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공·인권변호사·경지지사·대통령 ‘파란만장 역정’
●입지전적 인생 스토리
가난 탈출하려 주경야독 끝 司試 합격
노무현 만나 노동·인권 변호사로 활동
성남시장 재선 후 경기지사 ‘잠룡 부상’
수많은 생사 고비 넘기며 대권 거머져
가난 탈출하려 주경야독 끝 司試 합격
노무현 만나 노동·인권 변호사로 활동
성남시장 재선 후 경기지사 ‘잠룡 부상’
수많은 생사 고비 넘기며 대권 거머져
입력 : 2025. 06. 04(수) 18:10

이재명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인 5월30일 충북 충주시 충주체육관 시계탑광장에서 유세를 마친 뒤 시민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재명 대통령은 입지전적인 성공담의 주인공이다. 이 대통령은 스스로를 ‘흙수저’도 아닌 ‘무수저’라고 할 만큼 철저한 가난을 딛고 일어서야 했다.
최근 펴낸 자전적 에세이 ‘결국 국민이 합니다’에는 어린 시절을 기록한 대목의 첫 문장을 ‘나의 어린 시절은 참혹했다’고 썼다. 어머니는 경기도 성남의 시장통 공중화장실을 청소하고 휴지를 팔아 번 돈으로 생계를 유지했고, 가족은 시장에서 버린 썩은 과일로 배를 채우며 살았다고 한다.
자신을 괴롭혔던 가난은 오히려 생존의 원동력이 됐고, 빈민가의 소년은 밑바닥 삶에서 탈출하겠다는 일념으로 공부해 인권변호사가 됐다. 이어 시민운동을 하다가 세상을 바꿀 힘이 필요하다며 정치권에 투신, 시장, 도지사를 거쳐 대통령까지 이른 인생은 파란만장한 궤적을 그렸다.
●빈민 출신 소년공…검정고시로 대학 입학
이 대통령은 경북 안동의 화전민 가정에서 5남 2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위로 누나 둘이 더 있었는데, 가난 탓에 어릴 적 여의었다. 이 대통령은 봄에 피는 진달래꽃을 먹으며 주린 배를 채워야 할 정도로 가난했고, 5㎞ 산길을 걸어야 갈 수 있었던 초등학교에는 자주 결석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1976년에 아버지를 따라 경기 성남으로 이주한 뒤에는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6년간 소년 노동자로 생활했다. 나이가 어려 법적으로 취업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동네 형 이름을 빌려 위장 취업을 했다.
시계공장에서 스프레이 작업을 하다가 후각이 상했고, 야구 글러브 공장에서는 프레스에 왼팔이 끼여 골절상을 당해 그 뒤로 구부러진 팔을 장애로 안고 살았다.
공장 내 폭력에도 시달렸던 이 대통령은 이런 삶에서 탈출하려면 고등학교 졸업 자격을 얻어 공장 관리자가 돼야 한다고 생각하고 검정고시에 도전했다.
당시 공부하며 세운 세 가지 목표는 ‘남에게 얻어터지지 않고 산다’, ‘돈을 벌어 가난에서 벗어난다’,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산다’였다고 한다.
졸음을 이기려 책상에 압정을 뿌려 놓기까지 하며 주경야독한 끝에 검정고시를 통과해 장학금을 받고 1982년 중앙대 법대에 입학했다.
●노무현 강연 듣고 인권변호사 길 걸어
이 대통령은 대학 시절 광주민주화운동의 실상을 알게 되면서 처음으로 사회의 ‘거악’을 인식했다고 한다. 대학 졸업 1년 후인 1986년에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사법연수원에서 동기로 만난 더불어민주당 정성호 의원과는 평생 정치 역정을 함께하는 동지가 됐다.
이 대통령의 인생을 바꿔놓은 또 한 번의 계기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만남이었다. 사법연수원 시절 노 전 대통령의 강의를 들으며 인권변호사의 길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판·검사 경력 없이 변호사 사무실을 열면 생활비나 벌 수 있을지 고민했으나, 노 전 대통령이 “변호사는 뭘 해도 굶지는 않는다”고 해 용기를 냈다고 한다.
이 대통령은 1989년 성남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해 철거민과 도시 빈민 노동자들을 돕는 노동·인권 변호사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1995년 성남시민모임 창립 구성원으로 참여해 시민운동에 발을 들였다.
2000년 분당 백궁·정자지구 용도변경 특혜 의혹을 제기해 주목받았다.
2003년 말 성남 구시가지 종합병원 두 곳이 동시에 폐업한 것을 계기로 벌인 공공의료기관 설립 운동에서 겪은 좌절은 또 한 번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성남시민 20만명의 서명을 받아 성남시립의료원 설립 조례안이 상정됐지만, 한나라당이 다수를 차지한 시의회가 토론 절차도 없이 47초 만에 이를 부결시켰다.
이 대통령은 이를 계기로 ‘세상이 변하지 않으면 내가 세상을 바꾸겠다’며 정치인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탄핵정국·2017 대선서 전국구 발돋움
2005년 8월 열린우리당에 입당한 이 대통령은 자신의 첫 선거인 2006년 성남시장 선거에서 고배를 마셨고, 2008년 총선에서도 민주당 공천을 받았으나 낙선했다.
2010년 성남시장에 다시 도전해 당선되면서 주목받는 행정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임기 시작 11일 만에 전국 지자체 중 최초로 모라토리엄(채무불이행)을 선언하는 등 파격적 시정 운영으로 파란을 일으켰다.
2014년에는 재선에 성공하자 성남 3대 무상복지 정책으로 불리는 청년 배당·무상 교복·공공산후조리 지원 등의 사업을 추진했다.
2016년 정부가 지방재정 배분 방식을 변경하자 이 대통령은 보편복지 정책을 무력화하려는 시도라며 11일간 단식농성을 했다. 이런 활약으로 이 대통령은 ‘변방의 장수’에서 ‘전국구 정치인’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했고 서서히 민주당 잠룡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같은 해 11월 시작된 촛불 정국에서 ‘탄핵’을 먼저 외치며 정치적 몸값이 올랐고, ‘사이다 발언’으로 더욱 존재감을 드러냈다.
●경기지사로 추진력 과시…대권주자로 체급 올려
이 대통령은 2018년 지방선거에서 16년 만에 민주·진보 진영 경기도지사로 당선돼 명실상부한 대권주자로 체급을 올렸다. ‘기본 시리즈’를 무기로 자신만의 콘텐츠를 쌓았고, 2019년 계곡 불법 점유시설물 정비 과정의 추진력으로 ‘이재명’이라는 브랜드를 각인시켰다.
‘친형 강제 입원’ 관련 허위사실 공표 혐의로 기소돼 2심에서 당선무효형을 선고받았을 때는 정치 인생 최대 위기를 맞았으나, 2020년 대법원이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하고 무죄를 확정받으며 고비를 넘겼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 등 잠룡들이 줄줄이 무너진 가운데 사법 리스크를 털어낸 생환은 그를 유력 주자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2021년 마침내 대선후보 경선에서 혈투 끝에 이낙연 후보를 물리치고 승리해 본선에 나설 수 있었다.
그러나 경선 과정에서 이낙연 후보 측이 제기한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은 끝내 본선에서 발목을 잡았고, 윤석열 후보에게 대권을 내줘야 했다.
●총선 압승으로 대선주자 가치 증명
이 대통령은 대선 패배 직후 당 총괄선대위원장으로 2022년 6월 지방선거를 이끌었다.
동시에 자신은 송영길 당시 민주당 대표가 서울시장 선거에 도전하고자 지역구인 인천 계양을을 비우고 떠나자 그곳의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했다.
당의 구심점 역할을 할 리더가 보이지 않는다는 평가 속에 2022년 8월 당 대표로 선출된다.
당 대표 취임 1년을 맞은 2023년 8월 31일, “무능 폭력 정권에 국민 항쟁을 시작하겠다”며 무기한 단식에 들어갔다.
지난해 1월 2일에는 부산 가덕도신공항 부지 방문 도중 목에 칼을 찔리는 습격을 당했다.
동맥 손상을 피해 목숨을 건진 뒤 이끈 총선에서 야권의 압승을 견인하며 대권주자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다졌다.
12·3 비상계엄 당시 야당 대표로 계엄 해제 요구 안건을 통과시킨 뒤 윤석열 전 대통령의 탄핵까지 완수한 순간, 사실상 대선 재도전도 확정된 셈이었다.
사법 리스크는 마지막까지 그의 발목을 잡았다. 공직선거법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아 족쇄를 푸는 듯했으나 지난달 대법원이 유죄 취지로 파기 환송하면서 이 후보는 다시 한번 위기를 맞닥뜨렸다.
하지만 파기환송심 재판부와 대장동·백현동 등 개발 특혜 의혹 재판부가 공판 기일을 대선 이후로 미루며 부담을 덜었고, 이 대통령은 비로소 대권을 거머쥐게 됐다.
김선욱 기자·연합뉴스
최근 펴낸 자전적 에세이 ‘결국 국민이 합니다’에는 어린 시절을 기록한 대목의 첫 문장을 ‘나의 어린 시절은 참혹했다’고 썼다. 어머니는 경기도 성남의 시장통 공중화장실을 청소하고 휴지를 팔아 번 돈으로 생계를 유지했고, 가족은 시장에서 버린 썩은 과일로 배를 채우며 살았다고 한다.
자신을 괴롭혔던 가난은 오히려 생존의 원동력이 됐고, 빈민가의 소년은 밑바닥 삶에서 탈출하겠다는 일념으로 공부해 인권변호사가 됐다. 이어 시민운동을 하다가 세상을 바꿀 힘이 필요하다며 정치권에 투신, 시장, 도지사를 거쳐 대통령까지 이른 인생은 파란만장한 궤적을 그렸다.
●빈민 출신 소년공…검정고시로 대학 입학
이 대통령은 경북 안동의 화전민 가정에서 5남 2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위로 누나 둘이 더 있었는데, 가난 탓에 어릴 적 여의었다. 이 대통령은 봄에 피는 진달래꽃을 먹으며 주린 배를 채워야 할 정도로 가난했고, 5㎞ 산길을 걸어야 갈 수 있었던 초등학교에는 자주 결석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1976년에 아버지를 따라 경기 성남으로 이주한 뒤에는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6년간 소년 노동자로 생활했다. 나이가 어려 법적으로 취업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동네 형 이름을 빌려 위장 취업을 했다.
시계공장에서 스프레이 작업을 하다가 후각이 상했고, 야구 글러브 공장에서는 프레스에 왼팔이 끼여 골절상을 당해 그 뒤로 구부러진 팔을 장애로 안고 살았다.
공장 내 폭력에도 시달렸던 이 대통령은 이런 삶에서 탈출하려면 고등학교 졸업 자격을 얻어 공장 관리자가 돼야 한다고 생각하고 검정고시에 도전했다.
당시 공부하며 세운 세 가지 목표는 ‘남에게 얻어터지지 않고 산다’, ‘돈을 벌어 가난에서 벗어난다’,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산다’였다고 한다.
졸음을 이기려 책상에 압정을 뿌려 놓기까지 하며 주경야독한 끝에 검정고시를 통과해 장학금을 받고 1982년 중앙대 법대에 입학했다.
●노무현 강연 듣고 인권변호사 길 걸어
이 대통령은 대학 시절 광주민주화운동의 실상을 알게 되면서 처음으로 사회의 ‘거악’을 인식했다고 한다. 대학 졸업 1년 후인 1986년에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사법연수원에서 동기로 만난 더불어민주당 정성호 의원과는 평생 정치 역정을 함께하는 동지가 됐다.
이 대통령의 인생을 바꿔놓은 또 한 번의 계기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만남이었다. 사법연수원 시절 노 전 대통령의 강의를 들으며 인권변호사의 길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판·검사 경력 없이 변호사 사무실을 열면 생활비나 벌 수 있을지 고민했으나, 노 전 대통령이 “변호사는 뭘 해도 굶지는 않는다”고 해 용기를 냈다고 한다.
이 대통령은 1989년 성남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해 철거민과 도시 빈민 노동자들을 돕는 노동·인권 변호사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1995년 성남시민모임 창립 구성원으로 참여해 시민운동에 발을 들였다.
2000년 분당 백궁·정자지구 용도변경 특혜 의혹을 제기해 주목받았다.
2003년 말 성남 구시가지 종합병원 두 곳이 동시에 폐업한 것을 계기로 벌인 공공의료기관 설립 운동에서 겪은 좌절은 또 한 번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성남시민 20만명의 서명을 받아 성남시립의료원 설립 조례안이 상정됐지만, 한나라당이 다수를 차지한 시의회가 토론 절차도 없이 47초 만에 이를 부결시켰다.
이 대통령은 이를 계기로 ‘세상이 변하지 않으면 내가 세상을 바꾸겠다’며 정치인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탄핵정국·2017 대선서 전국구 발돋움
2005년 8월 열린우리당에 입당한 이 대통령은 자신의 첫 선거인 2006년 성남시장 선거에서 고배를 마셨고, 2008년 총선에서도 민주당 공천을 받았으나 낙선했다.
2010년 성남시장에 다시 도전해 당선되면서 주목받는 행정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임기 시작 11일 만에 전국 지자체 중 최초로 모라토리엄(채무불이행)을 선언하는 등 파격적 시정 운영으로 파란을 일으켰다.
2014년에는 재선에 성공하자 성남 3대 무상복지 정책으로 불리는 청년 배당·무상 교복·공공산후조리 지원 등의 사업을 추진했다.
2016년 정부가 지방재정 배분 방식을 변경하자 이 대통령은 보편복지 정책을 무력화하려는 시도라며 11일간 단식농성을 했다. 이런 활약으로 이 대통령은 ‘변방의 장수’에서 ‘전국구 정치인’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했고 서서히 민주당 잠룡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같은 해 11월 시작된 촛불 정국에서 ‘탄핵’을 먼저 외치며 정치적 몸값이 올랐고, ‘사이다 발언’으로 더욱 존재감을 드러냈다.
●경기지사로 추진력 과시…대권주자로 체급 올려
이 대통령은 2018년 지방선거에서 16년 만에 민주·진보 진영 경기도지사로 당선돼 명실상부한 대권주자로 체급을 올렸다. ‘기본 시리즈’를 무기로 자신만의 콘텐츠를 쌓았고, 2019년 계곡 불법 점유시설물 정비 과정의 추진력으로 ‘이재명’이라는 브랜드를 각인시켰다.
‘친형 강제 입원’ 관련 허위사실 공표 혐의로 기소돼 2심에서 당선무효형을 선고받았을 때는 정치 인생 최대 위기를 맞았으나, 2020년 대법원이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하고 무죄를 확정받으며 고비를 넘겼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 등 잠룡들이 줄줄이 무너진 가운데 사법 리스크를 털어낸 생환은 그를 유력 주자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2021년 마침내 대선후보 경선에서 혈투 끝에 이낙연 후보를 물리치고 승리해 본선에 나설 수 있었다.
그러나 경선 과정에서 이낙연 후보 측이 제기한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은 끝내 본선에서 발목을 잡았고, 윤석열 후보에게 대권을 내줘야 했다.
●총선 압승으로 대선주자 가치 증명
이 대통령은 대선 패배 직후 당 총괄선대위원장으로 2022년 6월 지방선거를 이끌었다.
동시에 자신은 송영길 당시 민주당 대표가 서울시장 선거에 도전하고자 지역구인 인천 계양을을 비우고 떠나자 그곳의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했다.
당의 구심점 역할을 할 리더가 보이지 않는다는 평가 속에 2022년 8월 당 대표로 선출된다.
당 대표 취임 1년을 맞은 2023년 8월 31일, “무능 폭력 정권에 국민 항쟁을 시작하겠다”며 무기한 단식에 들어갔다.
지난해 1월 2일에는 부산 가덕도신공항 부지 방문 도중 목에 칼을 찔리는 습격을 당했다.
동맥 손상을 피해 목숨을 건진 뒤 이끈 총선에서 야권의 압승을 견인하며 대권주자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다졌다.
12·3 비상계엄 당시 야당 대표로 계엄 해제 요구 안건을 통과시킨 뒤 윤석열 전 대통령의 탄핵까지 완수한 순간, 사실상 대선 재도전도 확정된 셈이었다.
사법 리스크는 마지막까지 그의 발목을 잡았다. 공직선거법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아 족쇄를 푸는 듯했으나 지난달 대법원이 유죄 취지로 파기 환송하면서 이 후보는 다시 한번 위기를 맞닥뜨렸다.
하지만 파기환송심 재판부와 대장동·백현동 등 개발 특혜 의혹 재판부가 공판 기일을 대선 이후로 미루며 부담을 덜었고, 이 대통령은 비로소 대권을 거머쥐게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