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삼의 마을 이야기>동백숲 따라 흐르는 ‘동학혁명’의 정신과 장태
●장흥 묵촌마을
필봉·벼루실… ‘먹(墨)이 없다’하여 ‘묵방’
하천 따라 150여그루 모여 동백숲 이뤄
바람·물살 막아주는 방풍림이자 비보림
동학혁명 이끈 ‘장태장군’ 이방언 태자리
필봉·벼루실… ‘먹(墨)이 없다’하여 ‘묵방’
하천 따라 150여그루 모여 동백숲 이뤄
바람·물살 막아주는 방풍림이자 비보림
동학혁명 이끈 ‘장태장군’ 이방언 태자리
입력 : 2025. 04. 03(목) 16:19

장흥 묵촌마을 동백숲. 파릇파릇 보리밭과 어우러져 더 아름답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이름을 알고 나면 이웃이 되고/ 색깔을 알고 나면 친구가 되고/ 모양까지 알고 나면 연인이 된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을 되뇌며 들길을 하늘거린다. 길섶에 봄까치꽃, 광대나물꽃, 별꽃, 냉이꽃, 남산제비꽃이 지천이다.
동백숲도 반긴다. 동백꽃을 자세히 본다. 꽃잎 새빨갛고, 꽃술은 샛노랗다. 이파리는 진녹색이다. 색깔의 대비가 선명하다. 왕성한 생명력이 묻어난다. ‘누구보다도 그대를 사랑한다’는 꽃말처럼 정열적이다. 대중가요 한 소절이 절로 흥얼거려진다.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이미자가 부른 ‘동백아가씨’다.
발아래에는 빨간 꽃봉오리가 뚝-뚝- 떨어져 있다. 송두리째 떨어진 모습이 애틋하다. 모름지기 꽃은 활짝 피었을 때 아름다운데, 낙화 풍경도 매혹적이다. 떨어진 꽃봉오리를 오래 본다. 한결같이 나무를 올려다보고 있다. 꽃봉오리 가운데엔 ‘총 맞은 것처럼’ 구멍이 뚫렸다. 꽃봉오리 속 노란 꽃술은 단내를 머금고 있다.
꽃봉오리 떨군 나뭇가지를 자세히 본다. 꽃봉오리 빠진 자리에 한오라기 암술이 남아있다. 떨어진 꽃봉오리는 수술이었다. 사랑하는 여인한테 차인 남자라고 할까.
떨어진 꽃봉오리가 나무를 올려다보고 있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어쩌면 낙화는, 믿었던 상대한테 버림받은 사람일 수 있겠다. 믿은 권력자한테 배신당한 민초일 수도 있겠다. 제주 4·3과 여순사건 상징물이 처연한 동백꽃인 연유도 이와 연관되지 않을까.
동백꽃이 간직한 전설도 애절하다. 옛날에 서로 사랑하며 미래를 약속한 연인이 있었다. 이들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잠시 헤어지며 여자가 남자에게 말했다. ‘돌아올 때 동백 씨앗을 가져다주면, 동백기름 짜서 치장하고 싶다’고.
여자는 그날부터 연인을 기다렸다. 한 달 두 달이 가고, 몇 년이 지나도록 남자는 무소식이었다. 그리움에 지치고 울다 지친 여자는 가슴에 빨갛게 멍이 들어 죽고 말았다.
그 사실을 모르는 남자, 얼마 뒤 돌아와 여인의 죽음을 알게 됐다. 그녀의 무덤 앞에서 통곡하며, 갖고 온 동백 씨앗을 심었다. 세월이 흘러 무덤가가 붉은 동백꽃으로 물들었다는 얘기다.
동백꽃은 세 번 핀다고 한다. 나무에서 한 번, 낙화 풍경으로 또 피었다. 땅에 떨어진 동백꽃을 모으니, 내 가슴에도 어느새 꽃이 핀다. 자세히 보고, 오래 보니 동백꽃 제대로 봤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동백꽃에 맺힌 꿀을 쪼아대는 동박새와 직박구리의 울음소리도 더욱 청아하게 들린다.
묵촌마을 동백숲에서다. 묵촌(墨村)마을은 서울 광화문에서 정남쪽에 자리한 ‘정남진’ 장흥에 있다. 행정구역은 전라남도 장흥군 용산면 접정2구에 속한다. 1747년 ‘장흥읍지’엔 ‘묵방’으로 기록돼 있다. 마을에 필봉(筆峰), 벼루실, 청소리, 따밭(종이) 등 지명이 있는데 ‘먹(墨)이 없다’고 ‘묵방’으로 불렸다고 전한다.
묵촌마을회관 앞에 우뚝 선 느티나무 노거수가 눈길을 끈다. 집집마다 오래된 동백나무도 한두 그루씩 있다. 골목에도 동백꽃이 활짝 피었다.
묵촌마을 동백숲은 그다지 넓지 않다. 나무 140~150그루가 모여 있다. 수령은 200~300년으로 추정한다. 동백숲은 마을 앞으로 흐르는 하천을 따라 이뤄졌다.
오래전 재앙을 막기 위해 심었다고 전한다. 바람과 물살을 막아주는 방풍림이고 비보림(裨補林)이다. 여름엔 마을주민들 피서지로, 농번기 땐 쉼터로 쓰인다. 파릇파릇 돋아나는 보리밭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다. 전남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돼 있다.
묵촌마을은 동학혁명을 이끈 이방언의 태자리다. 옛집의 흔적은 사라지고 없다. 그 자리에 후손(이삼모)이 새집을 지어 살고 있다. 이방언은 대나무로 만든 장태를 방어용 무기로 활용하며 신식무기로 무장한 관군에 맞섰다. 장태에 닿은 총탄은 튕겨 나갔다. 장성황룡강 전투 때였다. 이방언은 그날부터 ‘장태장군’, ‘남도장군’으로 불렸다.
전봉준이 이끈 동학혁명군이 2차 봉기 때 공주 우금치를 넘지 못하고 패했다. 동학군의 전열을 가다듬은 이방언은 장흥 석대들에서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마지막 전투를 벌였다. 농민군은 자울재를 넘어 석대들로 가고, 전투에서 밀리며 자울재를 넘어 후퇴했다. 자울재는 장흥읍과 용산면을 이어주는 고개다. 석대전투를 지휘한 이방언은 아들 성호와 함께 처형당했다.
그의 묘가 묵촌마을 뒤 인천이씨 선산에 있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한 선산엔 진달래꽃이 한창 피고 있다. 이방언의 묘비엔 ‘우리나라 민주사(民主史)는 갑오동학혁명부터 기록함이 옳다.’고 새겨져 있다.
이방언과 석대전투 이야기는 소설 ‘녹두장군’에 잘 그려져 있다. 소설가 송기숙은 ‘녹두장군’에서 농민군의 최하위 단위를 두레로 설정하고, 장흥사람들 생활을 통해 묘사했다. 소설을 쓴 송기숙이 나고 자란 마을은 묵촌마을에서 가까운 용산면 포곡마을이다.
이방언이 나기 전 묵촌마을에선 문필가가 많이 나왔다. 유학자 이희석, 송진봉, 이상계 등이 꼽힌다. 지지제(止止齊) 이상계(1758~1822)는 유가 사상과 인륜 도덕을 표현한 ‘인일가(人日歌)’, 자연을 벗 삼아 즐겁게 사는 마음을 노래한 ‘초당곡(草堂曲)’ 등 많은 가사문학 작품을 남겼다.
이돈삼/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
동백숲도 반긴다. 동백꽃을 자세히 본다. 꽃잎 새빨갛고, 꽃술은 샛노랗다. 이파리는 진녹색이다. 색깔의 대비가 선명하다. 왕성한 생명력이 묻어난다. ‘누구보다도 그대를 사랑한다’는 꽃말처럼 정열적이다. 대중가요 한 소절이 절로 흥얼거려진다.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이미자가 부른 ‘동백아가씨’다.
발아래에는 빨간 꽃봉오리가 뚝-뚝- 떨어져 있다. 송두리째 떨어진 모습이 애틋하다. 모름지기 꽃은 활짝 피었을 때 아름다운데, 낙화 풍경도 매혹적이다. 떨어진 꽃봉오리를 오래 본다. 한결같이 나무를 올려다보고 있다. 꽃봉오리 가운데엔 ‘총 맞은 것처럼’ 구멍이 뚫렸다. 꽃봉오리 속 노란 꽃술은 단내를 머금고 있다.
꽃봉오리 떨군 나뭇가지를 자세히 본다. 꽃봉오리 빠진 자리에 한오라기 암술이 남아있다. 떨어진 꽃봉오리는 수술이었다. 사랑하는 여인한테 차인 남자라고 할까.
떨어진 꽃봉오리가 나무를 올려다보고 있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어쩌면 낙화는, 믿었던 상대한테 버림받은 사람일 수 있겠다. 믿은 권력자한테 배신당한 민초일 수도 있겠다. 제주 4·3과 여순사건 상징물이 처연한 동백꽃인 연유도 이와 연관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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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촌마을의 동백꽃 낙화 풍경. 동백꽃이 땅위에도 흐드러지게 피었다. |
여자는 그날부터 연인을 기다렸다. 한 달 두 달이 가고, 몇 년이 지나도록 남자는 무소식이었다. 그리움에 지치고 울다 지친 여자는 가슴에 빨갛게 멍이 들어 죽고 말았다.
그 사실을 모르는 남자, 얼마 뒤 돌아와 여인의 죽음을 알게 됐다. 그녀의 무덤 앞에서 통곡하며, 갖고 온 동백 씨앗을 심었다. 세월이 흘러 무덤가가 붉은 동백꽃으로 물들었다는 얘기다.
동백꽃은 세 번 핀다고 한다. 나무에서 한 번, 낙화 풍경으로 또 피었다. 땅에 떨어진 동백꽃을 모으니, 내 가슴에도 어느새 꽃이 핀다. 자세히 보고, 오래 보니 동백꽃 제대로 봤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동백꽃에 맺힌 꿀을 쪼아대는 동박새와 직박구리의 울음소리도 더욱 청아하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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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노거수와 어우러진 묵촌마을 회관의 뒤태. 전형적인 농촌 그대로다. |
묵촌마을회관 앞에 우뚝 선 느티나무 노거수가 눈길을 끈다. 집집마다 오래된 동백나무도 한두 그루씩 있다. 골목에도 동백꽃이 활짝 피었다.
묵촌마을 동백숲은 그다지 넓지 않다. 나무 140~150그루가 모여 있다. 수령은 200~300년으로 추정한다. 동백숲은 마을 앞으로 흐르는 하천을 따라 이뤄졌다.
오래전 재앙을 막기 위해 심었다고 전한다. 바람과 물살을 막아주는 방풍림이고 비보림(裨補林)이다. 여름엔 마을주민들 피서지로, 농번기 땐 쉼터로 쓰인다. 파릇파릇 돋아나는 보리밭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다. 전남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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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언 장군의 생가 터. 옛집의 흔적은 사라지고 후손이 새집을 지어 살고 있다. |
전봉준이 이끈 동학혁명군이 2차 봉기 때 공주 우금치를 넘지 못하고 패했다. 동학군의 전열을 가다듬은 이방언은 장흥 석대들에서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마지막 전투를 벌였다. 농민군은 자울재를 넘어 석대들로 가고, 전투에서 밀리며 자울재를 넘어 후퇴했다. 자울재는 장흥읍과 용산면을 이어주는 고개다. 석대전투를 지휘한 이방언은 아들 성호와 함께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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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언 장군의 묘. 묵촌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인천이씨 선산에 자리하고 있다. |
이방언과 석대전투 이야기는 소설 ‘녹두장군’에 잘 그려져 있다. 소설가 송기숙은 ‘녹두장군’에서 농민군의 최하위 단위를 두레로 설정하고, 장흥사람들 생활을 통해 묘사했다. 소설을 쓴 송기숙이 나고 자란 마을은 묵촌마을에서 가까운 용산면 포곡마을이다.
이방언이 나기 전 묵촌마을에선 문필가가 많이 나왔다. 유학자 이희석, 송진봉, 이상계 등이 꼽힌다. 지지제(止止齊) 이상계(1758~1822)는 유가 사상과 인륜 도덕을 표현한 ‘인일가(人日歌)’, 자연을 벗 삼아 즐겁게 사는 마음을 노래한 ‘초당곡(草堂曲)’ 등 많은 가사문학 작품을 남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