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대흥사 연리목
입력 : 2018. 11. 29(목) 15:26
가을은 '슬픈 계절'로 통한다. 슬픈 계절에 만나요, 가을을 남기고 떠난 사랑,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대중가요의 영향이 크다. 가을을 노래한 가수들의 목소리도 애달프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찾아간 곳은 해남 두륜산 대흥사다. 절집에는 늦게 시작된 단풍이 아직 머물러 있다. 올 가을 한반도의 마지막 단풍이다. 가을의 뒤태가 여전히 매혹적이다.계절 탓일까. 절집에서 유별나게 눈길을 끄는 게 연리목(連理木)이다. 정확히 말하면 뿌리가 붙어 있는 연리근(連理根)이다. 대웅보전으로 가는 길, 천불전 앞이다. 나이 500살로 추정되는 느티나무 두 그루의 뿌리가 만나서 하나가 됐다. 키가 무려 20m, 나무 둘레가 4.4m 가량 된다. 높이나 품세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보호수로 지정돼 있다.나무 아래에는 촛불이 타오르고 있다. 수많은 중생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밝혀놓은 촛불이다. 수능시험을 앞두고, 자녀들의 선전을 비는 학부모들의 마음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뿌리가 한데 붙은 나무가 행운을 가져다주고, 소원을 들어준다는 믿음을 깔고 있다.연리목은 서로 다른 나무의 가지나 뿌리가 붙어서 하나 된 것을 가리킨다. 그저 맞닿아 기대고 있는 것도 아니다. 태풍 같은 자연현상에 의해 부러지면서 드러난 속살까지 닿아야 한다.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세포조직까지 서로 붙는다. 오랜 시간과 햇볕, 바람에 의해 두 몸이 하나가 된다. 인고의 세월을 겪어야 가능한 일이다. 예부터 서로 붙은 나무를 귀하게 여긴 이유다. 비익조(比翼鳥)와 연리지(連理枝)를 합친 '비익연리(比翼連理)'에서 비롯됐다. 비익조는 눈과 날개가 하나뿐인 전설 속의 새다. 암수가 한데 어우러져야 양 옆을 제대로 보고, 날 수 있다. 연리지의 리(理)는 '결'을 뜻한다. 나뭇결이 연결된 가지를 일컫는다. 뿌리가 서로 다른 나무가 허공에서 만나 합쳐져 한몸을 이룬 나무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772~846)가 현종과 양귀비의 비련을 담아 지은 '장한가(長恨歌)'에서 나왔다. '땅에서 만난다면 연리지가 되기를 원한다(在地願爲連理枝)'는 구절이다. 두 남녀의 지극한 사랑에 빗대는 연유다. 정성껏 기도하면 인연이 맺어진다고 한다. 맺은 인연이 영원히 이어지기를 바라는 소망도 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천년사랑'이다. '사랑나무'로도 불린다.대흥사에서 소원을 들어주는 기도의 대상은 또 있다. 산정에 누워있는 비로자나 와불이다. 얼굴과 몸, 다리까지 확연한 비로자나불이 신통함으로 소망을 들어준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전라도 천년수'로 지정된, 만일암 터의 천년나무와 북암의 미륵불도 있다. 천년나무는 수령 1100년의 느티나무다. 북미륵불은 천년나무와 얽힌 천동과 천녀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대흥사의 역사도 깊다. 백제 때 창건됐다. 중건을 거듭하면서 교종과 선종을 아우르는 큰 도량이 됐다. 보물과 천연기념물 등 유물도 많이 보유하고 있다. 차로 유명한 일지암과 북미륵암, 진불암, 청신암 등 암자도 많다. 한국의 산지승원으로 선암사 등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예부터 대흥사는 장엄한 불교의식을 중시했다. 초의, 만해 등 13명의 대종사와 13명의 대강사를 배출했다. 시·서·화·차에 능했던 초의스님도 대흥사에 오래 머물렀다. 절집에 사천왕문도 없다. 천관산과 선은산, 달마산과 월출산이 동서남북에서 감싸며 보호하고 있어서다. 일찍이 서산대사는 '삼재가 미치지 못하고, 만 년 동안 훼손되지 않을 땅'이라고 했다. 대사는 묘향산에서 입적하며 의발(衣鉢, 가사와 공양 그릇)을 대흥사에 두라고 했다. 대흥사의 당우에 걸린 편액도 눈여겨볼 유물이다. 무량수각의 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다. 서산대사의 유품이 보관돼 있는 표충사 편액은 정조대왕이 썼다. 대웅보전과 천불전, 침계루는 동국진체를 완성한 원교 이광사의 글씨다. 가허루 편액은 창암 이삼만의 필체다.전해지는 일화도 재밌다. 당초 대웅보전에는 원교 이광사가 쓴 편액이 걸려 있었다. 1840년 제주도로 귀양 가던 추사 김정희가 친구 초의선사를 만나러 대흥사에 들렀다. 속된 말로 '이것도 글씨냐'고 핀잔을 주며 원교의 편액을 내리게 하고, 자신이 글씨를 써주었다. 무량수각의 편액도 그때 써줬다. 당시 이광사는 자연과 어우러진 자주적인 글씨, 동방의 진짜 글씨를 주창하며 동국진체를 완성한 서예가였다. 추사는 그 이전 명·청나라의 글씨를 선호했다. 창암도 추사한테 '시골에서 밥은 먹겠다'며 모욕을 당했다. 창암은 '글씨를 아는지 몰라도 묵향은 모르는 사람'이라며 분노하는 제자들을 달랬다. 8년여의 제주 유배에서 풀려난 추사는 한양으로 가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렀다. 유배 길에 써준 자신의 글씨를 떼고, 원교의 편액을 걸도록 했다. 그 사이 세상을 떠난 창암의 묘도 찾아 애도하며 묘비문을 남겼다.표충사 뒤에 대광명전에도 여행객들의 발길이 잦다. 초의선사가 유배 중인 추사의 방면을 빌며 지었다. 스님들의 참선 공간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젊은 날 7번방에서 1년 남짓 생활하며 사법고시를 준비했던 곳이다.대흥사의 늦가을 풍광도 호젓하다. 너푼너푼 떨어진 낙엽과 어우러진 숲이 한 폭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 매표소에서 절집까지 4㎞의 '십리숲길'이다. 아홉 굽이로 이어져 '구림구곡'이라 부르기도 한다. 숲길에서 만나는 경물도 애틋하다. 지금은 주차장으로 쓰이는, 예전 집단시설지구 자리는 80년 광주민중항쟁 때 시민군이 내려와서 묵었던 곳이다. 광주로 다시 올라가는 시민군에게 주민들이 김밥과 음료를 건네며 격려했다. 5·18사적지로 지정됐다.400년 묵은 전통 한옥여관 유선관은, 오래 전 절을 찾은 신도나 수도승들의 객사였다. 청태 낀 기왓장과 색깔 바랜 나무기둥이 고풍스런 옛집이다. 일주문을 지나서 만나는 부도와 탑비도 운치 있다. 보물로 지정된 서산대사의 부도 등 80여 기가 모여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청년시절 사법고시를 준비했던 선방도 여기에 있다. 동국선원의 7번 선방이다. 불자가 아니더라도 가끔 들러볼만한, 감흥이 느껴지는 절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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