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흙의 숨을 듣는 것, 기후위기 인류의 과제”
424. 흙의 숨, 진도 이야기
입력 : 2024. 12. 05(목) 17:23
다큐멘터리 ‘흙의 숨, 진도 이야기’ 포스터.
흙이 숨을 쉰다. 인간은 죽어서 흙이 된다. 죽어서 흙이 된 인간은 흙의 숨을 쉰다. 지난 진도학회 25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 부대 행사로 열린 김대현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흙의 숨, 진도 이야기’의 카피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다. 밭 한가운데에 무덤구덩이를 파고 사람이 드러눕는 장면이다. 흙과 이산화탄소를 다룬 과학 다큐멘터리 영화다. 하지만 사람 사는 이야기가 더 많이 등장한다. 그런 점에서 인문 다큐멘터리다. 깊게 판 구덩이에 들어가 누우면 어떤 느낌일까? 웅덩이의 크기만큼 시야가 좁아지니 신경이 한곳에 모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살에 닿은 나무뿌리와 잔돌과 무수하게 엉켜있는 땅속의 풍경들이 스친다. 크고 작은 바람과 구름, 몇 줌의 햇볕과 살랑이는 이름 모를 풀들, 때때로 들리는 새들의 지저귐, 아! 지상의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호흡들이 느껴진다. 낮으로는 강렬한 햇빛과 밤으로는 쏟아져 내리는 달빛과 별빛들, 죽어있는 내 몸 위로 쏟아져 내리는 별들이 흙의 알갱이 알갱이마다 스며들어 하늘과 땅이 교접하는 풍경이라니. 이토록 강렬한 명상 체험이 또 있을까. 지상의 울음들이 그치는 시간, 구덩이에 흙을 채우기 시작하면 비로소 나의 몸은 동그란 봉분 아래 한 마리 벌레처럼 웅크리고 새 호흡을 시작한다. 흙의 숨이다. 실제로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종류의 유기물들이 쉬는 숨이겠지만, 내가 흙으로 돌아가 쉬는 숨일 것이니 어찌 흙의 숨이라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본디 사람이 흙으로부터 왔고 대기의 숨을 받아 호흡하게 되었다고 하지 않았나. 성경 창세기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의 생령이 된지라.” 후한 시대의 응소라는 사람이 지은 ‘풍속통의’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처음 생겼을 때 아직 사람이 없었다. 여신 여와가 황토를 뭉쳐 사람을 만들었다. 사람을 하나하나 만들다 보니 힘이 들었다. 새끼줄을 진흙탕 속에 담갔다가 꺼내 사방으로 흩뿌렸다. 흩어진 진흙들이 모두 사람이 되었다.” 진도 사람들 입을 빌려 말하는 방식이긴 하지만 이 영화에서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살아 숨 쉬는 흙, 곧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는 생태였을 것이다.
땅에 대한 진도 사람들의 도덕 감성
흙과 물. 기후학과 교수인 유경수가 진도 숲에서 흙구덩이를 파려다가 깜짝 놀랐다. 그곳이 바로 버려진 무덤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1980년대 이전에는 토지 부족과 죽은 자에 대한 존중 사이의 균형이 반대였다. 전쟁 후 급격한 인구 증가는 경작지에 대한 높은 수요로 이어졌다. 무덤은 종종 농경지로 재활용되었다. 그러나 무덤의 재활용을 결정짓는 것은 경제 요인만이 아니었다. 진도 어르신들이 거듭 이야기하는 악몽 중 하나는 밭을 벌기 위해 갈아엎은 무덤 주인이 꿈속에 찾아왔다는 내용이다. 무당을 불러 혼백을 위로하고 흩어진 유골을 모아 다시 매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도덕적 죄책감은 남았다. 무덤의 재활용 결정에는 도덕적 차원이 존재했다. 인간의 죄책감이나 두려움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무덤이 재활용으로부터 구조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영화에도 등장하지만, 실제 밭 한가운데 덩그렇게 남아 있는 자그마한 초지들을 볼 수 있다. 대개 고인돌이거나 봉분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무연고 묘지나 오래된 봉분일지라도 함부로 파려고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영화 ‘파묘’에서 극단적으로 보여주듯이 묘지를 판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거나 비윤리적이고 반도덕적이라는 관념이 있다. 이를 사람의 혼령이라는 인간적인 측면만으로 해석하는 것은 편견이다. 예컨대 영험한 무당들은 길을 가다가 산허리가 허물어져 있거나 개발 등으로 산등성이가 잘린 풍경들을 보면 마치 자기 몸이 잘려 나간 듯 아픔을 느낀다. 이게 풍수라는 철학이나 관념으로 구조화되기는 했지만, 몸 혹은 마음의 구조를 지형이나 공간, 특히 땅에 대입해 관념하는 태도가 명료하게 드러난다. 사정이 이러하니 어찌 무덤을 허투루 파헤치겠는가. 그뿐만이 아니다. 김대현 감독은 자신의 영화가 진도 왜덕산(倭德山·왜구에게 덕을 베풀었다는 뜻) 이야기에서 시작됐다고 말한다. 명량 대첩지와 가까운 진도 고군면 해변에 있는 산으로, 물에 떠밀려 온 왜군들의 시신마저 거두어 묻어주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왜덕산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본 지면에서 두 차례(2019. 7. 18·2022. 5. 20) 다루었으니 참고 바란다. 수사자들에 대한 해양문화적 관념이긴 하지만 상고해 보면 적군일지라도 거두어 땅에, 즉 흙에 묻어준다는 마음이 새겨져 있다. 흙을 밟고 사는 사람들이 장차 흙 아래에 묻혀 숨을 쉰다는 것. 여기에는 너와 나, 맞고 틀림, 심지어 아군과 적군도 구분하지 않는다. 오로지 흙의 숨, 흙에 대한 도덕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야말로 기후위기에 직면한 우리에게 전하는 웅숭깊은 메시지 아닐까.
남도인문학팁
소포마을 이장 고 김병철씨의 꿈
영화에서 주인공 격으로 등장하는 이가 고 김병철씨다. 생생하게 그의 메시지들을 접할 수 있어 반가웠다. 영화에서 일부 언급되기도 했지만, 그가 이루고자 했던 꿈은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생태 농사다. 진도읍에 위치한 그의 계단논 각 ‘배미’의 윗자락에 10분의1 면적의 둠벙을 1m 깊이로 파서 연꽃을 심었다. 윗논에서부터 정화된 물들이 순차적으로 아랫배미로 흘러 마지막 논의 물은 농사를 짓고 나서도 식수로 사용할 만큼 깨끗한 물을 얻는 원리다. 이 물이 장차 바다로 흘러 들어온 땅과 물을 살린다는 철학을 실천한 현장이다. 둘째는 역간척이다. 지산면 소포마을 대흥포 간척지는 수십 년 전 주민들이 돌을 이고 지고 날라서 손으로 만들었던 곳이다. 이곳을 다시 바다로 되돌리는 작업으로 ‘자연환경신탁’과 국토해양부가 관여했지만 무산되고 말았다. 일본을 비롯한 선진국에서 이미 간척지를 바다로 되돌리는 프로젝트들을 시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크다. 세 번째는 문화 운동 혹은 문화실천이다. 소포마을을 우리나라에서도 이름난 민속 마을로 이끈 이가 김병철이다. 전남도지정 문화재인 소포마을 농악과 각양의 민속놀이들을 알뜰하게 꾸려 연행해 왔다. 주목할 점이 있다. 우리는 농악이나 무악의 음악 행위를 ‘울린다’라고 표현한다. 악기로 반주를 한다거나, 노래를 부른다거나,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울림’하는 것이다. 한자로는 공명(共鳴)이라 한다. 도대체 무엇을 공명한다는 것인가? 땅을 밟아 땅속을 울리니 이를 ‘지신밟기’ 혹은 ‘마당밟이’라 한다. 그뿐인가 사람과 사람의 마음은 물론이요 마을의 고샅(마을의 좁은 골목길)과 들과 갯벌과 산과 바다 모두를 울리는 것이다. 바람과 구름과 해와 달을 울리고 천지신명을 울리는 것이다. 다큐멘터리에서 말하는 흙의 숨이 바로 그런 것 아니겠는가. 흔히 숲을 중심으로 한 그린카본을 얘기하다가 근자에는 갯벌과 바다를 중심으로 한 블루카본을 얘기한다. 이 다큐에 등장하는 진도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니 우리는 이제 흙의 탄소(이를 옐로우 카본이라 할 수 있으려나?)를 이야기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김대현과 유경수 특히 고 김병철에게 배운 바 크다. 그는 늘 전통문화를 가꾸는 일이 마치 땅을 살리는 일과 같다고 말하곤 했다. 계단논을 구상하고 역간척을 시도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수월하지 않았다. 자신을 희생하며 헌신하다가 병을 얻었고, 그토록 사랑하던 고향의 흙으로 먼저 돌아가 비로소 흙의 숨을 쉬기 시작했다. 그래서다. 우리가 흙의 숨소리를 듣는 것은 그가 남긴 숙제를 듣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흙의 숨을 새록새록 듣는 일, 그것이 기후위기에 봉착한 우리 인류의 과제 아닐까.
땅에 대한 진도 사람들의 도덕 감성
흙과 물. 기후학과 교수인 유경수가 진도 숲에서 흙구덩이를 파려다가 깜짝 놀랐다. 그곳이 바로 버려진 무덤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1980년대 이전에는 토지 부족과 죽은 자에 대한 존중 사이의 균형이 반대였다. 전쟁 후 급격한 인구 증가는 경작지에 대한 높은 수요로 이어졌다. 무덤은 종종 농경지로 재활용되었다. 그러나 무덤의 재활용을 결정짓는 것은 경제 요인만이 아니었다. 진도 어르신들이 거듭 이야기하는 악몽 중 하나는 밭을 벌기 위해 갈아엎은 무덤 주인이 꿈속에 찾아왔다는 내용이다. 무당을 불러 혼백을 위로하고 흩어진 유골을 모아 다시 매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도덕적 죄책감은 남았다. 무덤의 재활용 결정에는 도덕적 차원이 존재했다. 인간의 죄책감이나 두려움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무덤이 재활용으로부터 구조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영화에도 등장하지만, 실제 밭 한가운데 덩그렇게 남아 있는 자그마한 초지들을 볼 수 있다. 대개 고인돌이거나 봉분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무연고 묘지나 오래된 봉분일지라도 함부로 파려고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영화 ‘파묘’에서 극단적으로 보여주듯이 묘지를 판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거나 비윤리적이고 반도덕적이라는 관념이 있다. 이를 사람의 혼령이라는 인간적인 측면만으로 해석하는 것은 편견이다. 예컨대 영험한 무당들은 길을 가다가 산허리가 허물어져 있거나 개발 등으로 산등성이가 잘린 풍경들을 보면 마치 자기 몸이 잘려 나간 듯 아픔을 느낀다. 이게 풍수라는 철학이나 관념으로 구조화되기는 했지만, 몸 혹은 마음의 구조를 지형이나 공간, 특히 땅에 대입해 관념하는 태도가 명료하게 드러난다. 사정이 이러하니 어찌 무덤을 허투루 파헤치겠는가. 그뿐만이 아니다. 김대현 감독은 자신의 영화가 진도 왜덕산(倭德山·왜구에게 덕을 베풀었다는 뜻) 이야기에서 시작됐다고 말한다. 명량 대첩지와 가까운 진도 고군면 해변에 있는 산으로, 물에 떠밀려 온 왜군들의 시신마저 거두어 묻어주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왜덕산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본 지면에서 두 차례(2019. 7. 18·2022. 5. 20) 다루었으니 참고 바란다. 수사자들에 대한 해양문화적 관념이긴 하지만 상고해 보면 적군일지라도 거두어 땅에, 즉 흙에 묻어준다는 마음이 새겨져 있다. 흙을 밟고 사는 사람들이 장차 흙 아래에 묻혀 숨을 쉰다는 것. 여기에는 너와 나, 맞고 틀림, 심지어 아군과 적군도 구분하지 않는다. 오로지 흙의 숨, 흙에 대한 도덕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야말로 기후위기에 직면한 우리에게 전하는 웅숭깊은 메시지 아닐까.
남도인문학팁
소포마을 이장 고 김병철씨의 꿈
영화에서 주인공 격으로 등장하는 이가 고 김병철씨다. 생생하게 그의 메시지들을 접할 수 있어 반가웠다. 영화에서 일부 언급되기도 했지만, 그가 이루고자 했던 꿈은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생태 농사다. 진도읍에 위치한 그의 계단논 각 ‘배미’의 윗자락에 10분의1 면적의 둠벙을 1m 깊이로 파서 연꽃을 심었다. 윗논에서부터 정화된 물들이 순차적으로 아랫배미로 흘러 마지막 논의 물은 농사를 짓고 나서도 식수로 사용할 만큼 깨끗한 물을 얻는 원리다. 이 물이 장차 바다로 흘러 들어온 땅과 물을 살린다는 철학을 실천한 현장이다. 둘째는 역간척이다. 지산면 소포마을 대흥포 간척지는 수십 년 전 주민들이 돌을 이고 지고 날라서 손으로 만들었던 곳이다. 이곳을 다시 바다로 되돌리는 작업으로 ‘자연환경신탁’과 국토해양부가 관여했지만 무산되고 말았다. 일본을 비롯한 선진국에서 이미 간척지를 바다로 되돌리는 프로젝트들을 시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크다. 세 번째는 문화 운동 혹은 문화실천이다. 소포마을을 우리나라에서도 이름난 민속 마을로 이끈 이가 김병철이다. 전남도지정 문화재인 소포마을 농악과 각양의 민속놀이들을 알뜰하게 꾸려 연행해 왔다. 주목할 점이 있다. 우리는 농악이나 무악의 음악 행위를 ‘울린다’라고 표현한다. 악기로 반주를 한다거나, 노래를 부른다거나,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울림’하는 것이다. 한자로는 공명(共鳴)이라 한다. 도대체 무엇을 공명한다는 것인가? 땅을 밟아 땅속을 울리니 이를 ‘지신밟기’ 혹은 ‘마당밟이’라 한다. 그뿐인가 사람과 사람의 마음은 물론이요 마을의 고샅(마을의 좁은 골목길)과 들과 갯벌과 산과 바다 모두를 울리는 것이다. 바람과 구름과 해와 달을 울리고 천지신명을 울리는 것이다. 다큐멘터리에서 말하는 흙의 숨이 바로 그런 것 아니겠는가. 흔히 숲을 중심으로 한 그린카본을 얘기하다가 근자에는 갯벌과 바다를 중심으로 한 블루카본을 얘기한다. 이 다큐에 등장하는 진도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니 우리는 이제 흙의 탄소(이를 옐로우 카본이라 할 수 있으려나?)를 이야기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김대현과 유경수 특히 고 김병철에게 배운 바 크다. 그는 늘 전통문화를 가꾸는 일이 마치 땅을 살리는 일과 같다고 말하곤 했다. 계단논을 구상하고 역간척을 시도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수월하지 않았다. 자신을 희생하며 헌신하다가 병을 얻었고, 그토록 사랑하던 고향의 흙으로 먼저 돌아가 비로소 흙의 숨을 쉬기 시작했다. 그래서다. 우리가 흙의 숨소리를 듣는 것은 그가 남긴 숙제를 듣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흙의 숨을 새록새록 듣는 일, 그것이 기후위기에 봉착한 우리 인류의 과제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