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삼의 마을 이야기>배려와 전통이 어우러진 무안 유교마을의 이야기
●무안 유교마을
전통 건축물과 자연이 어우러진 곳
건물의 배려심과 소박한 멋 돋보여
천석꾼 나종만 삶 담은 문화유산
현대적 시설원예가 활발히 이뤄져
전통 건축물과 자연이 어우러진 곳
건물의 배려심과 소박한 멋 돋보여
천석꾼 나종만 삶 담은 문화유산
현대적 시설원예가 활발히 이뤄져
입력 : 2024. 11. 28(목) 16:20
유교리 고택 대문간채. 높고 큰 대문이 옛 천석꾼의 위엄을 보는 것 같다.
일제강점 때 목포사람들 식수용으로 만들어진 수원지. 취수탑도 옛 모습대로 남아있다. |
침계정(枕溪亭). 계곡을 베개 삼다, 멋스럽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을 얹었다. 간결하고 소박하다. 뒷면 칸막이가 별나다. 정자는 사방으로 트인 게 일반적인데, 뒷면을 약간 높여 막았다. 정자 뒤쪽이 하천이다.
오호! 사생활 보호다. 정자에서 하천이 보이지 않게 한 것이다. 하천에서 물놀이하는 사람도 정자를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 서로를 배려한 칸막이다. 여름날 정자에서 쉬는 어른과 물놀이하는 어린이를 생각해 본다. 배시시 웃음이 나온다.
배려심 묻어나는 침계정은 1936년 처음 지었다. 주변에 고목도 여러 그루 서 있다. 당산제라는 이름으로 마을사람들로부터 해마다 제사상을 받는 나무다. 정자와 나무, 하천이 잘 어우러진다. 마을도 평화롭고 호젓해 보인다.
전라남도 무안군 삼향읍 유교리(柳橋里)다. 옛날 바닷가에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있었는데, 사나운 태풍에 쓰러졌다. 부러진 나무 그대로 다리가 됐다. 버드나무다리 마을이 된 유래다. ‘유교동(柳橋洞)’으로도 불렸다. 유교리는 유교와 석교, 원동, 청룡, 중등포, 군산동, 관동 등 7개 마을로 이뤄져 있다.
돌다리 있었다고 석교, 옛날에 잠자리와 먹을거리를 제공한 원(院)이 있었다고 원동, 국사봉의 맥을 이은 필봉의 생김새가 용을 닮았다고 청룡이다. 옛 포구가 있었다고 중등포, 많은 산이 무리를 이뤘다고 군산동, 큰 벼슬아치가 나올 지형이라고 관동이다.
침계정과 함께 유교마을에서 눈에 띄는 게 고택이다. ‘유교리 고택’으로 이름 붙여졌다. 한때 ‘나상열 가옥’으로 불렸다. 천석꾼 나종만의 옛집으로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고목이 돌담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나종만은 당시 삼향, 일로, 몽탄 일대에 많은 땅을 소유했다. 그의 땅을 밟지 않고는 목포를 오갈 수 없었다고 한다. 그의 집에는 소 코뚜레만도 한 짐 됐다는 말도 전한다. 얼마나 땅이 넓고, 소가 많았는지 짐작게 한다.
천석꾼은 한 해에 곡식 1000석을 수확할 땅을 가진 사람을 일컫는다. 쌀 1석은 대략 160㎏에 이른다. 요즘 마트에서 파는 쌀 20㎏짜리를 감안하면, 8포대다. 성인 1명이 1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양이다. 1000석을 생산하려면 땅은 20만∼30만 평(66만∼100만㎡) 됐을 것이다.
고택은 나종만이 1912년 지었다. 크고 높은 대문이 천석꾼의 위엄을 나타내고 있다. 문간채를 들어가서 만나는 바깥마당이 넓다. 곡간채도 크다. 담장으로 구분된 안마당도 넓다. 그만큼 거둬들일 곡식이 많았다는 반증이다. 곡식을 실은 수레가 마당까지 드나들 수 있게 길도 넓다. 안채와 곡간채, 행랑채, 문간채, 헛간채가 남아있다. 안채 뒤에 동재와 서재, 사당과 사랑채도 있었다니 부농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안채가 석축 위에 자리하고 있다. 산자락 경사면을 3단으로 나눠, 가장 높은 곳이다. 집안은 물론 마을과 들녘이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정면 7칸, 측면 3칸 ㅡ자형 안채는 한옥에 일본식이 더해졌다. 기둥이 둥글고, 사면에 툇마루를 뒀다. 처마 서까래에 壽(수)․福(복)․康(강)․寧(녕)이 새겨져 있다.
안채 뒤 산자락에 설치한 음식저장고도 부농의 상징이다. 땅굴을 파 만든 음식저장고는 천연 냉장고인 셈이다. 음식도 숙성시켜 줬을 테다. 네모난 우물엔 도르래를 달아 물을 끌어올린 흔적이 남아있다. 물 사용량이 많았다는 증표다. 굴뚝도 안채 뒤로 3개가 높이 서 있다. 천석꾼의 옛집답다.
군산동에 있는 3수원지도 호젓하다. 일제강점 때 목포사람들 식수용으로 만들어졌다. 수원지와 취수탑이 옛 모습대로 남아있다. 제방과 취수탑을 잇는 뽕뽕다리도 그대로다. 안전장치가 허술한 것이 흠이다. 아찔하다.
제방 아래 숲은 인근 학교 학생들 옛 소풍 장소였다. “맨날 여기로 왔어요. 친구들이랑 도시락 까먹고, 장기자랑 하고, 보물찾기도 한 곳입니다. 큰 녹음기 가운데에 두고 고고춤도 신나게 췄죠. 벚꽃 필 때도 여기, 이뻐요. 옛날엔 벚꽃 구경 오는 사람들이 꽤 많았어요.” 숲길에서 만난 마을주민의 말이다.
늦가을이 내려앉은 단풍나무 숲그늘이 아름답다. 소풍 오가던 학생들이 재잘거리며 지났을 비자나무와 삼나무 숲길도 정겹다. 그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다.
유교마을은 한때 나주나씨로 자작일촌을 이뤘다. 지금은 아니다. 상대적으로 젊은사람이 많이 들어와 살고 있다. 목포와 가깝고, 광주∼목포를 잇는 광목간 국도와 서해안고속국도가 인접한 덕이다. 마을에서 삼향읍 임성리를 이어주는 지방도가 확포장돼 전남도청과도 가까워졌다.
편리한 교통 덕분에 시설원예도 빨리 시작됐다. 기존 쌀과 보리․양파가 딸기와 파프리카, 토마토로 바뀌었다. 그중에서도 방울토마토를 많이 생산한다. 오래 전 바닷물 드나들던 중등포가 간척돼 농경지가 넓어진 것도 한몫했다.
간척되기 전 중등포는 사람들 왕래가 잦은 포구였다. 목포에서 일로시장을 오가는 길이고, 광주와 한양으로 통하는 길목이었다. 광복 이후 삼향면사무소가 마을에 설치됐다. 면사무소는 임성리로 옮겨갔고, 지금은 읍사무소가 됐다. 100년 넘은 역사 지닌 삼향초등학교도 마을에 있다. 1920년 삼향공립보통학교로 문을 열었다. 학교 부지를 나종만 씨가 희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신안주씨가 설립한 전남예술고등학교도 마을에 있다.
사회복지법인 애중복지재단도 여기에 있다. 고 이방호 원장이 1961년 세운 애중원은 노인과 장애인, 정신질환자 등 노숙인을 돌봤다. 이 원장은 단순 수용을 넘어 원생들에 자립심을 심어줬다. 나주나씨 제각 경앙정과 구산재, 나주임씨 제각 영유재도 유교마을에 있다.
이돈삼/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