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식 투철했던 할아버지… 명예 되찾아 기뻐"
●신안 농민운동 현장을 가다||(7) 일제 모략 굴하지 않은 '지도'||연대 등 정신 깃든 지도 소작쟁의||나만성·이성지 등 청년 지식인 활약||"인정받지 못한 유공자 밝혀지길||존경스러워…자부심 갖고 살 것"
입력 : 2022. 09. 13(화) 17:32

지난 5일 만난 이성지 열사의 손자 이문주(오른쪽) 씨와 그의 증손자 이민성 씨.

신안군 북쪽 도서읍 지도. 섬의 지형이 '智(슬기·지혜 지)자 모양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 지도에서는 과거 많은 지식인들이 향교 등에서 교육을 받고 관리(官吏)로 등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도는 '소작쟁의'라는 항거의 역사를 간직한 민중의 섬이기도 하다. 1925년 발생한 '지도 소작쟁의'는 수많은 농민들의 피와 저항 정신으로 일궈졌다.

● 지도 소작쟁의의 전개

지도 소작쟁의는 암태도 소작쟁의 영향을 받았다. 암태도 소작인들은 투쟁을 통해 1924년 8월 논농사 소작료의 비율을 40%로 낮추는 데 성공했다. 이 성과는 신안군의 지도·도초도·자은도·하의도·매화도로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지도가 암태도 소작쟁의에 이어 곧장 항거에 나설 수 있었던 건, 사전에 '지도 소작인 공조회(공조회)'가 결성된 덕분이다. 1924년 1월, 김상수·나만성·이성지 등 지식인 청년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공조회는 '소작인의 결속과 일제·지주에 대항함'을 목적으로 했다.

지도 소작쟁의는 보리 수확철을 앞둔 1924년 6월, 소작인들이 보리 2000석에 대한 '불납 동맹'을 벌이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들은 지주들에게 '소작료를 4할로 낮추지 않는다면 수확한 보리를 건네 주지 않겠다'고 압박했다. 여기에 공조회는 지도면 사람들을 대상으로 '면민대회'를 개최하는 등 지주 압박에 힘을 보탰다.

그해 10월 조선인 지주들은 소작료 4할에 합의했다. 그러나 일본인 대지주 우치다·하시모토가 소작료 합의를 거절했고 더해서 지주 소작인 번영회(지주회)를 결성, 소작쟁의를 방해했다. 승리를 앞뒀던 소작쟁의가 해를 넘겨 계속되자 공조회는 지도의 사회단체 등과 연대해 마을별 소작단체인 '을축동맹'을 조직했다. 그렇게 1925년 2월4일 '송도을축동맹'을 시작으로 총 36개의 을축동맹이 결성된다.

이 과정에서 일제 경찰은 보안법 등을 내세우며 방해공작을 펼쳤다. 이는 지도 소작쟁의를 방해하기 위해 식민 권력까지 개입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을축동맹 이후 소작쟁의가 단결되자 지주회는 모략과 공권력을 동원했다. 일제 경찰은 나만성을 포함, 간부 9명을 체포했다. 그러나 간부들이 구속된 이후 소작쟁의는 더욱 거세지게 된다.

수백명의 소작인들은 소작료 인하요구가 받아들여질 때까지 추위와 주린 배를 무릅쓰고 투쟁하겠다는 '아사혈투'를 벌였다. 이런 소작인들의 결연한 의지를 버티지 못한 지도 지주들은 결국 1925년 3월27일 '소작료 4할'에 합의한다.

지도 소작쟁의는 단순한 생존권 투쟁을 넘어 '항일농민운동'의 하나로 평가할 수 있다. 겉으로는 '악덕지주'에 대항한 생존권 투쟁으로 보이지만, 실제 투쟁의 내용은 식민지 체제에 편승해 성장한 지주에 대한 투쟁이자, 식민권력과 유착한 지주에 대한 치열한 저항이었다.

故 이성지 열사 모습. 이문주씨 제공

● 지도 소작쟁의 전략가 '이성지'

지도 소작쟁의는 다른 섬과 달리, 근대교육을 배운 청년 지식인들이 주도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점이 있다. 이들은 주로 타지에서 교육을 받고 지도로 귀향, 사회단체 및 지도소작인공조회를 결성해 소작쟁의를 이끌었다.

그중 대표적 인물인 이성지(1902~1970) 열사는 지도 소작쟁의에서 전략가로 활동했다. 지난 5일 광주 북구 임동에서 만난 이 열사의 손자 이문주(65) 씨는 이 열사를 두고 "제갈량 같은 분이었다"고 평했다.

이씨는 "할머니에게 전해 듣기로 할아버지는 한글·한자를 모르는 소작인들을 대상으로 묘책을 제시해주는 등 쟁의를 진두지휘했다고 한다"며 "김상수·나만성과 같은 청년지식인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 순사에 끌려가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하니… 할아버지는 항거에 진실하고 투철한 사람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씨는 지난 2007년부터 지금까지 할아버지의 업적을 인정받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다. 그 결과 이 열사는 내년 3월께 신안군 농민운동기념사업회를 통해 항일 농민운동 독립유공자로서의 인정을 앞두고 있다.

이씨는 이날 만난 자리에서 '그간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고 말했다. 그는 선조의 진실을 인정받기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할아버지가 항일 운동의 주역이라는 사실' 때문이라고 했다.

이씨는 "할아버지는 소작쟁의 활동을 하다 목포경찰서에서 3개월 수감됐다. 그 사이 광주로 재판을 가는 등 절차 또한 굉장히 복잡했다고 한다"며 "어릴 적 기억으로 할아버지는 항상 모자를 쓰고 지도 내 향교에 다니셨다. 말도 없었고 매일 책만 읽는 등 쉽게 다가가기 힘든 분이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그러나 하나 확실히 기억나는 건 소작쟁의에서 간부로 역임했고 투쟁이 끝난 이후에도 소작회에서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항일 활동을 지속하셨다는 것이다"며 "이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나와 가족들만 알고 있었던 진실이었다. 할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는 데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이 기억 하나가 버틸 수 있게 했다. 이제라도 선조의 업적이 인정받게 돼 정말 다행이고 뿌듯하다"고 소회를 밝혔다.

이씨는 '할아버지 외에도 아직 밝혀지지 않은 유공자들이 많다'며 이들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더욱 많은 지원이 있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씨는 "보람 있는 일을 하고 간 할아버지의 역사는 혼자서 비롯된 게 아니다. 그 시기 을축동맹 등 매우 많은 사람이 (투쟁에) 함께 했다"며 "국가를 위해 헌신한 이들의 억울함과 명예로움은 오랜 시간이 지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국가·지자체에서 이들에 대한 관심과 지원에 더욱 협조줬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이날 함께 자리한 이 열사의 증손자 이민성(29) 씨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이성지… 이성지…'하고 되뇌이셨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가 최근 아버지께 모든 사실을 전해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며 "우리 가족 중 독립유공자가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할아버지가 너무 존경스럽다. 평생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겠다"고 다짐을 전했다.

※ 이 취재는 지역 신문 발전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故 이성지 열사 묘. 이문주 씨 제공

정성현 기자

jung@j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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