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과 고려인>우크라 전쟁 전조, 8년 동안 지속된 ‘돈바스 분쟁’
<35>돈바스 분쟁(2014~2022)
우크라 “국가 간 분쟁” 러시아 “국가 내 갈등” 주장
돈바스 주민들 자치·언어권 보장 등 요구… 우크라 복종 거부
도네츠크와 루간스크 지역 대규모 시위 시작… 민병대 창설
입력 : 2024. 04. 11(목) 14:57
2022년 9월 13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하르키우주 이지움에서 한 우크라이나 병사가 전차에 올라 승리의 V를 그리고 있다. 우크라이나군은 지난 4월 러시아군이 점령해 돈바스 공세를 위한 군수 보급 중심지로 활용하던 이지움을 탈환했다. 이지움=AP/뉴시스
2014년 4월 14일 우크라이나 돈바스에서 분쟁이 시작되었다. 이는 2022년 2월 24일 우크라이나 전쟁의 전조로 거의 8년 동안 지속 되었다. 돈바스는 우크라이나 동부의 루간스크와 도네츠크 지역 일대를 가리킨다. 돈바스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는 2014~2015년에 벌어졌고, 이후 분쟁은 심한 단계에서 진지전으로 옮겨갔다. 그동안 도네츠크와 루간스크 지역에서는 군인과 민간인, 성인과 어린이 등 많은 사람이 죽었다. 타스통신에 의하면, 이 기간에 14,000명 이상이 사망하고 많은 사람이 난민과 국내 실향민이 되었다고 했다. 또한 우크라이나는 돈바스에 대한 완전한 경제적 봉쇄를 가했다.

돈바스 분쟁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공식적인 관점은 그것이 내전이 아니라 국가 간 분쟁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러시아는 갈등을 순전히 국가 내 갈등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우크라이나와 도네츠크 및 루간스크 당국 간의 직접 협상에서 탈출구를 찾았다. 즉, 우크라이나가 도네츠크 및 루간스크에 특별한 지위(자치)를 부여하고 러시아와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1990년대 이후로 도네츠크 및 루간스크 지역 주민들 대다수는 연방화를 요구하였다. 우크라이나 연방 구조 문제에 관한 첫 번째 지역 국민투표는 1994년 3월 돈바스에서 열렸다.

돈바스는 도네츠크 석탄 분지의 약어이며, 그 이름은 세베르스키 도네츠크 강에서 유래하였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이곳에는 고대 러시아, 심지어 러시아 이전 시대에도 알려진 스키타이족과 페체네그족을 포함한 다양한 부족들의 중심지였다. 1654년에 돈바스 일부는 이미 러시아가 장악하고 있었다. 1768~1774년 러시아-터키 전쟁의 결과로 크림 칸국과 아조프 지역은 러시아 제국에 포함되었다. 1795년 예카테리나 2세는 석탄 채굴과 러시아 남부 최초의 야금 공장 건설을 허용하는 법령에 서명하면서 돈바스가 대규모 산업 중심지가 되었다. 19세기에는 석탄 채굴이 급속도로 성장했고, 탄광은 계속해서 경제의 기반을 형성하였다. 1918년 3월 이곳은 새로 창설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에 포함되었다. 결국 1922년 12월 30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새로운 국가인 소련 일부가 되었다. 1991년 돈바스 주민들의 대부분은 독립 우크라이나의 창설을 지지했다.

돈바스 지역의 인구는 2022년 3월 1일 기준 약 359만5000명이었다. 1930년대 소련은 중공업 육성으로 많은 러시아인이 이주하였다. 돈바스 지역 전체로는 우크라이나인이 다수였으나, 러시아어권으로 바뀌었다.

그러면 우크라이나의 사회 정치적 분열의 주된 이유는 무엇인가?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기 전 8년 동안 돈바스에서는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리고 이것이 현재 우크라이나 전쟁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첫째, 2004년 대통령 선거에 오렌지 혁명의 주역인 빅토르 유셴코가 승리하면서 러시아어를 공용어에서 배제했다. 그가 집권하면서 분열의 근본적인 문제 중 하나는 러시아어의 지위 문제였다. 우크라이나 현대사를 통틀어 러시아어 사용 문제는 정치인들이 유권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도구였다. 돈바스는 주로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지역이다. 2010년 친러 성향의 빅토르 야누코비치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2012년 8월 국어인 우크라이나어와 동등하게 지역 언어(러시아어는 국가 동부 전체에서 이 지위를 가짐)의 사용을 허용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2014년 2월 23일 정권 교체 직후 우크라이나 의회는 러시아어 지위에 관한 법률을 폐지하기로 투표했다. 이 소식은 우크라이나 남부와 동부의 모든 지역에 큰 불안을 불러일으켰다. 지역 주민들은 이 법의 폐지를 언어권 침해로 인식했다.

2014년 이후, 대부분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우크라이나 남동부 지역의 인구는 새로운 우크라이나 당국에 복종하기를 거부했다. 소련 붕괴 후 민족주의 세력이 강요한 우크라이나화를 강제하려는 시도는 객관적으로 국가의 분열로 이어졌다.

둘째, 2013년 11월에 시작된 유로마이단으로 인해 서부 지역과 동부 지역 간의 이해 충돌이 있게 되었다. 유럽연합과의 무역 협정을 무기한 연기하고 친러 정책을 밀어붙이자 이에 시민들이 반발하여 대규모 반정부 시위인 유로마이단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빅토르 야누코비치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축출되고, 2014년 2월 친서방과 민족주의 세력이 집권하면서 이러한 분열은 더욱 악화되었다. 돈바스 도네츠크 중앙 광장에서 유로마이단 지지자들과 반대자들 사이의 충돌이 일어났다. 돈바스에서는 키이우의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로 인해 국가가 분열하게 되었다. 우크라이나 남동부 지역의 많은 주민은 유로마이단 이후 집권한 국가의 새로운 지도자들을 불법으로 여겼다. 2014년 4월 초 도네츠크와 루간스크 지역에서 설문 조사를 실시한 응답자 중 약 절반이 대통령 권한대행과 새 정부의 불법성을 확신했다. 유로마이단 시위를 서방이 후원하는 무장 쿠데타로 간주했다.

돈바스에서는 러시아의 지원으로 도네츠크와 루간스크 인민공화국이 형성되었다. 자칭 공화국과 우크라이나 당국 사이의 타협은 초기 단계에서 가능했지만, 미국의 영향과 민족주의자들의 압력으로 인해 새로운 우크라이나 정부는 군사적 해결책을 선호했다. 크림반도의 러시아 합병과 돈바스 전투는 우크라이나에서 반러시아 정서를 고조시켰고, 이로 인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단일한 시민 국가의 형성을 위한 이유를 찾았다.

셋째, 우크라이나 서부와 동부 지역 주민들 견해의 또 다른 점은 친 유럽 활동가들의 러시아 혐오였다. 마이단 기간 동안 심한 러시아 혐오의 공개적인 표현이 많았다. 그들은 우익 급진 운동가들에 의해 배포되었다. 도네츠크와 루간스크 지역 주민들은 러시아 혐오의 증가를 자신들의 존재에 대한 위협으로 여겼다. 돈바스 주민들이 두려워했던 것은 우크라이나화 추세와 함께 러시아 혐오가 그들의 문화적 기반을 박탈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네오나치 주변 집단의 합법화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 예를 들어, 2010년에 빅토르 유셴코는 러시아에서 금지된 극단주의 조직의 지도자이자 우크라이나 극우 민족주의자 스테판 반데라에게 학살자가 아닌 우크라이나 영웅이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중에 우크라이나와 폴란드 간에 있었던 볼린 대학살의 주범이었다. 도네츠크 지방 법원은 이 결정에 대해 처음으로 항소했다. 그 후 유셴코를 대신해 대통령이 된 빅토르 야누코비치는 2011년 영웅 부여 결정을 취소했다. 유로마이단 이후 다수의 극우 단체와 정당이 공개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2014년부터 스테판 반데라의 생일을 맞아 리비우와 키이우에서 네오나치 행진이 열렸다. 그리고 2021년 4월 28일, 서부 우크라이나에서 창설된 파시스트 조직인 SS 사단 갈리시아 창설을 기념하여 키이우에서 행진이 열렸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이들 조직이나 인물이 국가 영웅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러시아에서는 이러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급진적인 운동이 금지되었다.

넷째, 우크라이나 사회 분열의 또 다른 측면은 정교회 분열이었다. 그동안 우크라이나 정교회는 러시아 정교회와 정식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모스크바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키이우 총대주교청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창설을 발표했다. 키이우 총대주교청 탈퇴 문제는 정치적으로 변했다.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우크라이나 정교회는 돈바스 전쟁에서 러시아와 협력했다는 비난을 받았으며, 우크라이나 정부는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강압으로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우크라이나 정교회를 점령했다.

2018년 4월 우크라이나 대통령 페트로 포로셴코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바르톨로메오 총대주교에게 키이우 총대주교청 우크라이나 정교회 대주교의 서명을 받아 우크라이나 정교회에 자치권을 부여해 달라는 호소문을 보냈다. 2018년 12월에 통합 우크라이나 정교회가 발족되었다. 2019년 1월 5일 터키 이스탄불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총대주교로부터 교회 독립(자치권)에 관한 토모스(교회령)를 수여받았다.

한편, 우크라이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국가 분리를 만들어 놓고 제대로 조정하지 못했다. 돈바스 주민들은 도네츠크와 루간스크의 지위에 대한 국민투표 요구, 자치, 언어권 보장, 일부 반군들 사이에서 극우 준군사 세력의 해체 등을 요구했다. 돈바스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분쟁 초기 우크라이나 당국은 대테러 작전을 발표했으며 우크라이나 군대가 돈바스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도네츠크와 루간스크 인민공화국은 중무기를 포함하여 우크라이나 보안군으로부터 강력한 포격을 받았다고 러시아에 보고했다. 도네츠크와 루간스크 지역에서 대규모 시위가 시작되었고 민병대가 창설되었다. 우크라이나 군대와 민족주의 조직, 민병대 간의 충돌은 중장갑 차량과 항공기를 이용한 본격적인 적대 행위로 확대되었다.

우크라이나 당국은 반군과 협상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협상에 참여하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진부한 문화 문제에 있어서도 가장 합법적이고 합리적인 어떠한 양보도 할 수 없었다. 8년 동안 우크라이나는 도네츠크와 루간스크에 자치권을 부여하지 않기 위해 싸웠다.

러시아 당국은 돈바스가 우크라이나 내에서 특별한 지위를 부여받아야 한다고 반복해서 밝혔다. 동시에 러시아는 정기적으로 도네츠크와 루간스크 인민공화국에 인도적 지원을 제공했다. 또한 2019년부터 공화국 거주자의 러시아 시민권 취득 절차가 단순화되었다.

2021년 가을 돈바스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우크라이나의 요청에 따라 서방 국가들은 치명적인 무기 공급을 포함하여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을 늘리기 시작했다. 2022년 2월 17일 도네츠크와 루간스크에서 우크라이나 군대의 가장 엄청난 포격이 있었다. 도네츠크와 루간스크 주민들이 러시아 영토로 대피하기 시작했으며 러시아는 난민에게 임시 보호소와 지원을 보장했다. 도네츠크와 루간스크 인민공화국에서는 동원령이 발표되었다.

2022년 2월 21일 푸틴 대통령은 도네츠크와 루간스크 인민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한다고 말했다. 그는 돈바스의 상황이 매우 심각해 졌다고 언급했다. 2023년 2월 22일 푸틴 대통령은 연방의회 연설에서 “돈바스 러시아인은 자신의 땅에서 살 권리가 있으며, 모국어로 말하고, 봉쇄와 지속적인 포격, 키예프 정권의 노골적인 증오 속에서 싸웠고 포기하지 않았던 곳이다. 당신들은 국민투표에서 당신의 미래를 결정하고 네오나치의 위협과 테러에도 불구하고 군사작전이 매우 가까이에서 진행되는 상황에서 러시아, 고국과 함께하겠다는 확고한 선택을 내렸다. 돈바스 해방, 이 사람들의 보호, 그리고 러시아 연방의 안보가 우크라이나 특별군사작전의 궁극적인 목표이다”라고 했다. 2월 24일 푸틴 대통령은 돈바스의 도움 요청에 따라 우크라이나에서 특별군사작전을 개시한다고 발표했다. 전면적인 우크라이나 전쟁은 돈바스 분쟁의 연장 선상에서 시작된 것이다.
< 전남대 글로벌디아스포라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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