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중근 순국 109주년 - 도쿄 이토 히로부미 무덤을 가다
1910년 3월26일 오전 10시4분. 간수가 종이 두 장을 접어 눈을 가렸다. 그 위에 다시 흰 천을 씌웠다. 안중근은 앞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것은 동양평화를 위한 것이었다"고 되뇌었다. 간수가 계단 7개를 올라 교수대로 이끌었다. 양반다리 자세로 앉으니, 한 명이 목에 밧줄을 감고 교수대 한쪽을 밟았다. 꽈당하는 소리를 내며 뚝 떨어졌다. 11분-. 10시15분, 그는 독립의 혼이 되었다.

도쿄 시나가와 나시오니 히토히로부미 무덤으로 도리이와 수많은 석등이 있다.
●도쿄 한복판에 들어선 이토 묘소
안 의사가 순국한 지 109주년. 그날처럼 먹장구름이 무거웠다. 도쿄 시나가와(品川)구 니시오이(西大井) 이토 히로부미 무덤을 찾아 나섰다. 전철 니시오이 역에서 멀지 않았다. 철길을 지나 자동차 한 대가 지날법한 골목길을 따라 들어갔다. 별다른 안내 이정표도 없었다. 5~6분 걸으니 니시오이 6정목(丁目). 오른편에 자그마한 공원 같은 게 보인다.
이토의 무덤이다. 육중한 철문 옆에 비석이 서 있다. '大勳位從一位公爵伊藤博文公墓所'(대훈위종일위공작이등박문공묘소), 대훈위 종일위는 이토가 받은 가장 높은 벼슬이 종일위(조선시대 종1품과 유사), 작위는 공작이란 뜻이다.
정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평소에도 열리지 않는단다. 사망일인 10월26일 하루 개방한다고 한다. 높은 울타리에 철조망도 보인다. 철문 너머에 이토 흉상이 서 있다. 바로 옆에 안내판에 '조선의 독립운동가에게 저격당해 69세로 숨졌다'고 씌어 있다고 한다. 스시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안중근을 범죄자나 테러리스트로 규정했지만, 묘지에는 단순 범죄자로 표기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폭한(暴韓)으로 묘사했다.
노성태 국제고 수석교사(역사)는 "일본의 아베 정권은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로 보지만, 대체로 독립운동가로 보는 듯하며, 일본 내에서 안중근을 평생토록 기리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일본 우경화의 상징, 야스쿠니 신사 옆 유슈칸(전쟁기념관) 안에 '한국병합' 전시물이 있다. 한국 초대통감 이등박문 얼굴 사진과 조선총독부 건물 사진을 배치하고, '명치 42(1909) 동청철도가 지나는 하얼빈 역두에서 이등박문 통감이 한국의 독립운동가 안중근에게 암살당했다'고 썼다.
국립 도서관이 만든 '근대인물사전-이등박문'에도 '하얼빈 역두에서 한국 독립운동가 안중근에게 암살'이라고 돼있다.
이토 묘지의 안내판과 흉상 주변에는 수많은 석등과 아름드리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당초 묘지 면적은 5000㎡였으나, 도시 개발로 축소됐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일본에서 이만한 개인 무덤은 없다고 평한다. 이토 무덤은 높이 3m쯤 돼보이는 청록색 도리이(두개의 기둥에 가로지른 봉을 올린 문)를 지나 6단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 봉문 주변은 석책이 둘러싸고 있다. 특이하게 4단으로 둘레 석을 친 뒤 둥그런 부분은 잔디가 아닌 시멘트로 마감했다. 봉분 석책을 벗어나 오른편에 작은 신전이 세워져 있다. 이토는 신이 되었는가. 신전 크기가 집안에 두는 자그마한 것이라서 신은 아닌듯 싶다.
이토가 죽은 지 25년 되던 해 추밀원 고문관 가네코, 모치스키 등 우익 거물들은 이토 묘지를 사적공원화해 경내에 기념관, 기념비를 세우고 유품을 전시하려했다. 일제가 만주를 점령하고 욱일승천하던 1934년 무렵이었다. 그 후 중일 전쟁이 터지면서 유야무야됐다. 도쿄도 사나가와 구는 이토 묘지를 구 지정 사적 19호와 시나가와 구 100경(景)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일본인들의 이토에 대한 평판은 다소 엇갈린다.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1000엔 지폐의 주인공(1963-1984)에 근대일본의 설계자, 초대총리를 포함 4번이나 총리를 지낸 정치인으로 본다. 일본 최초로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반면에 나카카와 세이잔이 펴낸 사진 집 '일본의 묘'에는 이토를 '영웅호색이라고 하는 말처럼 여자관계에 대한 에피소드가 많고, 추잡한 이야기도 많이 전한다. 처세술의 천재였다'고 표현했다.
이토는 안 의사가 쏜 분노의 탄환 3방을 맞고 1909년 10월26일 오전 10시 절명했다. 일본에서 보면 올해는 이토 사망 110주년, 야스쿠니 신사 창립 150주년으로 '우익 절기'나 다름없다.

이토 무덤 입구 왼쪽에 무덤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다시 묻는 이토의 죄상들
안중근은 거사 후 이토를 격살한 15가지 죄를 들었다. 안 의사가 밝힌 죄상 외에도 이토의 해악은 차고도 넘친다. 그가 한반도에 끼친 암행은 제5대 총리대신(1892.8.8~1896.8.31)과 초대 통감(1906.3.3~1909.6.14)시절에 집약돼 있다. 5대 총리 시절, 1894년 청일전쟁을 진두지휘했다. 청일간 전쟁터는 한반도였고, 그 와중에 동학농민들이 무참하게 학살됐다.
송운혁 역사 팟캐스트 운영자(서석고 교사)는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하여 청과 일본이 들어오자 정부와 농민군은 서둘러 전주화약을 체결하여 해산하였다. 하지만 일본이 물러나지 않고 청과 전쟁을 일으키자 농민군은 다시 봉기하였다. 이 과정에서 최후항쟁지인 석대들에서만 200여명이 죽어나갔다"고 말했다.
한말 의병, 청일전쟁, 동학 학살의 주범이 바로 이토였다. 그가 임명한 미우라 고로 주한일본공사는 1895년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시해했다. 또 얼마나 많은 을미의병을 총칼로 도륙했는가. 오죽했으면, 을씨년(을미년)스럽단 말이 나왔을까.
1904년 러일전쟁 때에는 직접 고종을 만나 지원을 강요하기도 했다.
이토의 조선 사냥은 러일전쟁 승리 후 본격화했다. 1905년 10월27일 을사늑약을 손수 체결하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이어 11월에는 통감부를 설치,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통감이 지휘, 감리한다'고 윽박질렀다.
1906년 3월3일 초대 통감 자리에 올랐다. 1907년 6월25일 고종 황제의 헤이그특사 파견을 빌미로 7월20일 고종을 물러나게 했다. 바로 나흘 후 7월24일에 정미7조약(한일신협약)을 강요, 통감의 내정 관여를 공식화했다. 일주일 뒤 8월1일 대한제국의 군사마저 해산시켜 경찰, 사법, 행정, 군사권을 한손에 장악했다.
그가 통감 재직 중이던 1908년 12월 18일, 일제 수탈 기구인 동양척식회사를 설립, 조선 민중의 고혈을 빨아갔다. 이토가 조선 침탈 프로젝트를 사실상 마무리하자, 1909년 7월6일 일본은 대한제국 병합을 최종 결정했다. 이토는 조선 침략의 기획.실행자였고, 조선민중의 흉한이었다.

야스쿠니 신사 옆 유슈칸 한국병합 코너에 안중근을 독립운동가로 표현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무덤에만 누워 있지 않았다. 묘지를 나오니 살아 있는 이토를 확인했다. 이등보육원, 이등아동원이 버젓이 운영 중이다. 침략, 동양을 피로 물들인 이토의 성을 딴 아동시설이라니….
도쿄 이토 무덤에서 중국 뤼순감옥 사형장을 떠올린다. 처연한 명주 두루마기를 입은 안중근 영정이 눈에 선하다. 대한국 독립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혼백은 어디에 있나. 유해조차 없으니, 장흥 해동사에서 향이라도 올릴거나.

중국 뤼순감옥 안중근 사형장.

어머니가 보내준 명주 두루마기를 입고 조선 독립의 혼으로 떠난 안중근 최후 모습.
도쿄 글·사진=이건상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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