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삼의 마을 이야기>"순천왜성과 신성포: 역사의 흔적과 평화의 길"
●순천 신성마을
남도에 남아 있는 유일한 왜성
순천왜성 산업화와 개발로 변화
역사 흔적·주민들 기억 여전해
과거 아픔 기리는 공간 조성
입력 : 2024. 11. 14(목) 18:07
순천왜성 천수각에서 내려다 본 신성마을 풍경. 충무사도 마을에 들어앉아 있다.
순천왜성 천수각에서 내려다 본 신성마을 풍경. 충무사도 마을에 들어앉아 있다.
율촌산업단지가 발아래 있다. 여수국가산단과 광양항, 광양컨테이너부두도 저만치 보인다. 산단과 부두로 개발되기 전엔 모두 바다였다. 물 반, 고기 반이었다. 바닷물이 빠지면 짱뚱어 뛰놀고 바지락도 지천이었다. 아직도 갯골이 남아 있다. 갯내음도 짙다. 갯골에서 두눈 부릅뜨고 먹잇감을 찾는 왜가리도 가끔 만난다.

신성포다. 이 바다에 이순신과 진린이 이끈 조·;명 연합군이 주둔했다. 1598년 이맘때다. 조명연합군은 일본군을 순천왜성에 가두고 대치했다. 왜교성전투다. 사면초가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명나라 장수 유정과 진린은 퇴로를 열어준다는데, 이순신은 단호했다. 그냥 광양만에서 죽으라는 것이었다.

진린의 한쪽 눈을 보시시 가리는 데 성공한 고니시는 사천왜성에 있는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에 도움을 청했다. 고니시를 구하려는 일본함대가 한밤중에 달려왔다. 일본군의 전략을 훤히 꿰뚫은 이순신은 그 길목을 지켰다. 조·명 연합군과 일본군의 사활을 건 전투가 벌어졌다.

바다에서 치열한 백병전까지 펼친 전투는 조·명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순신도 적탄을 맞았다. 1598년 11월 19일(음력) 노량해전이다. 임진․정유재란 7년 전쟁도 막을 내렸다.

신성포 앞바다는 7년 전쟁의 마지막 전투 현장이다. 사철 푸른 소나무와 어우러진 왜성에는 가슴 아픈 역사가 서려 있다. 순천왜성(順天倭城)은 일본군이 남해안에 쌓은 40여 개 왜성 가운데 하나다. 지금 전라도에 남은 유일한 왜성이다.

순천왜성은 1999년 전라남도기념물로 지정됐다. 처음엔 ‘사적(史跡)’이었다. 일제강점기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1933년)에 의해서다. 광복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져 국가사적(승주 신성리성)이 됐다. 1997년 사적에서 해제됐다. ‘왜놈 유적을 국가사적으로 예우하는 건 말이 안 된다’는 이유였다.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이 한창이던 김영삼 정부 때의 일이다.

순천왜성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해안에 들어섰다. 돌로 쌓은 성벽이 아래로 완만한 경사를 이룬다. 내부 방어선도 겹겹이다. 가장 높은 곳엔 천수각(天守閣)을 만들었다. 천수각은 전투를 지휘하는 공간이다. 왜성의 형태는 명나라 종군 화가가 그린 ‘정왜기공도권(征倭紀功圖卷)’에 잘 묘사돼 있다.

순천왜성은 고니시의 주도로 1597년 9월부터 12월까지 쌓은 것으로 전해진다. 성의 규모가 크다. 길이 1342m의 내성과 해발 57m에 자리한 본성(本城), 그리고 2500m 넘는 외성으로 이뤄져 있다. 내성과 외성은 해자(垓子)로 구분돼 있다. 해자 위에 놓인 다리가 왜교(倭橋)다.

한눈에 봐도 함락하기 어려운 요새다. 실제 조·명 연합군은 남해안에 있는 왜성 한 곳도 함락시키지 못했다. 순천왜성은 일본군의 호남지방 공략과 방어기지로 맞춤이었다. 하지만 본국으로 돌아가려던 고니시와 일본군에겐 부메랑이 됐다.

성곽 쌓기엔 지역주민이 강제 동원됐다. 주민은 전쟁에다 강제동원 피해까지 고스란히 겪었다. 순천왜성은 왜교성(倭橋城), 예교성(曳橋城), 신성리성(新城里城)으로 불렸다. 백제 때 쌓은 검단산성을 ‘구성(舊城)’이라 부르며, 신성(新城)으로 구분하기도 했다.

순천왜성이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新城里)에 있다. 광양만에 접한 신성리는 전라도 동부 내륙과 바다를 연결하는 포구였다. 매립되기 전까지는 삼면이 모두 바다로 열린 요새였다. 일본군이 왜성을 쌓은 연유다.

포구가 쇠퇴하기 시작한 건 1982년, 광양제철 건설을 위한 바다 매립이 시작되면서다. 1996년 율촌산단을 조성하면서 마을도 농촌으로 바뀌었다. 바다와 갯벌을 터전으로 살던 주민은 농민과 공장 노동자가 됐다.

신성리는 ‘예다리’로 통했다. 왜성을 연결하는 다리를 ‘옛다리’라 부른 데서 유래한다. 한자로 ‘예교(曳橋)’로 표기했다. 옛다리에 일본군이 쌓은 성이라고 ‘예교성’, 신성에 있는 포구라고 ‘신성포(新城浦)’다. 조선시대엔 작은 어촌에 시장이 형성되면서 ‘신장개(新場開)’로 불렸다고 전한다.

신성리는 임진왜란 이후 달성서씨와 전주이씨, 김해김씨 등이 들어와 마을을 이뤘다. 앞바다에서 죽은 일본군 혼령이 주민들 꿈에 자주 나타났다. 마을에 사당을 세우고, 일본군이 가장 두려워한 이순신의 위패와 영정을 모셨다. 충무사다. 그 뒤 일본군 악귀는 거짓말처럼 사라졌다고 한다.

충무사는 일제강점기에 불탔다. 광복 직후 주민들이 복원하고, 이순신을 도운 송희립과 정운의 위패를 함께 모셨다. 충무사 담장 밖에 소서행장 비석도 있다. 고니시의 순천왜성 주둔을 기려 일제강점 때 천수각에 세운 것이다. 광복 이후 주민들이 넘어뜨리고 처박았다. 후대의 교훈으로 삼자고 다시 옮겨 놓았다. 2013년 2월의 일이다.

옛 충무초등학교 자리에 ‘정유재란 평화공원’도 만들어졌다. 공원 마당에 임진·정유재란으로 피폐해진 주민의 모습이 조형물로 만들어져 있다.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과 등자룡 비석도 세워졌다. 공원 바닥에는 평화를 염원하며 시민이 쓴 문구 1597개가 박석으로 깔려 있다. 실내 전시관과 체험관은 평화를 그리는 공간이다.

마을과 평화공원을 잇는 길이 ‘정채봉길’로 이름 붙여져 있다. 신성리에서 태어난 동화작가 정채봉(1946~2001)은 월간 ‘샘터’ 편집자로 일했다. 작품집으로 ‘물에서 나온 새’ ‘오세암’ ‘스무살 어머니’ ‘생각하는 동화’등이 있다.
이돈삼/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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