십자사의 구호 개입이었다. 그는 미국을 통해 이 상황을 중재하려는 마지막 방책을 시도하고 있었다.
윤상원은 회견 말미에 “우리가 오늘 설령 진다고 해도, 영원히 패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고 말했다. 그는 다음날 새벽, 도청 진압 작전에 나선 계엄군의 총탄을 맞고 숨졌다. 그의 말은 45년이 지난 지금도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왜, 끝을 알면서도 싸움을 택한 한 사람을 기억해야 하는가?’ 그의 죽음은 단순한 개인의 희생을 넘어, 공동체의 존엄과 자유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저항이었기 때문이다.
1950년 전라남도 광산군(현 광주광역시 광산구)에서 태어난 윤상원은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재학 시절 외교관을 꿈꿨다.
그러나 선배 김상윤을 만나면서 그의 삶은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김상윤을 통해 사회 현실을 직시하게 된 윤상원은 졸업 후 부모님의 바람대로 주택은행에 입사했지만, 6개월만에 사직서를 내고 사회운동에 투신했다.
이후 김상윤이 만든 광주 운동권의 거점인 ‘녹두서점’에 드나들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979년에는 들불야학 1기 강사로 참여해 노동자들에게 사회 과목을 가르쳤다.
1980년 5·18이 발생하자 처음에는 녹두서점에서 화염병을 만들어 후방에서 지원하는 활동을 했다. 그러다 무자비한 계엄군의 진압과 시민들을 간첩으로 몰아가는 현실 속에 ‘무장투쟁론’을 주장하며 점차 지도부의 핵심 역할을 맡게 된다.
당시 윤상원의 가장 가까운 동지였던 김상집(69)씨는 “윤상원은 사람의 마음을 잘 읽고 시원시원한 성격의 소유자였다”며 “비록 ‘시민군 대변인’으로 불렸지만, 실상은 광주를 대표하는 운동가로서 어쩔 수 없이 시민군을 이끌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회상했다.
윤상원은 시민군의 대변인이자 내부 질서를 유지하는 책임자였고, 외신과 시민을 연결하는 통로였다.
최후 항쟁 전날인 5월 26일, 그는 외신기자들과의 회견을 마친 직후 시민군 앞에서 마지막 연설을 남겼다. “우리의 의지는 확고하다. 전두환 살인마가 우리 부모형제들을 무차별 살육하고 있고, 오늘도 공수들이 암매장한 시신들을 찾아왔다. 소식을 모르는 행방불명자들이 이미 수천 명이 넘는다. 자유와 민주를 위해 싸우고 비통하게 숨진 열사들의 숭고한 뜻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는 총을 들고 싸워야 한다…민주정부가 수립될 그날까지 끝까지 투쟁하자. 끝까지 싸울 수 있습니까?” 윤상원의 호소에 시민군은 일제히 “네!”라고 답했다.
5월 27일 오전 4시, 전남도청 안으로 진입한 공수부대는 본관 1층을 장악한 뒤, 곧장 2층으로 진입해 시민군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퍼부었다. 본관과 경찰청으로 통하는 통로에 있었던 윤상원은 공수부대의 M16 총에 하복부를 맞고 쓰러졌고, 결국 사망했다. 그와 함께 도청을 지키던 시민군들도 연이어 쓰러졌다. 시민군의 저항은 1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끝났고, 도청은 함락됐다.
윤상원의 사인을 두고 한때 자상, 화상, 총상이라는 엇갈린 견해가 있었다. 계엄군은 그의 사인을 자상이라 주장했으나, 목격자 증언과 화재 흔적을 통해 총상으로 최종 확인됐다. 시민군 김영철이 윤상원을 매트에 눕혔는데, 최루탄 때문에 불이 붙은 커튼이 매트에 떨어져 누워있던 윤상원 시신에 화상 흔적이 남게 된 것으로 조사됐다.
국립 5·18민주묘지 1묘역 2구역 11번째에 윤상원 열사의 무덤과 묘비가 있다. 윤상원과 영혼 결혼식을 올린 들불야학 교사이자 노동운동가인 박기순과 함께 묻혀있다. 그의 묘비 뒤편에 새겨진 ‘전남도청에서 장렬히 산화’라는 글씨는 윤상원의 죽음과 그의 삶을 생각하게 했다.
윤상원과 가깝게 지냈던 이재의 5·18기념재단 연구위원은 5·18 당시 그의 삶이 우리 시대에 귀감이 된다고 말했다.
이 위원은 “죽음 앞에서 두렵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나. 대의명분을 위해서 그리고 앞서 사망한 사람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 위해서 죽음을 선택한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용기있는 선택을 했다”고 말했다.
이어 “매사 진지하며 책임감과 배려심이 많고, 유머가 있었던 윤상원이었다. 그의 투쟁은 비극적인 종말을 가져왔지만, 역사에 오래 남을 것”이라고 윤상원을 평가했다.
대한민국 역사의 한 조각인 광주 5·18민주화운동 중심에 있었던 윤상원은 비록 이 세상에는 없지만, 그가 남긴 말과 행동은 아직도 우리 시대에 큰 울림을 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