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광복" 계단에 선 임정요인들 마침내 환국사진 찍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발자취를 따라 ④ 충칭 임정 (끝)||항저우·전장·창사·광저우 거쳐 독립운동 마침표 찍음 충칭 ||시내 복판 마지막 청사 연화지 계단 양옆 위치한 다섯동 건물 ||정부 부처별 사무실 자리잡아 맨위 건물엔 백범 선생 집무실 ||광복군 총사령부 복원도… 가족들 머문 토교촌 보존 과제
입력 : 2019. 04. 10(수) 17:56
충칭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 '연화지' 의 계단. 1945년 백범 김구 선생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해방 후 조국으로 돌아갈 때 마지막 사진을 찍었던 곳이다.
중국 충칭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마지막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다. 상하이에서 출범한 임시정부는 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 등을 거쳐 1940년 9월 충칭에 자리를 잡았다.

충칭에서 임시정부는 항일 독립운동에 온 힘을 다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5년 후 해방의 기쁨을 맞이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충칭에서도 총 4곳의 청사를 옮겼다. 양유가, 석판가와 오사야항, 연화지가 그곳이다. 연화지는 충칭으로 옮겨온 뒤 입주했던 네 번째이자 마지막 청사다. 현재 충칭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청사이기도 하다.

중국 충칭 시내 한가운데 위치한 충칭 임시정부청사 '연화지'.

현재 도시개발 중인 아파트촌과 주택지 사이에서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연화지는 임시정부 27년의 역사 동안 유일하게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현판을 걸고 활동한 곳이다.

충칭 임시정부청사 '연화지' 입구로 들어서니 1층에 마련된 김구 선생의 흉상이 일행을 반겼다.

청사의 가파른 계단을 올랐다. 1945년 11월 3일 백범 김구 선생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해방 후 조국으로 돌아갈 때 마지막 사진을 찍었던 바로 그 계단이다. 충칭 임시정부청사의 상징과도 같은 공간이다. 지난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이 이곳을 찾아, 계단 앞에서 임정 요인 환국 사진을 재연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실제 계단에 서니 애국지사의 걸음을 느끼며 해방의 감동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뭉클해졌다.

광복군 유한휘 선생의 아들 유경식 광복회 유족회 총무는 "해방을 맞이한 연화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계단에 서니 그날의 감동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면서 "임시정부 광복군에서 가열찬 독립운동을 펼치신 아버지 생각이 나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

가파른 계단 양옆으로 다섯동의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각 건물에는 외교부, 재무부 등 정부의 부처별 사무실이다.

계단 맨 위 건물의 백범 김구 선생 판공실과 집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판공실엔 김구 선생의 책상과 침대, 옷장 등이 그대로 재현돼 있다. 옷걸이에는 검은 두루마기가 걸려 있었다. 차리석 선생 방엔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출간한 '차리석 생애와 독립운동'이란 제목의 책도 책상에 놓여 있었다.

전시실에는 임시정부의 역사와 함께 충칭에서의 활동이 자세하게 적혀있다. 다만, 아직도 많은 양의 자료가 보관실 안에 쌓여 빛을 보지 못한 점이 아쉬움을 남긴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1945년 8월15일, 이곳에서 대한민국 해방을 맞이했다. 임시정부 요인들이 조국으로 돌아온 건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난 1945년 11월이다. 1945년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한 후 충칭 청사는 여관, 학교, 주택 등으로 사용되다 1994년 중경시와 협정을 맺고 복원을 시작했다. 1995년 8월 한중 양국 정부 협의로 복원됐다.

해방의 기쁨과 함께 충칭 시내 중심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충칭 광복군 총사령부 복원 공사가 한창이었다. 2014년 중국 정부가 광복군 총사령부의 복원을 결정했을 당시만 해도 이 건물은 '미원건물'로 불리며 중국 음식점과 옷가게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 이듬해 중국 정부는 추후 복원을 전제로 광복군 총사령부 건물을 철거했지만, 2016년 사드 배치로 한중 정부 간 복원 논의는 사실상 중단됐다.

지난 2017년 말 문재인 대통령이 중국 공식방문 때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광복군 총사령부의 조속한 복원 추진에 합의하면서 공사는 속도를 냈고 지난달 말 복원됐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올해, 애국선열들의 피와 땀이 어린 발자취가 살아나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충칭 시내에서 30분쯤 차를 타고 임시정부 요인 가족들이 거주했던 토교로 향했다.

토교는 1940년대 충칭의 한인촌이었다. 기나긴 피난 생활을 마치고 충칭에 도착한 임시정부 요인들의 가족들은 충칭 외곽에 있는 토교에 뿌리내렸다. 동감폭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기와집 세 채를 짓고, 맞은편에 기와집을 사서 100여 명이 거주했다고 전해진다. 광복군이 별도로 조직한 보충대 토교대 대원들도 이곳에 머물렀다.

현재 충칭 철강공장 안에 있는 토교 한인촌은 집터만 남아있었다. 토교마을 당시 모습은 사라지고 수풀로 우거져 있었다. 쓰레기도 널브러져 있었다. 한때 물을 길어다 마셨다던 동감폭포는 흙물이 된 지 오래인 듯 보였다. 역한 냄새마저 풍겨왔다. 더욱이 이곳은 철강공장의 이주와 개발 등으로 인해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토교촌의 보존 역시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진 숙제인 듯하다.

집터의 귀퉁이에 '한인 거주 옛터'라고 쓰인 표지석만이 역사의 흔적을 증명하고 있었다. 표지석 뒷면에 "충칭으로 이동해온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가족들이 1940년부터 1945년까지 거주했던 곳"이라는 설명이 적혀 있었다. 비문 아래 무궁화 꽃다발이 놓여있었다. 짧게나마 묵념을 표하고 마지막 장소로 향했다.

토교 한인촌을 뒤로하고 향한 곳은 화상산 한인 묘지 터다. 이곳 역시 정확한 안내표지 등은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위치를 찾기가 어렵고, 그 흔적 또한 찾아볼 수 없었다. 김구 선생의 모친인 곽낙원 여사와 장남 김인도 이곳에 묻혔다고 한다. 해방을 앞두고 머나먼 타국에 묻힌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족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저미어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맞아 돌아본 임시정부 27년의 역사.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에서 충칭 임시정부청사까지 되짚어가며 찾아본 그 흔적은 많은 메시지와 숙제를 남겼다. 목숨을 바쳐 독립운동을 감행했던 순국선열들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무엇보다 그들의 헌신과 발자취를 보존해 후세에까지 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박수진 기자

sujin.park@jnilbo.com

역사기획 최신뉴스더보기

기사 목록

전남일보 PC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