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정연권>“조국이 부르면 맹호는 간다!”
정연권 색향미야생화연구소장
입력 : 2024. 12. 26(목) 12:43
정연권 색향미야생화연구소장.
탄핵 가결 하루 전날 대전에서 전우들이 모였다. 진호1중대 송년회였다. 산수유 축제 때 구례에서 만나고 두 번째다. 나이가 들어가니 어려운 시절을 함께한 전우들이 보고 싶었다.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다. 같이 늙어가는 전우들의 근황이 궁금했다. 고된 훈련과 힘들고 지친 순간들을 회상하며 위로하고 싶었다. 열악한 복무환경을 이겨내고 다진 결속력을 보고 싶었다.
선임하사 두 분과 사병 출신 11명이 모였다. 원탁 테이블에서 술과 함께 군 시절 이런저런 일들을 회상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환담이 이어졌다. 정치와 12·3 비상계엄에 대해 말하지 말자 했으나 모두는 안다. 계엄령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것인지. 복무 당시 10·26, 12·12, 5·18까지 7개월간 역사적 사건들로 비상계엄 상황과 대통령이 세 번 바뀌는 혼란을 겪었다. 격동의 시간을 보냈기에 계엄이란 말도 하기 싫었다. 비상계엄은 너무나 무서운 악몽이었다. 비상계엄 트라우마가 아직도 남아있다.
필자는 ‘맹호부대’ 출신이다. 12·12 군사반란에서 진압군으로 언급된 수도기계화보병사단이다. 서울의 봄 영화에서는 ‘수기사’라고 언급됐다. 그날 출동 준비를 마치고 대기하고 있었다. 서울로 간다는 두려움과 걱정으로 멍하니 있었다. 전차와 장갑차로 무장된 기갑부대라 출동됐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5·18 민주화 운동 때 “전라민국은 빨갱이 세상이다” 등 일부 선임병에게 모욕과 구타를 당했다. 정치군인들의 욕망으로 전라도 사람들만 고난을 받았다. 공정하고 공평한 민주주의로 같이 잘살아 보자는 것이 어찌 빨갱이인가. 더불어 행복하게 살자는 게 빨갱이인가. 무슨 연유로 악마화하고 이상한 집단으로 매도하는가. 반문하고 원망했다. 빨갱이란 말은 정치적 맥락에서 비롯된 부정적 편견과 지역적 갈등의 결과인데 군대에서까지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가. 탄식이 절로 나왔다.
군대를 좋아서 간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신성한 국방의무라고 하지만 모두 끌려온 사람들이었다. 상명하복에 노예 같은 생활을 33개월하고 7일간 복무했다. 대한민국에 남자로 태어난 게 한탄스럽기도 했다. 제대 후 그쪽을 보고 싶지도 않았다. 부대 인근에 출장을 가도 애써 외면했다. 그렇게 힘들었던 군대 생활은 공직에 있으면서 위기를 극복하는 힘이 됐다. 하면 된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고된 훈련은 자양분이 되고 에너지를 발산하게 했다. 군대서 겪은 고난과 힘든 순간들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원예 사병으로 발탁돼 국화, 사루비아, 한련화 등을 키워 병영을 화사한 꽃밭으로 만들었다. 원예학 전공을 살려서 좋았고 꽃을 연구하는 단초(端初)가 됐다. 산악행군 중 봤던 야생화는 위로와 많은 영감을 줬다.
추억은 아름다운 것인가. 그 시절 전우들과 만남은 정말 소중한 순간이다. 이제는 그런 경험이 오히려 삶의 지혜와 힘으로 변해 다시 전우들과 만남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청춘을 되찾은 듯한 기분이었다. 함께한 전우들과 유대감은 노년의 마음을 풍요롭게 할 것 같다.
1박 2일 전우들과 같이 보내니 20대 청춘으로 돌아간 기분이다. 새벽에 ‘늙은 군인의 노래’가 생각났다. 마음이 숭고해졌다. 두 선임하사께 존경과 감사한 마음이 샘물처럼 솟았다. 아침을 먹고 보니 모두 얼굴이 밝다. 우리만 그럴까. 아니다. 미국에서 ‘영예 비행(Honor Flight)’ 프로그램에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참전 용사들이 워싱턴 D.C. 전쟁 기념비를 방문해 군대 시절 기억과 전우들과 함께 경험을 나누게 했다. 노병들은 군대 시절 기억을 회복하고 자존심을 되찾았다고 한다. 치매 노인에게 청바지를 입게 하고 60~70년대 대중가요, 영화 등으로 청춘 시절 에너지와 자신감을 회복하게 해준 덕택에 건강을 회복했다는 사례도 있다.
그랬다. 전우들은 힘든 군대 시절을 긍정적인 감정으로 승화해 젊었을 때 에너지와 용기를 다시 찾았다. 맹호부대 출신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이 컸다. 같이 국난을 극복한 애국심이 아직도 철철 넘쳤다.
세상이 어지럽다. 혼란스럽다. 비상계엄령 발동으로 국민이 나라를 걱정하고 있다. 춥고 무서워 몸과 마음이 떨린다. TV, 신문을 보기가 두렵다. 이리저리 참담한 심정을 헤아릴 길이 없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지금 “조국이 부르면 맹호는 간다!”는 맹호부대 구호를 외친다. 강한 의지가 충만하다. 힘들게 지켜온 대한민국을 사수하리라. 전지훈련에 나갈 때 힘차게 외쳤던 “맹호출림(猛虎出林)”을 다시 외친다. 사나운 호랑이가 수풀 밖으로 나왔다. 많은 국민이 집에서 길거리로 나왔다. 국민이 맹호가 됐다. 나라를 망치고 있는 간사한 무리를 응징하러 나왔다. 젊은 여성 맹호들이 선봉장이 됐다. 논밭에 있는 트랙터를 몰고 농민들도 뛰쳐나왔다. 국민이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다. 국민이 이긴다. 맹호출림! 맹호!
선임하사 두 분과 사병 출신 11명이 모였다. 원탁 테이블에서 술과 함께 군 시절 이런저런 일들을 회상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환담이 이어졌다. 정치와 12·3 비상계엄에 대해 말하지 말자 했으나 모두는 안다. 계엄령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것인지. 복무 당시 10·26, 12·12, 5·18까지 7개월간 역사적 사건들로 비상계엄 상황과 대통령이 세 번 바뀌는 혼란을 겪었다. 격동의 시간을 보냈기에 계엄이란 말도 하기 싫었다. 비상계엄은 너무나 무서운 악몽이었다. 비상계엄 트라우마가 아직도 남아있다.
필자는 ‘맹호부대’ 출신이다. 12·12 군사반란에서 진압군으로 언급된 수도기계화보병사단이다. 서울의 봄 영화에서는 ‘수기사’라고 언급됐다. 그날 출동 준비를 마치고 대기하고 있었다. 서울로 간다는 두려움과 걱정으로 멍하니 있었다. 전차와 장갑차로 무장된 기갑부대라 출동됐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5·18 민주화 운동 때 “전라민국은 빨갱이 세상이다” 등 일부 선임병에게 모욕과 구타를 당했다. 정치군인들의 욕망으로 전라도 사람들만 고난을 받았다. 공정하고 공평한 민주주의로 같이 잘살아 보자는 것이 어찌 빨갱이인가. 더불어 행복하게 살자는 게 빨갱이인가. 무슨 연유로 악마화하고 이상한 집단으로 매도하는가. 반문하고 원망했다. 빨갱이란 말은 정치적 맥락에서 비롯된 부정적 편견과 지역적 갈등의 결과인데 군대에서까지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가. 탄식이 절로 나왔다.
군대를 좋아서 간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신성한 국방의무라고 하지만 모두 끌려온 사람들이었다. 상명하복에 노예 같은 생활을 33개월하고 7일간 복무했다. 대한민국에 남자로 태어난 게 한탄스럽기도 했다. 제대 후 그쪽을 보고 싶지도 않았다. 부대 인근에 출장을 가도 애써 외면했다. 그렇게 힘들었던 군대 생활은 공직에 있으면서 위기를 극복하는 힘이 됐다. 하면 된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고된 훈련은 자양분이 되고 에너지를 발산하게 했다. 군대서 겪은 고난과 힘든 순간들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원예 사병으로 발탁돼 국화, 사루비아, 한련화 등을 키워 병영을 화사한 꽃밭으로 만들었다. 원예학 전공을 살려서 좋았고 꽃을 연구하는 단초(端初)가 됐다. 산악행군 중 봤던 야생화는 위로와 많은 영감을 줬다.
추억은 아름다운 것인가. 그 시절 전우들과 만남은 정말 소중한 순간이다. 이제는 그런 경험이 오히려 삶의 지혜와 힘으로 변해 다시 전우들과 만남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청춘을 되찾은 듯한 기분이었다. 함께한 전우들과 유대감은 노년의 마음을 풍요롭게 할 것 같다.
1박 2일 전우들과 같이 보내니 20대 청춘으로 돌아간 기분이다. 새벽에 ‘늙은 군인의 노래’가 생각났다. 마음이 숭고해졌다. 두 선임하사께 존경과 감사한 마음이 샘물처럼 솟았다. 아침을 먹고 보니 모두 얼굴이 밝다. 우리만 그럴까. 아니다. 미국에서 ‘영예 비행(Honor Flight)’ 프로그램에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참전 용사들이 워싱턴 D.C. 전쟁 기념비를 방문해 군대 시절 기억과 전우들과 함께 경험을 나누게 했다. 노병들은 군대 시절 기억을 회복하고 자존심을 되찾았다고 한다. 치매 노인에게 청바지를 입게 하고 60~70년대 대중가요, 영화 등으로 청춘 시절 에너지와 자신감을 회복하게 해준 덕택에 건강을 회복했다는 사례도 있다.
그랬다. 전우들은 힘든 군대 시절을 긍정적인 감정으로 승화해 젊었을 때 에너지와 용기를 다시 찾았다. 맹호부대 출신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이 컸다. 같이 국난을 극복한 애국심이 아직도 철철 넘쳤다.
세상이 어지럽다. 혼란스럽다. 비상계엄령 발동으로 국민이 나라를 걱정하고 있다. 춥고 무서워 몸과 마음이 떨린다. TV, 신문을 보기가 두렵다. 이리저리 참담한 심정을 헤아릴 길이 없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지금 “조국이 부르면 맹호는 간다!”는 맹호부대 구호를 외친다. 강한 의지가 충만하다. 힘들게 지켜온 대한민국을 사수하리라. 전지훈련에 나갈 때 힘차게 외쳤던 “맹호출림(猛虎出林)”을 다시 외친다. 사나운 호랑이가 수풀 밖으로 나왔다. 많은 국민이 집에서 길거리로 나왔다. 국민이 맹호가 됐다. 나라를 망치고 있는 간사한 무리를 응징하러 나왔다. 젊은 여성 맹호들이 선봉장이 됐다. 논밭에 있는 트랙터를 몰고 농민들도 뛰쳐나왔다. 국민이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다. 국민이 이긴다. 맹호출림! 맹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