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향기·김강>아버지의 자리
김강 호남대 교수
입력 : 2024. 05. 07(화) 18:27
오늘 다시 어버이날이다. 이제는 달력에 빨간 날이 아닌 검정으로 표기된 아버지, 아니 어버이날이다. 절반인 어머니날에서 아버지를 생각해 어버이날로 고쳤다지만 점점 약화되는 아버지의 위상이 달력에도 비친 듯 언제부터인가 ‘검은 날’이 되었다.

시인 김현승은 ‘아버지의 마음’(1970)이란 시를 통해 아버지를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존재로 묘사한다. 전선에 앉은 참새의 마음처럼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버지라고 말한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라는 시행에서 가족에 대한 사랑과 희생을 강조한다. 권위적인 겉모습과는 달리 자신의 존재에 대한 허무감과 가족들에 대한 걱정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이 아버지의 실체라는 것이다. 당시 이 시는 가부장제 상황에서도 파격적인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박목월 시인도 ‘가정’(1968)이란 시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아버지의 의식을 토로한다.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 문반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이 시에는 가족을 위해 온갖 수모를 감수하면서도 자신의 존재는 하찮은 것으로 평가받는 것에 대한 아버지의 복합적인 심리가 스며있다.

지난 시절 아버지는 엄했지만 존경의 대상이었다. 기분 좋을 땐 헛기침으로, 겁이 날 땐 너털웃음을 짓는 모순적 존재였다. 아버지 마음은 마치 ‘썬팅’한 차 유리처럼 속을 쉽사리 드러내지 않았고 가족이 들여보기도 어려웠다. 서럽고 힘들어도 마땅한 울 곳이 없어 더 슬픈 사람이 아버지라는 것을 크면서 깨달았다. 아버지의 마음은 심연처럼 깊었고 그는 늘 높은 곳에 홀로 서 있었다.

그러나 먹고 살기 넉넉해진 지금에도 아버지의 자리는 찾기 어렵다. 오죽하면 “한겨울에도 아파트 베란다에 반딧불이가 살고 있어 밤마다 빨간불이 처량하게 깜박거린다”라는 우스갯소리까지 생겨났을까.

미국사를 잠깐 들여다보자. 개척시대 미국인은 사나운 자연의 극복, 적대적 인디언을 비롯한 인간끼리의 투쟁 등 모든 생존의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고 해결했기에 자기신뢰 혹은 독립독행의 자세를 쌓았다. 그것에 기초하여 미국의 전통가치 중 하나인 개인주의가 형성됐다. 직접 책임지며 타인의 구속을 거부하는 개인주의 정신은 ‘개인적 영역’에 대한 강한 의식을 부여했다. 이는 미국인들에게 개인 각자가 특정한 공간을 소유할 수 있다는 권리를 보장했다.

자녀의 방이 따로 있고, 부엌은 주부의 공간이다. 아버지 역시 거실에 본인이 애용하는 특별한 가구를 놓거나 혹은 지하실 창고나 차고에 자신의 작업실을 차린다. 미국영화에서 자녀와 갈등에 지치거나 부인과 언쟁에 피곤한 아버지들이 맥주 한 병 꺼내 들고 심란한 마음을 달래는 곳이 바로 그런 장소다. 친구를 불러 바비큐를 하고 그동안 틈틈이 장만하여 광나게 닦아놓은 비장의 무기들, 자동차 수리연장, 주택보수 장비, 잔디 깎기 최신기계 등을 은연중에 자랑하는 곳도 차고 앞이다. 미국 아버지들은 번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자신들의 영혼을 위로할 수 있는 특정한 공간을 집안에 확보한 셈이다.

반면에 우리의 아버지는 어떤 형편인가. 비약적인 경제발전으로 물질주의와 금권만능주의가 팽배하니 아버지의 역할이 갈수록 힘들다. 예전이면 해묵은 가방에 도시락을 담아 들고 일터에 나서는 아버지의 우직함과 매일의 수고에 대해서 한없는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지녔다.

하지만 요새 아이들은 아버지의 차종이 무엇인지, 아파트가 얼마인지, 고가 스마트폰이나 고성능 전자제품을 얼마나 빨리 자주 사줄 수 있는지에 따라 아버지의 가격을 ‘흥정’한다. 또한 부인은 간혹 남편의 연봉과 자녀교육 액수에 따라 집안 무드와 서비스가 달라진다.

아버지는 집에서도 마음 편히 쉴 곳이 마땅치 않다. 부엌은 여전히 부인의 공간이며 TV 광고는 연일 최고급 주방기기와 생활 편의를 강요한다. 자녀들은 각자의 방에서 아버지가 부재한 ‘가상현실’에 틀어박혀 지내고, 거실마저도 가족회관이지 아버지의 전용 자리는 결코 아니다. 옛날에는 사랑방이라도 있었지만, 요새는 주택 구조상 어림없는 사치다. 갈 데라고는 결국 베란다뿐이다.

지금 아버지의 역할과 가치가 확실히 변하는 중이다. 역설적이지만, 유교적 교육 프레임이 붕괴하면서 아버지의 자리를 보전할 부인과 자식의 보호막이 사라진 것이다. 아내와 함께 육아와 가사를 분담하고, 아이들의 ‘베프’는 당연한 사명이다. ‘굿 파더’를 위한 모임이 번성하고, 언론은 앞다퉈 ‘좋은 아빠 10계명’을 선포한다. 직장에서는 남보다 앞서기 위해 당면한 굴욕을 참아야 하고 심신이 괴로운 마당에 주말에는 가족 나들이에 앞장서며, 시류의 ‘선동’에 따라 때로는 ‘일요일엔 짜빠구리’도 요리한다. 그야말로 ‘아빠 가제트’가 대세다.

아버지라는 존재가 시대의 입맛에 따라 변한다지만 역시 그는 고산의 큰 바위마냥 듬직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물화적 욕망이 넘실대는 현실 앞에서 하릴없이 무력해지는 것은 아버지 마음인 것만 같아 가슴이 시리다. 이제 또 어디로 나서야 할까.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하필 공존하는 가정의 달 5월, 어머니는 우리가 죽기 전까지 마음속 못내 사무친 대상이지만 아버지는 그저 한적한 산중 무덤 속에 고독히 남겨진다.

어머니날에 함께 묻어가지만 어쨌거나 어버이날 만세! 금지옥엽처럼 키운 자식들이 단 몇 초라도 부모의 마음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그 찰나의 순간을 느낄 수만 있다면 더없이 감사하고 고마운 명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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