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엄마들 사이에선 '돌밥'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단다. 돌아서면 밥 차린다는 뜻이다. 그만큼 가사 노동은 출구가 보이지 않는 터널과도 같고, 그 긴 여정은 여전히 여성의 몫인 듯하다. 그런데 미국 여성들의 상황도 한국과 다르지 않다. 재택근무와 온라인 수업이 진행되면서 미국 여성들이 가사와 육아 부담이 커졌다는 기사를 보니 동서양을 막론하고 집안 일이 여성에게 편중된 현실은 씁쓸하기만 하다.
성차별적 사회 구조를 비판하고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페미니즘은 1970년대 초 미국 등지에서 본격적으로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수년 천 동안 인류 역사가 지속되면서도 그 절반을 차지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 게 불과 50년 전의 일이라니….
미술계도 그 거대한 흐름을 타게 되었다. 미국의 미술사학자 린다 노클린(Linda Nochlin)이 1971년 아트뉴스에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존재하지 않았는가?'라는 글을 게재하면서 물꼬가 트였다. 노클린은 가부장적 사회가 여성들의 창조적 역량을 억압해왔다고 일침 했다. 이후 다양한 방식과 문법으로 페미니즘 미술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동안 견고하게 구축되어온 남성 중심적인 미술사에서 여성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기 위한 분투가 시작된 것이다.
특히 페미니즘 미술 운동에서는 여성들의 연대와 협업이 두드러진다. 공적이고 사회적인 역할을 실천하고자 여성들이 다각적인 예술형식으로 응집했다. 이러한 예술 행동주의의 행보 속에서 수잔 레이시(Suzanne Lacy)의 작업은 사회·정치적인 메시지와 강렬한 울림을 오늘날까지 여진처럼 전달한다.
수잔 레이시는 1977년의 12월 미술이론가인 레즐리 레보위츠(Leslie Labowitz)와 공동 작업으로 로스앤젤레스 시청 밖 계단에서 '애도와 분노 속에서' 퍼포먼스를 구현한다. 이 행위예술은 힐 사이드 지역 여성 연쇄 교살범에 대한 미디어의 자극적인 보도 행태와 미국 전역에서 발생하는 여성 폭력에 대한 비판 의식의 발로였다.
검은 색 옷을 입은 10명의 여성이 등장하는 퍼포먼스 분위기는 매우 결연하다. 2.15미터로 키가 크게 보이도록 '가장'한 참여 여성들은 한 명 씩 걸어 나와 폭력에 대한 재발 방지 등을 요구한다. 짧은 발언이 끝나자마다 붉은 숄이 걸쳐진다. 마치 상복과도 같은 검은 의상은 폭력에 희생당한 이들에 대한 애도를 상징하며, 붉은 숄은 사회와 체제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는 장치이다.
'애도와 분노 속에서' 퍼포먼스가 묵직한 실천 행동에 근거한다면 1984년 캘리포니아의 라 호야 해변을 배경으로 한 '속삭임, 물결, 바람'은 한 폭의 웅장한 풍경화 같다. 그리고 이 풍경화는 각계각층 여성들이 감내했던 다채로운 삶으로 채워진다.
60세 이상의 150여 명 여성들이 흰 탁자보가 씌워진 테이블 앞에 둘러앉는데 모두 흰 옷을 차려 입고 있다. 국가와 출신, 문화적 배경이 다른 여성들이 한 자리에 모여 삶과 관계, 희망, 죽음에 대한 내밀한 이야기를 나눈다. 절벽 위에는 천 명의 사람들이 사전 녹음된 여성들의 음성을 들으며 바라본다. 이후 청중들은 해변으로 걸어가 더 가까이 그녀들의 '속삭임'을 들으며 새롭게 창조된 명상의 시공간을 공유한다. 그 스펙터클한 풍광은 바다의 태양처럼 눈부시며 가슴이 시릴 정도로 아름답다.
이 작품을 위해 레이시는 지역 사회 속에 밀착해서 들어가 일 년 이상을 보냈다. 시민 참여 행위 예술들이 사회적 공감대를 얻기 위해서는 참여자들의 자발적인 에너지가 수반되어야 하며, 이 또한 기획자 혹은 작가들이 그들과의 소통 시간이 축적되어야만 함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숙성 과정을 거친 후 여성들의 결집으로 생생하게 풀어낸 '속삭임, 물결, 바람'에서 백발의 퍼포머가 털어놓은 생의 비밀들은 개인적 서사이지만 곧 우리 모두 육성으로서 가치를 지닌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당시 페미니즘 미술 구호처럼 말이다.
이처럼 '애도와 분노 속에서'와 '속삭임, 물결, 바람'은 메시지의 강도와 방식에서 차이만 있을 뿐 여성들의 권리와 주체성, 연대의식을 증폭시키는 측면에서 진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
동시대에는 이러한 페미니즘의 집단적인 활동과 거대 담론은 사라졌지만 여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열린 관점의 경향들이 두드러진다. 또한 최근 몇 년 새 미투 운동 등과 맞물려 여성에 대한 논의 또한 여느 때보다 활발한 시점이다. 가장 민감하고 예리하게 현대사회의 현상에 반응하는 비엔날레 현장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제13회 광주비엔날레에서는 데프네 아야스(Defne Ayas)와 나타샤 진발라(Natasha Ginwala) 2인의 여성 공동감독이'떠오르는 마음, 맞이하는 영혼' 주제 아래 집단 지성과 연대의 실천 방식 등을 탐구하는데 페미니즘적 접근 또한 시도된다. 페미니즘 비평의 고전 '성 정치학' 저자 케이트 밀렛(Kate Millet)이 인간 자유의 영역을 넓히는 일은 멋진 작업이라 했듯, 여성들이 사회 제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다층적인 역사와 서사들을 전개하고 발신해나가길 응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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