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 호남 우도농악의 아버지, 최화집과 장성농악의 계보
413. 우도농악의 아버지 최화집
입력 : 2024. 09. 19(목) 18:28
우도농악 보유자 전경환이 문한준에게 탈 제작을 전수하는 과정.
우도농악 상쇠 전경환이 문한중에게 전수한 농악잡색탈-영광군지
영광우도농악 잡색-영광군지
한국의 농악을 흔히 광역 지역 이름으로 나눈다. 경기농악, 경상농악, 충청농악, 호남농악 따위가 그것이다. 그런데 유독 호남농악은 좌도농악과 우도농악으로 나눈다. 왜 전라도만 두 개로 나누어 의미를 부여했을까? 다른 지역에 비해 우수하고 넓기 때문이다. 두 개로 구분해야 할 만큼 세력이 컸다는 뜻이다. 오늘날 전승되는 농악의 형태가 근대기에 재구성된 것임은 여러 차례 소개하였다. 지난번 언급한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속편��(경인문화사, 2013)을 다시 본다. “세조가 농사를 열심히 장려할 때 일부러 농가(農歌)를 만들고 노래에 능한 기생 중에서 농가를 잘 부르는 여자 9인을 선정하여 오로지 농가를 부르게 하여 민생의 어려움을 알게 하시니, 이것은 국정(國定) 농악이라 할 것이다. 최근에 옛 사당패와 굿중패의 놀이를 농악이라는 이름으로 연행하는 일이 더러 있지만, 이것은 농촌의 오락이라는 의미로 농악이라 할는지는 모르지만, 결코 본연의 농악이 아니다.” 이 기록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최남선(1890~1957)이 두레 농악에 의미를 두고 있다는 점, 1900년대 초에 이미 사당패와 굿중패(중매구패)의 놀이를 농악으로 호칭했다는 점, 세조 이후 이앙법을 포함한 두레 농업의 장려가 이루어졌다는 점 등이다. 그래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두레 농악을 중심으로 궁중이나 관아의 나례희(儺禮戱)와 군사훈련의 습합을 거쳐 1900년대에 유랑 연희패들의 높은 기예를 보탠 형태로 발전해온 것이 농악이라는 점이다. 악기 연주를 중심으로 마을 당산에 의례를 하고 집집마다 마당 밟이를 하며 각종 탈을 쓰고 연극을 하기도 하고, 농사일을 흉내 내는 놀이를 하는 등 복합적인 구성을 취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는 이런 점에서 일곱 가지 정도의 풍속들을 근대기에 재구성한 것이 농악이라고 정리하고 있는데, 기회를 보아 다시 소개하기로 한다. 전국적으로 보면 제1회 농악경연대회를 창경원에서 개최(중앙신문 1946. 5. 15)했다는 기사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나라 유사 이래 처음인 국악원 본사 공동주최 군정청에 술과 후원의 전국농악경연대회는 10일부터 창경원 금잔디 위에 배열적인 열연을 베풀어 다대한 성과를 거두고 13일 대단원을 지었는데 이번에 각도별 입상부대와 개인별 입상자는 다음과 같다. 도별상: 특등 전북, 1등 충남 2등 강원, 연기상: 꽹과리 전남, 장고 전북, 법고 충북, 무등 경기, 개인상: 꽹과리 최화집, 라덕봉, 장고 김만석, 최상근, 법고(法鼓) 한판석, 김영환, 잡색(양반) 최섭룡”. 이듬해 2회 농악대회가 열린 후 전국민속경연대회로 바뀌고 무형문화재법이 제정되면서 이른바 민속문화 중흥기가 전개된다. 농악 또한 크게 활성화된다. 여기서 거론되는 대표적인 인물이 흔히 우도농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장성의 최화집이다.



우도농악의 아버지 최화집의 디딤새



우도농악의 중심에 흔히 영무장(靈茂長) 농악이 있다고 한다. 영무장은 영광, 무장(고창), 장성을 말한다고도 하고, 일군의 연구자들은 영광과 무장(茂長) 즉 영광과 고창만을 가리킨다고 말하기도 한다. 나는 세 지역을 거명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그 이유 중의 하나가 상쇠 최화집(1871~1959)이다. 출생연도는 기록에 따라 달리 나타난다. 특이한 점은 우도농악을 거론하는 거의 모든 자료에 심지어 우도농악의 시조로까지 거론한다는 점이다. 1946년 우리나라 최초이자 역사 이래 처음이었다고 하는 전국 농악대회에서 꽹과리로 개인상을 받은 내력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언제부터 우도와 좌도를 나누어 호명했는지는 좀 더 연구해봐야 알겠지만 대개 김제, 정읍, 고창, 장성, 광주, 영광 지역 등을 묶어 우도농악이라 한다. 이후 판소리를 크게 나눌 때와 연계하여 서편제 지역을 통칭하여 말하기도 한다. 국어사전에서는 전라남도 서부 평야지대에서 발달된 농악이라 하고, 영광군 교촌리에서 전해지는 영광농악이 가장 대표적이라고 한다. 공식적으로 우도농악이라는 이름을 붙인 데가 ‘영광우도농악’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기차 노선에 비교하여 우도와 좌도를 설명하곤 하는데, 전라선에 속한 지역이 좌도농악이고 호남선에 속한 지역이 우도농악이란 식이다. 김익두를 비롯한 임미선, 양옥경 등 전북대학교 관련 학자들에 의해 관련 연구가 진행되었지만, 최화집에 대한 연구는 진행된 적이 없다. 보름 전 우도농악 보유자 문한준의 도움을 받아 광주에 사는 최화집의 손녀 최연숙(호적 이름은 최선예, 84세)과 손녀사위 김백술(86세)를 인터뷰하였다. 하지만 이렇다 할 정보를 구술받지 못했다. 어렸을 때 기억이 너무나 뚜렷하다는 점은 확인하였다. 최화집이 상모를 쓰고 꽹과리를 칠 때 발 디딤새를 보면, 땅에 발을 딛는 둥 마는 둥, 발 디딜 새가 없이 마치 새가 날 듯이 연주를 하였다는 것이다. 장성군에서 펴낸 <우리가 본받아야 할 장성사람들>(2013, 장성군 문화관광과)에서는 최화집은 물론 전경환을 거쳐 다시 상쇠 보유자로 지정된 문한준을 구체적으로 기록해두었다. “최화집(崔化集, 1878~1959)은 전라도 장성, 영광, 고창, 정읍 등 호남 우도농악의 상쇠 중 1세대 최고의 명인으로 알려졌다. 선생의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아버지 최학봉과 어머니 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원래는 전남 나주 본량면 동림리에서 살았으나, 48세 되는 1926년에 고향에서 가까운 장성 삼서면 두월리 소갈 마을로 이사왔다(다른 기록에는 어렸을 때 소갈마을로 온 것으로 나온다). 그곳에서 농악에 필요한 전립, 상모, 탈 등을 직접 만들고 제자를 가르치며 호남 우도농악을 크게 발전시켰다. 1987년에 전남무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된 호남 우도농악은 1900년대에 장성의 최화집, 부안의 김바우, 정읍 김도삼의 노력으로 발전해왔다. 최화집은 긴 줄을 돌리는 상모놀이를 잘해 각종 대회에서 상을 휩쓸었고, 1946년에는 창덕궁에서 열린 전국 농악 경연대회에서 상쇠상을 받아 명인이 되었다.” 지면상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지만 왜 최화집을 우도농악의 시조 혹은 아버지라고 부르는가에 대한 지점은 체크 해 둘 필요가 있다. 1900년대 초기 우리 농악이 전국적으로 번성하였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정읍 소재 보천교의 영향이나 동학에서의 쓰임새 등을 더불어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농악의 맥락이 깊고도 넓다.



남도인문학팁

장성농악의 계보, 호남우도농악의 아버지 최화집에서 문한준까지



<장성군 마을사>(삼서면편, 1992)에는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농악 풍어제 민요편)를 인용하여 최화집을 설명하고 있다. 부포놀이에 능하였고 그의 기예는 이주환(나주 이주완의 오기로 보임), 고창의 강성옥, 박성근 등에게 이어졌으며, 오늘날에는 영광의 김성락, 전경환, 고창의 김상구 등에게 이어졌다고 했다. 최화집으로부터 우도농악이 활성화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주목하는 문서다. 영광, 고창, 장성농악 즉 영무장농악과 우도농악의 상쇠 뿌리가 최화집에게 있다는 증언이기도 하다. 그래서 주목하는 것이 장성농악의 계보다. 더구나 장성의 최화집으로부터 영광의 전경환으로, 다시 장성의 문한준으로 우도농악 꽹과리의 계보가 이어졌음을 상기하면 장성농악의 계보를 좀 더 꼼꼼하게 추적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 명성에 비해 장성농악 관련 연구나 농악 활동이 활성화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영광농악, 고창농악, 광주농악 등에 비교된다. 우도농악의 아버지라는 최화집뿐만 아니라 영무장농악의 본 고장이라는 명성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장성농악의 계보를 추적하고 재구성하는 지혜가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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