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뜰 가에 서 있는 후박나무가 마지막 한 잎마저 떨쳐버리고 빈가지만 남았다. 바라보기에도 얼마나 홀가분하고 시원한지 모르겠다. 이따금 그 빈 가지에 박새와 산까치가 날아와 쉬어간다.(중략) 떨쳐버리고 빈 가지로 묵묵히 서 있는 나무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 자신도 떨쳐버릴 것이 없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법정스님 글 '버리고 떠나기' 중)
법정스님은 1932년 해남 우수영에서 홀어머니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목포상고를 졸업하고 전남대에 다니던 중 출가했다.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를 사회운동으로 승화시킨 스님으로 우리의 기억에 남아있다.
뜰 가의 후박나무는 생전의 법정스님이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나무다. 스님은 이 나무를 보며 사계절의 변화를 실감했다. 나무의 꽃이 연꽃처럼 하얗고 은은한 향기를 머금으면 완연한 봄이었다. 여름에는 나무 아래로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아름답고, 가을엔 잎사귀 떨어지는 소리가 정적을 깬다고 했다. 잎사귀를 다 떨군 겨울에는 청빈한 모습, 무소유의 모습이라고 표현했다. 스님은 다른 데에 나갔다가 돌아오면 '잘 있었냐?' 며 나무를 살포시 안아주기도 했다.
법정스님으로 인해 유명세를 탄 순천 송광사 불일암(佛日庵)의 후박나무 얘기다. 많은 사람들이 이 나무를 보며 법정스님을 떠올리는 이유다. 스님은 지금 생전의 소망대로 이 나무 아래에 모셔져 있다. 나무는 법정스님이 불일암을 지으면서 심었다고 한다. 스님은 이곳 암자에서 1975년부터 17년 동안 살았다. 스님의 속세 나이 43살~60살까지 인생의 황금기였다.
우리에게 후박나무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후박나무가 아니다. 후박나무는 사철 푸른 잎을 매달고 있는 상록활엽수다. 법정스님을 보듬고 있는 나무는 지금 이파리를 다 떨구고 없다. 향목련이다. '일본목련'으로도 불린다. 잎이 후박나무보다도 두세 배 크다. 하얀 꽃이 수줍은 새색시의 미소처럼 피는 봄이면 그윽한 향내를 머금는다. 꽃의 은은한 향이 불일암을 품은 산자락을 휘감는다. 가을에 이파리를 모두 떨군다.
불일암의 뜰을 지키고 선 이 나무가 법정스님의 글감으로 자주 등장했다. 스님이 후박나무라 썼다. 스님은 불일암에서 이 나무를 보며 '무소유'를 시작으로 '산방한담', '물소리 바람소리', '텅 빈 충만',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버리고 떠나기' 등 책을 썼다. 생전의 스님 표현을 빌리면, '밥값의 일부를 한다'는 마음으로 쓴 글이다.
뜨락의 나무 앞에는 나무의자가 하나 놓여 있다. 법정스님이 땔감으로 쓰는 장작으로 직접 만든 의자다. 조금은 조잡하게 생겼지만, 스님의 손때가 고스란히 묻어있다. 스님의 법문이 담긴 책갈피도 방문 기념품으로 놓여있다. 방문객들의 마른 목을 적셔주는 물도 주전자에 담겨 있다.
나무의자에 놓인 책갈피를 하나 집어 들면서도 법정스님의 법문이 떠오른다. '하나가 필요할 때는 하나만 가져야 한다. 둘을 갖게 되면 애초의 그 하나마저도 잃는다'는 얘기다. 법정스님의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닮고 싶어서였을 터다.
암자 마당에 배추가 심어진 채마밭이 보인다. 스님이 생전에 소유한 네 가지 가운데 하나다. 밭 한쪽에는 감나무가 서 있다. 필요한 만큼만 따고, 다른 생물들도 먹을 수 있도록 나머지를 그대로 뒀다. 겨울에 노루와 사슴, 토끼들도 함께 물을 마실 수 있도록 개울의 얼음까지 깨뒀다는 스님의 얘기 그대로다. 열반한 뒷모습까지도 소박한 법정스님의 얼굴이 그려진다.
불일암은 '무소유'의 산실이다. '무소유'는 법정스님을 상징하는 법문이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넘치는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라 했다. 스님은 법문대로 철저하게 무소유를 실천하며 무소유로 살다가 무소유로 갔다.
법정스님은 행복의 척도에 대해

정의를 내렸다. '행복의 척도는 필요한 것을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는가에 있지 않고,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나 있는가에 있다'고 했다. 부를 쫓고, 소유에 목적을 둔 우리에게 많은 울림을 준 법문이었다. 욕심 부리지 않는, 소탈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주문이었다. 아름다운 향기가 묻어나고, 비움의 미학을 가르쳐준 말씀이다. 올 한해도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곱씹으면 더 좋은 가르침이다.
맑고 향기로운 삶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게 하는 불일암은 순천 송광사에 딸린 암자다. 송광사 매표소를 지나 청량각 앞에서 왼편 계곡을 따라간다. 참나무 숲길과 삼나무·편백 숲길, 대나무 숲길을 지난다. 솔방솔방 걸어도 30분이면 닿는다. 이 길이 '무소유 길'로 이름 붙여져 있다. 생전의 법정스님이 자주 오가던 길이다. 스님이 입적한 뒤, 송광사와 순천시에서 다듬었다. 안내판과 스님의 법문을 팻말로 몇 개 세운 게 전부다. 스님의 마음가짐으로 숲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 새소리에 귀를 열고 걸으면 더 좋다. 숲길에서 만나는 스님의 법문도 반갑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이다. 행복은 결코 많고 큰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을 갖고도 고마워하고 만족할 줄 아는데 있다. 맑은 가난은 넘치는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내려놓는 것이고, 비움이고, 용서이고, 자비다.
금세 공감이 가는 법문이다. 갖은 번뇌가 사라지면서 마음까지 편안해진다. 여운도 길게 남는다. 대숲길 끄트머리에서 만나는 불일암도 내집처럼 편안하다. 대숲바람 서걱거리는 대숲터널 사이로 암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스님이 직접 짓고 생활한 작은 요사채와 해우소, 채마밭이 정겹다.
불일암을 보듬고 있는 송광사도 한국불교의 승맥을 잇는 절집이다. 삼보사찰 가운데 하나인 승보사찰이다. 통일신라 때 창건됐다. 고려 때 보조국사가 한국불교를 중흥시킨 정혜결사의 도량으로 삼았다. 효봉스님과 구산스님에서 법정스님까지 훌륭한 선승들의 흔적이 배어있다. 한국불교의 종갓집으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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