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음반과 악보를 모으는 것이 기쁨 중 하나였던 필자에게 이탈리아 유학 시절 로마의 서점 ‘리코르디(Ricordi)’는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최고의 장소였다. 아날로그 시대 이탈리아 통화가 유로화가 아닌 리라였던 당시는 생활비와 레슨비를 제외한 거의 모든 돈을 이곳에서 사용할 정도로 한국에서 보기 어려웠던 수많은 악보와 음반을 만날 수 있는 매력적인 장소였다. 리코르디(카사 리코르디-Casa Ricordi/리코르디 가문/대부분 ‘리코르디’로 통용)는 주로 오페라 악보와 더불어 고전 클래식 음악을 중심으로 악보를 펴내는 출판사의 이름이다. 이 이름은 창업자인 조반니 리코르디(Giovanni Ricordi, 1785~1853)의 퍼스트 네임으로 리코르디 가문은 이탈리아 악보 출판업을 지속 발전시켜왔으며 오페라에 관해서는 특히 세계에서 독보적인 권위를 가진 음악 출판사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초 전문 경영인이 영입되기 전까지 4대에 걸쳐 가족 경영을 통해 전통과 신뢰를 쌓아 왔으며, 세계적인 오페라 작곡가라 할 수 있는 가극의 왕 베르디와 20세기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라 불리는 푸치니를 발굴하고 후원한 가족 기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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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디·푸치니와 함께 많은 일을 했던 줄리오 리코르디. 출처 위키피디아 |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조반니 리코르디는 오케스트라 연주자로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활동하다가,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악보 제판 기술을 배워서 1809년에 출판사를 차렸다. 리코르디가 출판사를 세운 1800년대는 혁신의 시대였다. 정치 사회적으로는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유럽의 정치 사회가 급격한 변화를 맞닥뜨리고 있었으며 이러한 변화를 이끄는 바탕에는 정치 사회, 문학을 포함한 예술 등 사회 전반의 모든 분야의 고도화를 이끈 인쇄술의 발달이 변화를 주도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인쇄술의 발달은 예술과 지식 정보를 향유할 수 있는 주체가 귀족을 비롯한 소수가 점유하던 것을 이제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손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이것은 대중이 사회 주체가 되는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예술 분야는 시장의 확대를 꾀할 수 있었다. 음악 분야에서는 악보의 대량 공급이 가능해지면서 음악과 관련된 산업은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를 직시하고 자신에게 다가온 기회를 주저 없이 실행한 조반니 리코르디는 세계적인 음악가들의 작곡 악보에 관한 가치를 잘 알고 있었으며 이를 위해 리코르디 출판사를 설립한 것이다. 이는 시간 예술인 음악을 기호로 지속 가능하게 하는 작업이었으며 세대를 넘어서도 시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영원불멸의 음악을 존재할 수 있게 하였다. 작금의 시대, 만날 수 있는 고전 음악이 소멸하지 않고 우리 곁에서 시대를 넘어서 재현 할 수 있는 것 역시 당시 악보를 쉽게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보전과 후속세대까지 고전 음악이 전이 될 수 있었다. 이후 녹음기를 통한 음악 재생 기술이나, 연주 장면을 화면으로 담고 인터넷 공간을 통해 공유할 수 있는 4차 산업혁명과 같이 악보 당시 인쇄술의 발달은 이전과 전혀 다른 대변화를 이끈 획기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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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치니의 라보엠 사인 악보. 출처 리코르디 아카이브 |
오페라는 음악의 여러 분야 중에서 탄생 이후 가장 세계인에게 사랑을 받는 장르이다. 특히 리코르디는 오페라의 나라 이탈리아 출신으로 오페라를 중심으로 자신의 회사 성장을 주도하였다. 그의 이러한 성장의 시작은 1825년 이탈리아 오페라의 중심인 밀라노 라 스칼라 오페라극장의 아카이브 인수가 계기라 할 수 있다. 이후 리코르디는 라 스칼라 오페라극장의 모든 악보를 출판 할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며, 이를 통해 19세기 오페라계를 주름잡던 벨칸토 오페라 작곡가 로시니와 도니제티, 벨리니 등의 악보를 출판하며 오페라 악보 출판에 있어 선도적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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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코모 푸치니가 줄리오 리코르디에게 바치는 헌정 사진(1909년) 출처 리코르디 아카이브 |
리코르디는 성장할 수 있는 역사적인 사건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는 1839년에 밀라노에서 당시에는 신예 작곡가였던 주세페 베르디와의 계약이다. 리코르디는 라 스칼라 오페라극장에서 베르디의 데뷔 오페라 작품인 <오베르토의 산 보니파초 백작-L’Oberto, Conte di San Bonifacio, 1839>를 밀라노 라 스칼라에서 본 후 그의 가능성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계약하였다. 베르디는 2대 리코르디 출판사 대표인 조반니 리코르디의 아들 티토 리코르디와 그의 아들 줄리오 리코르디와 함께 일을 했는데 가극의 왕이라 불리며 가장 위대한 오페라의 거장인 베르디와 리코르디의 만남은 세계적인 음악 출판사로 자리 잡을 수 있게 하였다. 현재 리코르디는 베르디의 28편의 오페라 중 23편의 수기 오페라 악보를 보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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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 리코르디 창립자 조반니 리코르디. 출처 위키피디아 |
이어 리코르디는 푸치니와 계약을 하면서, 오페라계에서 세계적 영향력을 확고히 해나갔다. 줄리오 리코르디는 젊은 푸치니의 첫 오페라 <르 빌리-Le Villi, 1884>를 본 이후 그와 계약을 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작품이 출판사인 ‘손 초뇨(Sonzogno) 출판사’가 주최한 신인 작곡가를 위한 콩쿠르의 낙선작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리코르디는 푸치니의 재능에 믿음과 확신이 있었으며 계약 이후 1924년 사망할 때까지 기나긴 협력을 이어나갔다. 리코르디는 베르디와 마찬가지로 <제비-La Rondine, 1917>를 빼놓고 푸치니의 모든 작품을 소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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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디의 오텔로 자필 악보. 출처 리코르디 아카이브 |
바로크 시대 이후 문화산업 중 가장 강력한 위치를 오페라가 차지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오페라의 주체세력은 막강한 문화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과거 바로크 시대 비루투오조였던 성악가가 그러했고 이어 고전 시대에는 오페라 작품을 쓴 작곡가가 주체가 되었다. 당대 최고의 작곡가인 베르디에서 푸치니로 이어지는 이탈리아 오페라 계보와 계약을 하고 세계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그들의 작품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확보한 리코르디는 이를 통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문화 권력을 가진 회사로 등극할 수 있었다. 리코르디는 모든 소속 작곡가들과 꾸준히 교류 해오며, 일반적인 비즈니스 관계를 넘어서 가족과 같은 친밀감을 통해 함께 작품을 만들어가는 후원자이자 주체로서 큰 역할을 해 나아갈 수 있었다. 이처럼 리코르디와 작곡가의 관계는 비즈니스 이상으로 베르디의 성공작 <나부코>나 푸치니의 <마농 레스꼬>처럼 후원과 더불어 좋은 소재를 제안하거나 작곡의 동기를 부여, 함께 제작할 대본가를 찾고 연결하는 등 안정된 창작 활동을 도왔다. 이러한 리코르디의 모습은 출판사의 영역을 넘어 새로운 작품을 기획하고 작곡가, 지휘자, 대본가, 연주자 등의 중재 역할을 하며 오페라 전 영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독보적 문화 권력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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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 리코르디가 발행한 정기 간행물 ‘Musica d_Oggi’의 표지(1920년) 출처 리코르디 아카이브 |
밀라노를 중심으로 영업을 시작한 리코르디는 베르디, 푸치니와 함께 성장하며 그 지평을 이탈리아의 주요 도시와 유럽의 런던과 파리 그리고 미국 뉴욕에까지 지점을 개설하는 등 거침없이 확장해 나갔다. 또한 악보뿐만 아니라 오페라 관련 잡지까지 창간하면서 오페라계의 전 영역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된다. 상당한 인기를 구가하던 리코르디의 잡지에는 당시 공연되던 오페라 관련 정보뿐만 아니라 광고가 함께 실렸는데 이는 종합 엔터테이먼트 문화산업으로서 오페라의 능력을 배가시키는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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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 리코르디가 1871년 발행한 정기 간행물 ‘Rivista Minima’. 출처 리코르디 아카이브 |
지금까지 베르디와 푸치니 등 세계 오페라 하우스에서 공연되는 최고의 인기 작가와 작품을 소유한 리코르디사가 보유한 수많은 기록과 악보, 자료들은 디지털 시대로의 변환 이후에도 리코르디 아카이브(Ricordi Archive)를 통해 인류의 위대한 유산으로 보전되어 후세에게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모든 오페라 하우스에서는 베르디와 푸치니를 연주하기 위해서는 리코르디의 악보를 구매하여 연주한다. 그 이유는 리코르디와 함께 해온 벨칸토 시대 작곡가부터 베르디 푸치니의 오페라를 연주하는 모든 음악가가 보편화된 리코르디를 사용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연주뿐만 리코르디 악보가 작곡가가 의도한 내용을 가장 충실히 정확하게 묘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거듭된 실패로 음악을 포기하려 했던 작곡가 베르디에게 <나부코>의 대본을 전하던 리코르디. 작품을 올릴 수도 없을 정도로 가난한 작곡가 푸치니의 후원자로 수없는 대본가와 제작자들과 마찰을 조정하며 푸치니를 베르디 이후 최고의 이탈리아 작곡가로 등극시킨 리코르디.
리코르디의 선택과 후원 그리고 여러 도전은 이탈리아가 오페라 강국으로 세계 시장을 지배할 수 있게 하였으며 그 덕분에 우리는 주옥같은 스테디셀러 오페라를 지금 시대에도 당시의 감동을 동일하게 향유 할 수 있게 되었다. 광주시립오페라단 예술감독·문화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