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고전 영화를 다시 보는 재미에 빠져있다. 코로나-19로 집에 있는 시간이 늘었기 때문이다. 이중 알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의 영화는 단연 압권이다. 꿈의 무대로 불리 우는 오스카 4관왕 주인공 봉준호 감독이 다수 인터뷰와 자서전에서 경의를 표할만 하다. 봉준호 감독은 7살 때부터 히치콕의 열성팬이었고, 여전히 그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장 행복하다며 깊은 '팬심'을 한 매체에서 드러낸 바 있다. 이처럼 히치콕은 동시대 영화계를 이끌고 있는, 한 때 '씨네키즈'였던 많은 이들에게 오마주의 대상이자 창조적 미감(美感)의 원천이 되고 있다.
알프레드 히치콕은 스릴러의 거장, 서스펜스의 대가로 유명하다. '사이코'(1960), '새'(1963), '이창'(1954), '현기증'(1958),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1959) 등 수 십 편의 영화들은 카메라 테크닉과 디테일을 비롯해 공포와 불길을 기류 삼아 전개되는 탄탄한 스토리로 정평이 나있다.
특히 '사이코'에서 여주인공 마리온(자넷 리 분)의 '샤워신'은 영화사상 명장면으로 꼽힌다. 의문의 인물이 휘두른 흉기에 살해당한 뒤 마리온 눈동자가 화면 가득 채워진다. 마치 관객들이 살인 현장의 목격자가 된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끔 말이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 클로즈업 부분은 최초의 초현실주의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1929)를 연상케 한다. 초현실주의 대가인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와 영화감독 루이스 부뉴엘(Luis Bunuel Portoles)이 제작한 14분 분량의 이 무성 영화는 무의식 경로처럼 일관성 없이 흘러간다. 초반부에 여성의 눈을 면도날로 베어내는 충격적인 장면은 초현실주의의 상징적인 이미지로 손꼽힌다. 이는 눈을 통해 인식되어지는 정형적이고 관습적인 시각의 제거와 탈피를 의미한다.
히치콕의 스타일은 초현실주의 편집광적인 양식과 맥을 함께 한다. 초현실주의가 태동하던 1920년대는 제 1차 세계대전의 여진과 주가 폭락으로 인한 경제 대공황 시대로 기록된다. 당대 예술가들에게는 서구 사회를 지탱해 온 근대성에 대한 회의와 불신이 팽배했었다. 인류 세계사적으로 혼돈의 시대였던 것이다. 이는 다다이즘에 이어서 비이성과 비합리를 표방하는 초현실주의 형성의 근간이 되었다. 1924년 프랑스 시인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의 선언으로 시작된 초현실주의는 40여 년 뒤 그의 죽음과 함께 사실상 막을 내리지만 영화와 패션 등 다양한 장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히치콕의 영화 '현기증' 도입부에서도 눈이 비현실적으로 극대화되면서 '현기증'을 유발한다.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의 '잘못된 거울'(1935)과 막스 에른스트(Max Ernst)의 '빛의 바퀴'(1925)와도 흡사하다. 초현실주의의 주요 도상인 눈동자를 히치콕 또한 무의식과 불안, 콤플렉스, 혼란의 심리를 배가하는 장치로 활용한 것이다. 히치콕의 정신분석학적 스릴러 영화 '망각의 여로'(1945)에는 달리가 참여하기도 했다. 초현실주의와 할리우드의 만남인 셈이다. 달리는 기억상실증과 편집증 등의 분열된 정신세계를 꿈 속 장면처럼 묘사하면서 영화의 완성도를 높였다.
관객을 소름 돋게 하는 서스펜스 기법을 개척했던 히치콕은 인간 심연에 내재한 공포와 불안, 본성 등의 비이성적인 것에 몰두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수백 년 간 견고하게 구축되어온 제도와 관습에 대한 해방의 외침이었을 것이다.
히치콕이 초현실주의에서 이미지를 차용했다면, 1990년대 이후 동시대 미술은 히치콕의 작품을 '재활용', '재가공'하고 있다, 이를 '포스트프로덕션'이라 한다.
프랑스 비평가 니꼴라 부리요(Nicolas Bourriaud)가 주창한 포스트프로덕션은 디지털 기술의 발달 속에서 과거 예술 형식과 내용, 방식을 재생산하는 제작 기법과 경향을 가리킨다. 영국의 비디오 아티스트 더글라스 고든(Douglas Gordon)이 히치콕의 '사이코'를 24시간 동안 늘린 '24시간 사이코'(1993)와 피에르 위그(Pierre Huyghe)가 '이창'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리메이크'(1994)가 그 예이다. 동시대 작가들이 정보 기술에 발 빠르게 대응하고 기존의 예술을 변주하면서 고갈되어가는 소재 영역에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 있는 것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고 했듯이 예술가들은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 영감을 교류하며 창조에 창조를 거듭한다. 파리의 초현실주의가 미국 히치콕에게 영향을 미쳤고, 그 하고 있다. 예술이라는 매개체로 시간과 공간이 초연결 되어 있음을 체감한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한창인 지금, 초등학생 아들 또한 집에서 '옥자', '플란다스의 개', '괴물' 등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 몰입해있다. '몇 십 년 후 오스카의 또 다른 주인공이 되지 않을까?' 주책 맞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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