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노르베르트 베버의 1925년 소고춤 영상 분석 및 전통 재구성
409. 노르베르트 베버 영상 소고춤 읽기
입력 : 2024. 08. 22(목) 18:22
광대소고춤 복원 및 재현 카달로그 일부.
광대소고춤 복원 및 재현 포스터. |
고깔 소고춤과 채상모 소고춤
영상에 나오는 소고춤 동작은 현행 소고춤과 어떻게 같고 다른가? 고깔이나 전립을 쓰지는 않았지만, 소고의 크기로 보아 고깔소고춤보다는 채상모소고춤에 가깝다. 고깔소고춤은 전라우도 농악에서 볼 수 있으니 서울 경기와 진남포 평양 등을 중심으로 하는 여행 루트와 거리가 멀다. 채상소고춤은 호남좌도농악, 경기충청농악, 경상농악 등에서 볼 수 있으니 연결해볼 만하다. 영상의 동작 중, 외사, 양사, 퍼넘기기의 기본 동작과, 나비상, 차고앉는상, 지게북, 물푸기, 벌려겹치기, 솟을법구, 연풍대, 마상개뿐만 아니라 발림, 거북이채, 수박치기까지 정병호가·농악(열화당, 1986)에서 정리한 35개의 소고 춤사위, 윤석운이 ‘한국농악고(1979)’에서 정리한 정보들과 유사하다. 이를 분석하면 1920년대 중반의 소고춤과 현행 소고춤의 같은 점과 다른 점, 나아가 변화된 점 등을 살필 수 있겠다. 보다 면밀한 분석과 재현은 문진수 명무가 공연으로 선보이게 된다. 영상 소고춤의 연행 주체는 누구일까? 고깔소고춤이 마을농악에서 연행된 것이라면, 채상모소고춤은 직업적인 걸립패 농악단의 연희물이다. 정병호의 지적처럼 채상모소고춤은 고깔상모에 비해 고갯짓을 많이 하기 때문에 북의 크기가 호남지역 것보다 작다. 참고로 호남지역은 고깔소고 때문인지 좀 더 큰북 형태인 벅구(버꾸)놀이로 발전했다. 서남해안을 중심으로 한 벅구놀이에 대해서는 몇 차례 본 지면을 통해 소개한 바 있다. 이 영상은 소고춤이 광대 소고춤으로 이행하기 전 맥락 예컨대 고깔소고춤 이전 형태를 추정하게 해준다. 그런 점에서 소고춤이 발달한 내력을 추적해볼 수 있다는 점, 나아가 오늘날 농악의 재구성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소중한 자료라고 생각된다. 최남선은 ‘조선상식문답속편(경인문화사, 2013)’에서 농악을 이렇게 정의했다. “세조가 농사를 열심히 장려할 때 일부러 농가(農歌)를 만들고 노래에 능한 기생 중에서 농가를 잘 부르는 여자 9인을 선정하여 오로지 농가를 부르게 하여 민생의 어려움을 알게 하시니, 이것은 국정(國定) 농악이라 할 것이다. 최근에 옛 사당패와 굿중패의 놀이를 농악이라는 이름으로 연행하는 일이 더러 있지만, 이것은 농촌의 오락이라는 의미로 농악이라 할는지는 모르지만 결코 본연의 농악이 아니다.” 최남선(1890~1957)이 두레 농악에 의미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는 한편, 1900년대 초에 이미 사당패와 굿중패(중매구패)의 놀이를 농악으로 호칭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농사를 끝내고 놀이하는 고래의 오월제로 소고춤의 의미를 올려잡을 수 있다. 농사 관련 의례에 연희패들의 기예가 습합되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주지하듯이 오월제는 ‘삼국지위지동이전·마한조’의 기록이다. 오월에 씨를 다 뿌리고(조선 중후기 모내기가 전국화되기 이전에는 모두 직파였다)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떼를 지어 모여 노래하고 춤추며 술을 마신다는 점, 밤낮 쉬지 않고 수십 명이 함께 춤을 추는데 다 같이 일어나 서로 따르며 가락에 맞추어 손발을 맞추면서 몸을 높였다 낮췄다 하면서 땅을 밟는다는 점, 이것이 중국의 탁무(鐸舞)와 비슷하다는 점 등이 주목된다.
남도인문학팁
소고춤 백 년 가로지르기, 노르베르트 베버에서 명무 문진수까지
1900년대에 이미 사당패와 굿중패의 소고놀이를 농악으로 호칭하였으므로 지금의 광대 소고놀이의 뿌리가 어디에 있을 것인지 짐작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의 영상은 기획 연출 작품이다. 사당패, 굿중패(중매구패), 혹은 솟대쟁이패 중 일부를 섭외하여 촬영했다고 볼 수 있다. 창작의 면모이긴 하지만 중국의 현행 소고춤도 가슴 앞에서 북 가로 던지기, 등 뒤로 북 던져 받기, 무릎 꿇은 상태에서 이동하기, 가부장자리 틀고 구르기 등의 춤사위로 발전한 바 있다. 걸립이나 유랑연희패에 의해 전국화되었을 소고춤도 이와 다르지 않다. 1920년대는 일본의 가부끼와 신파극, 중국의 경극 등이 들어와 서울(경성)이 민간예술의 용광로였던 시기다. 소리광대들의 끊임없는 궁구함이 오늘날의 판소리를 낳았고 무계(巫係)의 약진을 추동하였으며, 줄광대 등 예인들의 기예가 각양의 춤으로 놀이로 스며들거나 이행되었다. 영상에 남아있을 그 시대의 그림자까지 추적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광대 소고놀이의 전통과 두레 농업의 전통으로부터, 더 거슬러 올라 마한의 오월제에 닿을 수 있는 문진수의 재현 행위를 기쁜 마음으로 모신다. 춤 전문가 최해리의 사회로, 김승국 전통문화콘텐츠연구원장과 함께 내가 발제를 맡아 토론한다. 토론 후에 명무 문진수의 재현과 창작 무대가 펼쳐진다. 소고를 어떻게 다루는가의 새로운 관점의 전환, 광대 소고춤이 갖는 가능성과 예술성을 확인하는 기회가 아닌가 싶다. 이제 우리는 백 년 전 전통을 법고창신하는 실천을 통해 노르베르트 베버 영상의 의미를 재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소고춤 100년의 횡단, 노르베르트 베버 영상에서 명무 문진수까지 궤적을 확인하는 자리, 이번 포럼과 공연은 대한민국연희춤협회가 주관하고 서울시가 후원한다. 8월 24일(토) 오후 5시 서울시민청 바스락홀에서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