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굴곡진 질곡과 한 많은 평생’ 노년의 역사
봄빛
정지아 | 창비 | 1만6800원
입력 : 2024. 03. 14(목) 14:34
봄빛.
대형 베스트셀러의 입지를 확고히 할 만큼 폭발적인 독자의 호응을 얻음과 동시에 문화 각계의 호평을 얻은 ‘아버지의 해방일지’의 작가 정지아의 초기작 ‘봄빛’이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으로 새롭게 출간되었다. 작가 스스로 밝히듯 ‘봄빛’ 곳곳에는 ‘아버지의 해방일지’의 중요한 요소를 이루는 씨앗이 던져져 있다. 어떤 대목은 ‘아버지의 해방일지’ 속 등장인물의 감춰진 에피소드로 읽히고, 어떤 대목은 새로운 관점에서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더 깊이 이해시켜주기도 한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사랑하는 독자라면 ‘봄빛’을 반드시 읽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물론 ‘봄빛’은 그 자체로 눈부시게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소설집이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봄빛’을 읽고 정지아에 대한 확신과도 같은 신뢰를 갖게 됐다. … 세간의 잔재주들이 결코 범접할 수 없는 기품에 도달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만큼 이 소설집은 잘 짜인 서사가 선사하는 묵직한 문학적 울림으로 가득하며, 한편 한편에서 짜릿하고도 극적인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

특히나 이 소설집이 천착하는 주제인 ‘잃어버린 기억’, ‘가족의 의미’, ‘현대사를 바라보는 관점’ 등은 여전히 유의미할뿐더러, 어떤 면에서는 소설집이 처음 발표될 당시(2008)보다 더욱 중요해졌다. 새롭게 선보이는 ‘봄빛’의 이야기가 여전히 감동적인 동시에 재미있는 것도 아마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표제작 ‘봄빛’에서는 젊은 시절 서슬이 퍼렇던 아버지가 치매에 걸린 듯하다는 어머니의 걱정스러운 전화에 아들이 시골을 찾는다. 밥상머리에서 ‘뚜부’(두부) 반찬을 내놓으라고 막무가내 호통을 치는 아버지와 평생 큰소리 한번 못 냈지만 남편의 보살핌 속에 살아온 어머니의 변한 모습을 보고 아들은 두려울 만큼 가슴이 먹먹해진다. 다음 날 검사 결과를 위해 찾아간 병원에서 뇌에 문제가 있다며 아버지는 치매 초기 진단을 받는다. 돌아오는 길에 노부모가 나란히 자동차 뒷자리에서 잠든 모습을 보며 아들은 그동안 부모에게 받은 것을 돌려줘야 할 때가 돌아왔음을 깨닫는다. 이 작품에서 잃어버린 기억은 자식들을 키우고 평생을 살아내야 했던 아버지의 역사이다. ‘봄빛’이 주는 큰 감동을 문학평론가 정홍수는 생생한 사투리 생활어 표현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뚜부’가 올라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벌이는 서글픈 설전은 오랫동안 기억될 명장면”이다.

수록작 ‘세월’에 이르러서는 치매와 노화가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 우리 역사의 질곡으로까지 맞물려 확장된다. 빨치산이던 남편을 따라 산에 오르고, 첫아이를 눈물로 보내고, 평생 남편을 하늘같이 믿고 따라온 아낙이 기억을 잃은 남편 옆에서 그동안 말하지 못한 속내를 넋두리로 늘어놓는다. 이 대목에서 ‘세월’의 화자는 ‘아버지의 해방일지’의 ‘어머니’이고 ‘이녁’은 ‘아버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녁이 화자에게 글공부를 시켜준 에피소드나, 옥살이를 한 이야기는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은 사람에게는 새로운 재미로 다가온다. 이 작품에서 남편이 잃어버린 기억을 복원하고 되새기는 일이란 곧 역사의 복원이고 증언이 된다. 작품 전체에 걸쳐 넋두리를 읊는 아낙은 시종 진한 남도 사투리를 구사하여 살아 있는 입말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게 한다.

한 많은 평생의 기억을 잃고 자신의 존재조차 잊는 노년의 애틋한 정서를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 외에도, ‘봄빛’에는 복잡하고 미묘한 인생과 인연의 여러 국면을 다채롭게 그려낸 작품들로 읽는 재미가 풍성하다. 가벼운 이야기가 넘쳐나는 시기에 ‘봄빛’의 묵직함은 오히려 신선한 문학적 감동으로 다가온다. ‘봄빛’이 지닌 향토성은 시간이 지나도 촌스러워지지 않는 고궁과 같은 매력을 뿜어내며, 보편적인 감수성을 자극해 저마다의 그리움을 되살려낸다.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은 움직이게 된다. 문득 부모님의 안부를 묻게 되고, 그리운 사람에게 연락을 하게 된다. 혹은 자기를 위해 하루쯤 근사한 ‘호캉스’를 계획하게 될지도 모른다. ‘봄빛’에는 언젠가 사라질 것들을 살펴보고 아껴주게 하는 힘이 있다. 그것이 바로 좋은 이야기가 주는 힘일 것이다.

정지아 작가는 1965년 전남 구례에서 태어나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장편소설 ‘빨치산의 딸’을 펴내며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199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고욤나무’가 당선되었다. 소설집 ‘행복’, ‘봄빛’, ‘숲의 대화’, ‘자본주의의 적’, 장편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 등이 있다. 만해문학상, 이효석문학상, 김유정문학상, 심훈문학대상, 5·18문학상, 요산김정한문학상, 오영수문학상, 한무숙문학상, 노근리평화문학상, 서라벌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정지아 작가. 전남일보 자료사진
도선인 기자 sunin.do@j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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