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 에세이>음식과 영화… 감성 부르는 ‘특별한 만남’
트란 안 훙 감독 ‘프렌치 수프’
입력 : 2024. 06. 24(월) 17:25
트란 안 훙 감독 ‘프렌치 수프’.
트란 안 훙 감독 ‘프렌치 수프’ 포스터.
스페인어 전공인 Y교수가 한 얘기다. “유럽에서 스페인 음식을 중국 음식에 빗대면, 이태리 음식은 한식 같고 프랑스 음식은 일식 같은 면이 있어요.” 곱씹어볼수록 적절한 표현이라는 생각이다. 그 적절함을 영화 ‘프렌치 수프’를 통해 확인해보게 된다. 1885년 프랑스. ‘미식계의 나폴레옹’으로 불리는 미식 연구가 도댕(배우 브누아 마지멜)은 고용 요리사 외제니(배우 쥘리에트 비노슈)와 함께 음식을 만든다. 이들은 완벽한 파트너다. 20년 넘게 한 지붕 아래에서 살며 독창적인 미식의 세계를 펼쳐왔다.

이 주방에서 저절로 피어난 사랑. 그러나 외제니가 도댕의 청혼을 몇 번이나 거절하면서 어느새 두 사람은 ‘인생의 가을’인 중년에 이르렀다. 영화는 두 사람이 손님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장면을 느린 템포로 정성스레 보여주며 시작한다. 요리하는 모습에서 서로를 향한 애정, 존경, 신뢰를 느낄 수 있다. 재료를 굽고 찌고 볶고 끓이는 소리가 자연의 풀벌레 소리와 뒤섞여 음악처럼 들린다. 텃밭마저도 정원처럼 느껴지는 아름다운 프랑스의 시골은 클로드 모네나 마네의 그림이 절로 생각나게 한다. 도댕은 “하나의 맛이 완성되려면 문화와 기억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당대의 미식가 장 앙텔므 브리야 사바랭도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할 수 있다”라고 했다. 식생활을 통해서도 그 사람이 갖춘 문화적 자본, 즉 교육과 지식을 아우르는 문화적 배경, 환경적 역사, 계급 등이 담겼기 때문이다.

도댕은 미식에 집중하는 삶을 누릴 만큼 여유롭고 지위 높은 인물로 보인다. 자신의 고택에서 친구들에게 외제니가 만든 음식들을 또는 외제니와 함께 만든 음식들을 대접하며 맛보고 음미하는 일상이다. ‘프렌치 수프’의 원제는 프랑스 가정식 수프 ‘포토푀’다. 포토푀는 고기와 채소를 오랜 시간을 들여 뭉근하게 끓여야 제맛이 나는 음식이다. 도댕은 “마흔 살 전에는 미식가가 될 수 없다”고 말하는데, 포토푀처럼 익은 맛을 알 수 있는 나이에 이르러야 미식도 사랑도 인생의 의미도 비로소 알 수 있다는 상징이다. 영화에서 이들은 재료 하나 음식 하나하나에 갖은 정성을 쏟는다. 특히, 외제니를 위한 도댕의 스프에는 걱정과 사랑, 죽음을 생각하는 깊은 두려움마저 담겨 있다. 도댕은 외제니를 위한 만찬을 요리하고 디저트 접시에 반지를 숨겨둔다. 청혼마저 요리를 통해 하는 두 사람에게 요리는 두 사람의 밀도 높은 커뮤니케이션이자 진한 소통이며 스스로에 대한 자존체이기도 하다.

20년 넘게 동거하면서도 결혼하지 않은 외제니와 도댕처럼 실제 이 두 배우도 한때 동거관계였다 한다. 헤어진 후 20년 만에, 인생의 가을에 영화 ‘프렌치 수프’에 함께 출연하면서 외제니와 도댕의 사랑을 잔잔하게 구현하는 이들의 나이 먹은 모습이 아름답다.

영화 ‘프렌치 수프’처럼 요리를 소재로 삼는 영화는 꾸준히 등장해왔다. ‘리틀 포레스트’(2018), ‘심야식당’(2016), ‘아메리칸 셰프’(2014), ‘줄리 & 줄리아’(2009) 등 등. 그런데 요즘 들어 먹방과 쿡방이 TV프로그램에 차고도 넘친다. 그러면서도 그 인기는 여전하다. 심지어 ‘먹방(Mukbang)’ 단어가 해외에 소개되고 있다. 먹방이 한국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인터넷 방송 플랫폼인 아프리카TV에서 음식을 먹는 것을 생중계 하는 콘텐츠가 인기를 얻게 되자 TV에 ‘먹방’이 대중화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람들이 먹방 또는 쿡방에 열광하는 이유는 뭘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밥을 같이 먹으면서 정을 나눴지만, 사회가 변하면서 누군가와 머리를 맞대고 밥을 먹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그리고 또 1인 가구의 증가로 변모되었다. 하지만 밥을 함께 먹으며 충족했던 욕구들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래서 먹방을 통해 외로움을 달래고 대리만족도 느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심리학자 이장주는 ‘먹방의 인기는 현대인의 정서적 허기, 즉 외로움으로 표현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다이어트를 요구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대리만족을 통해 먹는 것을 억제하는 스트레스가 해소된다는 이유도 있다. 바야흐로 미디어를 통해 ‘뇌부르는’ 시대에 접어들었나 보다. 영화 ‘프렌치 수프’를 통해 뇌부르기도 감성부르기도 시도해볼 일이다. (백제예술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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