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선생 가족들 배추 주워 시래깃국 연명했던…
'대한 임시정부 발자취 따라’ ① 상해 임시정부||新天地 도심 속 초라한 청사 ||임정 기틀…독립운동 구심점 ||중 혁명지사들고도 교류 활발 ||윤봉길 기념관은 매화 향 가득 ||오는 11일은 탄생기념일
입력 : 2019. 03. 31(일) 20:05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전경.
4월11일은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100년 전 1919년 중국 상하이가 임정의 첫 출발지다. 이후 임시정부는 일제의 박해가 심해지자 항저우, 자싱, 전장, 난징, 창사, 광저우 등 중국 각지를 전전해야 했다.
임정 수립 100주년을 맞아 그 '고난의 여정'을 따라가봤다. 광복회 광주·전남지부와 함께한 5박6일간의 여정이다.
첫발걸음의 시작은 중국 상하이 '신천지(新天地) 거리'다. 현재는 상하이의 대표적인 패션의 거리이지만, 거리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가 있는 곳이다. 중국 상하이 노만구 마당로 306농 4호. 신천지 도심 속 뒷골목의 낡고 허름한 가정집 바로 옆 3층 건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유적지'라는 푯말이 일행을 맞이했다. 1층 입구로 들어가면 백범 김구 선생의 흉상이 있다. 당시 집무실 모습이 밀랍인형으로 재현됐고, 침실과 부엌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1919년 3월 한민족의 독립이 선포되자 국내외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로 모여들었고, 1919년 4월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했다. '마당로 청사'는 임시정부 요인들이 마지막으로 사용했던 상하이 청사다. 현재 남아 있는 유일한 청사의 흔적이기도 하다. 1926년부터 윤봉길 의사 의거 직후인 1932년 4월 말까지 사용했다.
임시정부청사에서 신천지 카페거리를 향해 5분 정도 걷다보면 '영경방'이 나온다. 김구 선생이 가족들과 함께 거주했던 곳이다. 영경방 거리는 상하이에서도 제일 가난했던 사람들이 살았던 동네였다. 김구 선생의 가족들은 채소 쓰레기 더미에서 배추 껍질을 주워 시래깃국을 끓여 연명했다. 애국지사들은 이처럼 처절하고 어렵게 버텨, 독립을 이뤄낸 것이다.
함께 한 조선대 역사학과 노아현(20·여)씨는 "임시정부청사가 낡은 주거지 주변에 조그만하게 세워졌다는 것을 직접 보면서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어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상하이 임시정부청사에서 '남창로 100'농 표지판을 따라가며 골목 안쪽을 거닐다보면, 예관 신규식 선생이 머무렀던 집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독립운동에 앞장섰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투사 중 한명인 신규식 선생은 임시정부가 설립되기 8년 전인 1911년 상하이에 망명했다. 신규식 선생의 집 바로 옆집은 계몽 잡지인 '신청년'을 펴낸 중국의 혁명가 천두슈가 머무렀던 집도 그대로 남아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다양한 독립운동을 추진했다. 그 가운데 1926년 12월 국무령에 취임한 김구 선생이 조직한 한인애국단이 대표적이다. 애국단의 대표적 활동은 윤봉길 의사의 거사로 꼽힌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은 중국 상하이 홍커우 공원 (현 루쉰공원)에서 투탄의거를 결행했다. 일왕의 생일과 승전을 축하하는 행사에 참여한 일제 군부에게 폭탄을 투척해 7명을 처단했다.
윤봉길 의사 의거 현장은 상하이 시민들의 삶 가까이에 자리하고 있었다. 홍커우 공원에는 산책을 하는 노인들로 붐볐다. 물을 적셔 바닥에 붓글씨를 쓰는 중국 노인이 한글을 배워 "매헌 윤봉길 의사"라고 쓴 글씨도 눈에 띄었다.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는 윤 의사의 호인 매헌(梅軒)을 기려 곳곳에 심은 매화나무들이 분홍빛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윽한 매화꽃 향기가 주변을 감싸안았다. 곧은 절개를 지녔던 윤봉길 의사처럼, 엄동설한 꽃을 피워낸 매화를 보고 있자니 깊은 감동이 밀려왔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임예환 선생 증손자인 임종선씨는 "지난 1989년 상하이 정부의 도시개발계획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해졌던 상하이임시정부 청사는 한국과 중국 정부가 함께 노력해 1993년 복원했다"고 했다. 그는 "우리 국민의 관심이 멀어질수록 중국 내에 있는 우리 독립운동 현장 보전에 어려움이 있는만큼, 끊임없는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매년 4월13일 열리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탄생 기념일'도 올해부터 4월11일로 바뀐다. 100년이 되어서야 올바른 날짜에 기념식이 열리는 셈이다. 올바른 역사 바로 세우는 작업을 끊임없이 지속해야 하는 이유인 셈이다.
박수진 기자
임정 수립 100주년을 맞아 그 '고난의 여정'을 따라가봤다. 광복회 광주·전남지부와 함께한 5박6일간의 여정이다.
첫발걸음의 시작은 중국 상하이 '신천지(新天地) 거리'다. 현재는 상하이의 대표적인 패션의 거리이지만, 거리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가 있는 곳이다. 중국 상하이 노만구 마당로 306농 4호. 신천지 도심 속 뒷골목의 낡고 허름한 가정집 바로 옆 3층 건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유적지'라는 푯말이 일행을 맞이했다. 1층 입구로 들어가면 백범 김구 선생의 흉상이 있다. 당시 집무실 모습이 밀랍인형으로 재현됐고, 침실과 부엌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1919년 3월 한민족의 독립이 선포되자 국내외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로 모여들었고, 1919년 4월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했다. '마당로 청사'는 임시정부 요인들이 마지막으로 사용했던 상하이 청사다. 현재 남아 있는 유일한 청사의 흔적이기도 하다. 1926년부터 윤봉길 의사 의거 직후인 1932년 4월 말까지 사용했다.
임시정부청사에서 신천지 카페거리를 향해 5분 정도 걷다보면 '영경방'이 나온다. 김구 선생이 가족들과 함께 거주했던 곳이다. 영경방 거리는 상하이에서도 제일 가난했던 사람들이 살았던 동네였다. 김구 선생의 가족들은 채소 쓰레기 더미에서 배추 껍질을 주워 시래깃국을 끓여 연명했다. 애국지사들은 이처럼 처절하고 어렵게 버텨, 독립을 이뤄낸 것이다.
함께 한 조선대 역사학과 노아현(20·여)씨는 "임시정부청사가 낡은 주거지 주변에 조그만하게 세워졌다는 것을 직접 보면서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어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상하이 임시정부청사에서 '남창로 100'농 표지판을 따라가며 골목 안쪽을 거닐다보면, 예관 신규식 선생이 머무렀던 집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독립운동에 앞장섰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투사 중 한명인 신규식 선생은 임시정부가 설립되기 8년 전인 1911년 상하이에 망명했다. 신규식 선생의 집 바로 옆집은 계몽 잡지인 '신청년'을 펴낸 중국의 혁명가 천두슈가 머무렀던 집도 그대로 남아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다양한 독립운동을 추진했다. 그 가운데 1926년 12월 국무령에 취임한 김구 선생이 조직한 한인애국단이 대표적이다. 애국단의 대표적 활동은 윤봉길 의사의 거사로 꼽힌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은 중국 상하이 홍커우 공원 (현 루쉰공원)에서 투탄의거를 결행했다. 일왕의 생일과 승전을 축하하는 행사에 참여한 일제 군부에게 폭탄을 투척해 7명을 처단했다.
윤봉길 의사 의거 현장은 상하이 시민들의 삶 가까이에 자리하고 있었다. 홍커우 공원에는 산책을 하는 노인들로 붐볐다. 물을 적셔 바닥에 붓글씨를 쓰는 중국 노인이 한글을 배워 "매헌 윤봉길 의사"라고 쓴 글씨도 눈에 띄었다.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는 윤 의사의 호인 매헌(梅軒)을 기려 곳곳에 심은 매화나무들이 분홍빛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윽한 매화꽃 향기가 주변을 감싸안았다. 곧은 절개를 지녔던 윤봉길 의사처럼, 엄동설한 꽃을 피워낸 매화를 보고 있자니 깊은 감동이 밀려왔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임예환 선생 증손자인 임종선씨는 "지난 1989년 상하이 정부의 도시개발계획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해졌던 상하이임시정부 청사는 한국과 중국 정부가 함께 노력해 1993년 복원했다"고 했다. 그는 "우리 국민의 관심이 멀어질수록 중국 내에 있는 우리 독립운동 현장 보전에 어려움이 있는만큼, 끊임없는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매년 4월13일 열리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탄생 기념일'도 올해부터 4월11일로 바뀐다. 100년이 되어서야 올바른 날짜에 기념식이 열리는 셈이다. 올바른 역사 바로 세우는 작업을 끊임없이 지속해야 하는 이유인 셈이다.

sujin.park@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