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에 항거한 호남의병사 재조명
[신간]다시 쓰는 구례 석주관전투
정동묵 외 1인│구례문화원
입력 : 2024. 11. 07(목) 16:58
구례 석주관성 전경. 정동묵 작가 제공
‘약무호남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 ‘호남이 없다면 국가도 없다’라는 뜻을 품고 있는 이 관용구를 다시금 되새길 기회가 마련됐다.

우리는 흔히 역사를 과거로만 기억한다. 하지만 작품의 공동저자들은 과거의 역사는 현재로도 기억된다고 말한다. 지금을 사는 우리 개개인에게 새로운 기억으로 현상(現像)되기 때문이다. 호남 동부지역의 정유재란사를 재조명할 수 있는 책이 발간됐다. 지난 9월30일 정동묵·문수현 작가의 공동 지음으로 구례문화원에서 펴낸 호남 의병사를 그린 작품이다. 구례군 토지면 송정리에 자리한 석주관성을 중심으로 정유재란 당시 목숨을 걸고 벌인 의병들의 항일 투쟁사를 담고 있다. 총 5차례에 걸친 이 전투에서 구례 현민 3500여명과 화엄사 승병 153명이 장렬히 전사했다.

1597년 8월16일, 임진왜란 때부터 줄곧 구례를 지키던 구례 현감 이원춘과 전라 병마절도사 이복남이 남원성전투에서 전사하자 왕득인은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한다. 그는 평소 눈여겨 본 석주관으로 구례 의병 400여명과 함께 들어가 섬진강과 인접한 외길을 타고 들어온 왜군과 2차례에 걸쳐 맞붙었다. 첫 번째 전투에서는 이겼으나 두 번째 전투에서는 패하며 모두 전사했다. 1597년 9월 말쯤의 일이었다.

‘구례 석주관 전투’는 호남을 유린하던 왜군에 전 현민이 들고일어난 한 맺힌 혈투다. 당시 5만7000여명의 왜 좌군은 호남 일대를 잔인하게 짓밟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 오로지 조선의 왕을 잡고 명나라를 침략하기 위해 부산에서 한성으로, 한성에서 평양을 거쳐 의주로 북진했던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호남을 장악하고 모든 생명을 죽이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정유재란은 오로지 호남을 짓밟기 위한 전쟁이었던 것이다.

순천 왜교성에 진주하고 있던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부하 시마즈 요시히로로 하여금 어떤 수를 써서라도 석주관을 탈환하라고 명령했다. 1597년 11월과 12월, 그리고 이듬해 봄(음력 3월로 추정)까지 시마즈는 모두 3차례에 걸쳐 대부대를 이끌고 공격해 왔지만, 의병들과 구례 현민은 갖가지의 유격전으로 맞서 왜군을 두 번 격퇴한 뒤 마지막 5차 전투에서 패해 모두 지리산과 섬진강의 산하에 잠들고 말았다.

이번에 출간된 ‘다시 쓰는 구례 석주관전투’는 구례의 전투뿐만 아니라 임진왜란부터 정유재란까지 호남을 지키려던 고경명 부자의 금산전투, 황진의 웅치·이치전투, 김시민의 1차 진주성전투, 황진의 2차 진주성전투, 이복남과 이원춘의 남원성전투 등 호남 의병장들의 역사적 항쟁을 일목요연하게 서술한다. 책의 공동저자인 정동묵 작가는 지난 6개월간 석주관에서 살며 임진왜란·정유재란과 동고동락했다. 석주관 7의사의 책들을 펴 들고 관련 동영상을 보며 작품 기술에 몰두했다. 그는 구례에 살면서 19번 국도를 타다 석주관 칠의사를 지나칠 때면 늘 궁금했다고 전한다. 이런 궁금증은 결국 치열했던 구례의 의병사를 탐구해 책으로 펴내는 시도로 이어진다.

정 작가는 “글을 쓰며 ‘7의사’로 불리는 7명의 의병장과 그들과 함께 이름 없이 죽어간 3500명의 구례 현민, 153명의 승병에게 마음이 쏠렸다”고 밝혔다.

이어 “석주관성에서 구례 의병과 맞붙었던 시마즈 요시히로의 후대가 메이지 유신의 한 세력으로 거듭난 뒤 현재 일본 해군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그때 시마즈를 석주관에서 잡았다면, 그 뒤 일본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과거의 역사는 현재로 이어진다”고 부연했다.

한편 구례 섬진강변에 자리 잡은 석주관칠의사는 427년 전의 그 일을 지금의 우리가 기억하고자 하는 숭고한 뜻이 머물러 있는 장소다.
박찬 기자 chan.park@j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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