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 영암 삼호 강강술래, 현대인의 소통과 치유의 장
412. 마한의 떼춤과 영암 삼호 강강술래
입력 : 2024. 09. 12(목) 18:20
영암삼호강강술래 연습.
영암삼호 강강술래-임봉금.
한 무리의 젊은 여성들이 모인다. 영암 삼호 시민문화체육관 강당, 더위가 꺾이지 않은 이른 저녁 시간, 고된 업무를 털어내기라도 하듯 강당을 뛰기 시작한다. 손에 손을 잡고 원 모양으로 앞 사람을 따른다. 잡은 손을 놓고 몸을 비틀어 춤을 추기도 하고 끼리끼리 놀이를 하기도 한다. 손에 손을 잡으니 1988년 서울올림픽 공식 주제가가 떠 오른다. 이탈리아 작곡가 조르조 모로더가 작곡하고 그룹 코리아나가 불러 유행했던 곡이다. 반복되는 가사가 바로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우리 사는 세상 더욱 살기 좋도록~”이다. 올림픽에서만 이런 유형의 노래가 불린 것이 아니다. 손에 손잡고 노래하고 춤추고 놀이하는 전통은 우리의 전통 민속놀이인 강강술래에 깊숙하게 스며들어 있다. 손을 잡고 원을 그리며 노래하거나 놀이하는 전통은 세계 보편이다. 하지만 강강술래가 유네스코 무형유산에 지정되었듯이, 또 다른 탁월함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 이같은 전통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대개 연구자들이 인용하는 단골 레퍼토리가 <<삼국지위지동이전>> <마한조>의 오월제 춤이다. “항상 오월 씨뿌릴 때가 되면, 귀신에게 제사 지내고, 무리 지어 노래하고 춤을 춘다. 밤낮없이 쉴 줄 모르고 술을 마신다. 그 춤은 수십 사람이 함께 일어나 따라가면서 땅을 밟는데, 손과 발이 서로 응한다. 마디마디 아뢰는 사람이 있어, 탁무와 비슷함이 있다. 시월 농사가 끝나면 다시 이와 같이 하는데 귀신을 믿는 것이다.”(이하 생략) 오늘날의 단오 절기의례에 비유할 수 있다. 조선 중후기 이전까지는 모내기를 거의 하지 않고 직파했기 때문에 산두라고 하는 밭벼든 수경재배하는 논벼든 씨를 뿌리고 치루는 일종의 절기 축제에 해당한다. 흔히 ‘오월제의’라고 한다. 수십 사람이 함께 일어나 따라가면서 땅을 밟는 것, 오늘날의 강강술래 뜀뛰기와 다르지 않다. 손과 발이 서로 응하는 데서 강강술래는 물론 부속 놀이까지 연결하여 설명할 수 있다. 마한에 54개의 소국이 있다 하였고, 그곳이 리아스식 해안이 잘 발달해있었기에, 지금의 남도 땅, 물가, 해안, 강가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나는 수년 전 이를 근거로 강강술래가 ‘천 개의 강에 비친 그대 찾기’라는 해석을 하기도 했다. 천강, 월강, 달강이 모두 강강술래와 관련된다. 마디마디 아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구절구절 메기는 사람이 있어 선창했다는 뜻이다. 당연히 메김소리와 받는소리가 서로 대응하는 장면을 연상해볼 수 있다. 중국 탁무(鐸舞)의 탁(鐸)은 방울이나 목탁 같은 악기를 말한다. 마치 악기를 들고 춤을 추듯이 몸짓을 한다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 떼로 모여 추는 춤이니 ‘떼춤’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오늘날의 강강술래는 마한의 떼춤에서 비롯되었다.



마한의 떼춤에서 국립마한센터가 유치된 영암 삼호 강강술래까지



고된 직장 일을 마치자마자 한 공간으로 모여들어 강강술래를 연습하는 이들의 마음을 생각해본다. 무엇이 이들을 이 놀이터로 모이게 하였을까? 강강술래의 기본은 서로 손에 손을 잡는 것이다. 신분의 격차도 존귀의 우열도 장유의 순서도 개의치 않는다. 부자와 가난한 자가 손을 잡고 여성과 남성이 손을 잡으며 못난 자와 잘난 자가 서로 손을 잡는다. 오로지 이것이 강강술래의 철학이다. 오늘날 현대인을 핵개인이라고 표현한다. 송영길이 그의 책에서 주장한 이론이다. 파편화되고 개별화되며 소외되어가는 현대인을 매우 적절하게 표현했다고 생각된다. 물론 정체성을 스스로 규정하고 자신만의 라이프스타일을 만들어나가는 경향 속에서 공동체나 전통적인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함을 말한다는 데는 큰 의미가 있다. 문제 삼고 싶은 것은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난 사회적 파편화와 소외 현상이다. OECD 나라 중 20년 넘게 자살률 1위를 하고 고독사와 청년 소외 문제가 임계점을 넘고 있다. 물리적으로 또 정서적으로 고립되는 현대인들의 출구를 도대체 어디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그 대안으로 강강술래 정책을 주창해왔다. 좀 다르긴 하지만 유신 정권 때의 국민체조와 견주어도 좋다. 마을마다 직장마다 전국 방방곡곡에 이 정책이 시행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강강술래의 스킨십은 적절한 제도와 정책, 혹은 프로그래밍을 통해 손잡음을 공식화할 수 있는 최적의 장치일 수 있다. 고대의 마한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던 자연합일의 심성을 핵개인의 시대에 대입하여 현대의 문법으로 풀어본다면 아마도 영육의 스킨십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낱개의 사람과 사람들이 서로 네트워크 하며, 마음뿐 아니라 몸을 부대껴 소통하는 스킨십의 메커니즘 말이다. 기회가 되면 내가 오랫동안 주목해온 아프리카 세네갈의 샌드스쿨에 대해서도 소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몸짓 하나 손짓 하나에 수천 년 스며든 흑인 조상들의 에너지가 있고 그 안에 구축해온 철학이 들어있다. 마찬가지로 영암 삼호지역 중공업 중심 직장인들 혹은 그 가족들이 모여 행하는 강강술래의 속에, 이곳 마한 땅에서 땅을 구르며 하늘에 제사 지내던 조상들의 심성과 철학이 스며들어 있다. 때마침 지난해에 국립마한역사문화센터가 영암군에 유치되었다. 부지는 이곳 삼호면에 마련되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바로 그곳에서 바쁜 직장 일을 마치고 모여서 떼춤 추는 무리가 있다. 이를 어찌 허투루 볼 수 있을 것인가. 어찌 영암 삼호 강강술래를 주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남도인문학팁

영암 삼호 강강술래단

영암 삼호 강강술래단은 30대와 50대 여성 직장인들 중심이다. 50여 명이 채 안 되지만 전국 어느 강강술래단보다 에너지가 넘친다. 바삐 뛰고 빠르게 돌며 유연한 몸짓으로 놀이한다. 젊으니까 그러할 것이다. 전체 인원의 7~80%가 중공업 직장인이거나 그 가족들이다. 이외 20대, 40대, 60대, 70대가 일부 포함되어 있다. 전형적인 도시형 커뮤니티다. 도시형 강강술래라고 이름 붙여도 손색이 없겠다. 삼호읍 강강술래단이 꾸려지던 20여 년 전에는 농어업에 종사하던 이들이 8~90%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술래단으로 꾸려지지 않았을 뿐, 예컨대 추석 때는 늘 강강술래 놀이를 이어왔다. 당시 4~50대가 지금 6~70대가 되었다. 고령화되면서 모임에 나올 수 없게 된 이들이 늘었다. 이후 젊은 직장인과 주부로 대체되었다. 강강술래단을 이끌었던 박정희(70세, 메김소리꾼)는 이렇게 말한다. 일종의 문화적 차이라고나 할까? 남편 따라 혹은 중공업 이주에 따라 영암으로 옮겨온 이들이기 때문에, 농어업을 기반으로 삼고 있던 원주민들의 강강술래단에 낄 틈이 없었다. 하지만 2007년경 현재의 강사인 임봉금을 섭외하여 강강술래 지도를 받으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이른바 도시형 강강술래단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임봉금 강사는 판소리 전문 예인이자 영암 국악협회장으로 활동하면서 강강술래의 지도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메김소리꾼 김순천(65세)은 임봉금에게 판소리를 배워 국회의장상을 받는 등 판소리로도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현재는 일주일에 한 번씩 영암체육관에 모여서 연습을 한다. 직장인들이라 낮에는 일터에 나가고 저녁 시간 짬을 내 연습을 하기에 힘이 들지만 다들 만족해한다. 강강술래의 역사가 마한의 오월제로 거슬러 오를 수 있다는 점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초당대 박해현 교수의 말마따나 옛 마한의 심장부가 영암이다. 그 땅을 발 굴러 밟으며 앞사람 따라 춤을 추는 이들의 몸짓을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다. 노래 가사는 물론 마한 관련 안무도 넣는다니 더욱 좋다.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 선도할 삼호 강강술래의 미래를 기쁜 마음으로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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