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창·노영필>그럴싸한 감투에 가려진 진실 게임
노영필 교육평론가
입력 : 2025. 05. 11(일) 16:42

노영필 교육평론가
살면서 그럴싸해 보이는 순간들이 많다. 익숙한 형식을 갖춘 결론을 만나면 진리처럼 느껴진다. 특히 상대방의 주장을 쉽게 검증할 수 없을 때, 그럴싸한 화술을 접하면 의심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반면, 살면서 어처구니없는 상황도 자주 마주친다. 그럴싸해 보일수록 오히려 의심스러운 경우다. 과도한 포장은 신뢰도를 떨어뜨리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이를 믿는다. 검증할 수 없거나 항의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어처구니없는 일로 받아들이게 된다.
지금 대한민국은 그럴싸함과 어처구니없음이 뒤섞여 혼란스러운 상태다. 식민지 시대 반민족적 행위로 역사의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친일 세력의 잔재 청산은 유야무야되었다. 독재 세력의 반칙과 특권을 누린 기생 문화도 바로잡히지 않고 정상 질서로 둔갑했다.
공부를 잘해 판검사나 고위공직자가 되면 그럴싸한 성과로 칭찬받는다. 하지만 암기식 문화가 만든 권위주의적 공부 문화조차 그럴싸한 성과주의로 포장된다. 그 문화는 지금도 학교 교육을 지키는 골격이 되고 있다.
현실은 더 무섭다. 어처구니없음과 그럴싸함이 뒤섞여 공동체 논리로 포장되어 포용력을 강요한다. 잘못을 지적하면 오히려 내가 죽는다. 아니, 잘나가는 사람을 죽여야 내가 산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면서 말도 안 되는 어처구니 논리가 그럴싸한 합리성으로 자리 잡았다. 억지가 사회의 주류로 등극하고, 불공정이 공정한 질서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이다. 부조리와 위선을 혹독하게 바로 세우지 못한 결과가 만든 참사 아닌가. 그것도 내란공범들이라고 손가락질하는데, 합의제 선거에 의해 만들어진 대선후보를 갈아치운 사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상식과 질서를 뛰어넘는 무질서의 극치라는 말조차 부끄럽다. 한 번의 거짓말이 그 거짓말을 막기 위해 또 다른 거짓말을 만든다. 그 거짓말은 거짓말의 순환고리로 돌아다니며, 결국 거짓말 공화국을 만들었다.
옛날에는 관직에 있으면 모자를 썼다. 그 모자를 관모(冠帽)라고 했다. 그것을 빗대어 ‘감투썼다’고 말했다. 최근 우리 사회는 어처구니없는 감투 문화가 위세를 떨치고 있다. 멸사봉공이어야 할 나랏일은 중요하지 않다. 더 나은 감투를 쓰기 위해 권한대행의 꼬리표를 떼고 대통령 감투를 쓰기 위해 나서기까지 한 것이다.
최근 한덕수 전 국무총리는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 직무에 복귀한 뒤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서울 종로구 돈의동 쪽방촌을 방문해 ‘약자와의 동행’을 강조했지만, 주민들은 “한덕수, 우리 얘기 안 들어…사진만 찍고 가더라”며 실망감을 표현했다.
첫 공개 일정으로 쪽방촌을 고른 이유에 그는 “사회적 통합을 하려면 중요한 건 약자와의 동행이라는 기본자세”라고 말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정치인들이 표가 필요할 때만 찾아온다고 지적했다. 위생, 지원 체계의 한계, 정신 건강 문제 등 다양한 의견이 나왔지만, 한 전 총리는 현장을 자세히 살피거나 주민과 깊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이러한 행보는 권력자들이 감투에 집착하며 권력을 오용하는 현실을 보여준다. 특히 내란공범 혐의를 받는 국무총리가 대통령 후보로 나서는 상황은 국민의 주권을 무시하는 행위로 비춰진다.
반면, 스웨덴에는 타게 에를란데르(Tage Erlander)라는 정치인이 있었다. 그는 무려 23년간 총리직을 수행하며 현대 서구 민주주의 역사상 최장수 총리로 기록됐다. 하지만 그의 삶은 감투에 집착한 권력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에를란데르는 재임 중에도 퇴임 후에도 소박한 생활을 유지하며 국민을 섬기는 자세로 존경받았다. 그의 소탈한 거주지, 경호원 없는 퇴임 후 생활, 가족과의 평범한 일상은 평범함 속의 비범함으로 남았다. 권력을 개인의 명예나 부로 여기지 않고 철저히 위임된 책무로 삼았기에, 그의 이름은 오늘날에도 빛난다.
결국, 거짓말이 또 다른 거짓말을 낳는 순환 구조가 국민을 혼란스럽게 하고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그럴싸함과 어처구니없음이 뒤섞인 사회에서 국민은 진실을 분별하기 어려워지고, 이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문제로 이어진다.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럴싸한 말과 형식에 속지 않고, 본질을 꿰뚫는 비판적 사고가 필요하다. 진정한 민주주의와 국민 주권의 실현을 위해서는 권력자들이 감투에 집착하지 않고, 국민을 섬기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래야 국민 모두가, 특히 학생들이, 교실 안 교과서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민주주의의 참된 가치를 배울 수 있다. TV와 언론, 사회 곳곳은 이제 진짜 교과서가 되어야 한다.
반면, 살면서 어처구니없는 상황도 자주 마주친다. 그럴싸해 보일수록 오히려 의심스러운 경우다. 과도한 포장은 신뢰도를 떨어뜨리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이를 믿는다. 검증할 수 없거나 항의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어처구니없는 일로 받아들이게 된다.
지금 대한민국은 그럴싸함과 어처구니없음이 뒤섞여 혼란스러운 상태다. 식민지 시대 반민족적 행위로 역사의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친일 세력의 잔재 청산은 유야무야되었다. 독재 세력의 반칙과 특권을 누린 기생 문화도 바로잡히지 않고 정상 질서로 둔갑했다.
공부를 잘해 판검사나 고위공직자가 되면 그럴싸한 성과로 칭찬받는다. 하지만 암기식 문화가 만든 권위주의적 공부 문화조차 그럴싸한 성과주의로 포장된다. 그 문화는 지금도 학교 교육을 지키는 골격이 되고 있다.
현실은 더 무섭다. 어처구니없음과 그럴싸함이 뒤섞여 공동체 논리로 포장되어 포용력을 강요한다. 잘못을 지적하면 오히려 내가 죽는다. 아니, 잘나가는 사람을 죽여야 내가 산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면서 말도 안 되는 어처구니 논리가 그럴싸한 합리성으로 자리 잡았다. 억지가 사회의 주류로 등극하고, 불공정이 공정한 질서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이다. 부조리와 위선을 혹독하게 바로 세우지 못한 결과가 만든 참사 아닌가. 그것도 내란공범들이라고 손가락질하는데, 합의제 선거에 의해 만들어진 대선후보를 갈아치운 사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상식과 질서를 뛰어넘는 무질서의 극치라는 말조차 부끄럽다. 한 번의 거짓말이 그 거짓말을 막기 위해 또 다른 거짓말을 만든다. 그 거짓말은 거짓말의 순환고리로 돌아다니며, 결국 거짓말 공화국을 만들었다.
옛날에는 관직에 있으면 모자를 썼다. 그 모자를 관모(冠帽)라고 했다. 그것을 빗대어 ‘감투썼다’고 말했다. 최근 우리 사회는 어처구니없는 감투 문화가 위세를 떨치고 있다. 멸사봉공이어야 할 나랏일은 중요하지 않다. 더 나은 감투를 쓰기 위해 권한대행의 꼬리표를 떼고 대통령 감투를 쓰기 위해 나서기까지 한 것이다.
최근 한덕수 전 국무총리는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 직무에 복귀한 뒤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서울 종로구 돈의동 쪽방촌을 방문해 ‘약자와의 동행’을 강조했지만, 주민들은 “한덕수, 우리 얘기 안 들어…사진만 찍고 가더라”며 실망감을 표현했다.
첫 공개 일정으로 쪽방촌을 고른 이유에 그는 “사회적 통합을 하려면 중요한 건 약자와의 동행이라는 기본자세”라고 말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정치인들이 표가 필요할 때만 찾아온다고 지적했다. 위생, 지원 체계의 한계, 정신 건강 문제 등 다양한 의견이 나왔지만, 한 전 총리는 현장을 자세히 살피거나 주민과 깊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이러한 행보는 권력자들이 감투에 집착하며 권력을 오용하는 현실을 보여준다. 특히 내란공범 혐의를 받는 국무총리가 대통령 후보로 나서는 상황은 국민의 주권을 무시하는 행위로 비춰진다.
반면, 스웨덴에는 타게 에를란데르(Tage Erlander)라는 정치인이 있었다. 그는 무려 23년간 총리직을 수행하며 현대 서구 민주주의 역사상 최장수 총리로 기록됐다. 하지만 그의 삶은 감투에 집착한 권력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에를란데르는 재임 중에도 퇴임 후에도 소박한 생활을 유지하며 국민을 섬기는 자세로 존경받았다. 그의 소탈한 거주지, 경호원 없는 퇴임 후 생활, 가족과의 평범한 일상은 평범함 속의 비범함으로 남았다. 권력을 개인의 명예나 부로 여기지 않고 철저히 위임된 책무로 삼았기에, 그의 이름은 오늘날에도 빛난다.
결국, 거짓말이 또 다른 거짓말을 낳는 순환 구조가 국민을 혼란스럽게 하고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그럴싸함과 어처구니없음이 뒤섞인 사회에서 국민은 진실을 분별하기 어려워지고, 이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문제로 이어진다.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럴싸한 말과 형식에 속지 않고, 본질을 꿰뚫는 비판적 사고가 필요하다. 진정한 민주주의와 국민 주권의 실현을 위해서는 권력자들이 감투에 집착하지 않고, 국민을 섬기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래야 국민 모두가, 특히 학생들이, 교실 안 교과서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민주주의의 참된 가치를 배울 수 있다. TV와 언론, 사회 곳곳은 이제 진짜 교과서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