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기경결해, 한국예술 구조론
입력 : 2024. 11. 21(목) 17:58
현재 판소리 장단은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세마치, 엇모리, 휘모리, 엇중모리 정도가 사용된다. 판소리의 장단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신재효(1812~1884)의 <광대가>에는 진양조와 중머리의 두 가지 장단이 등장할 뿐이다. 현존하는 창본 중 장단 명칭이 사용된 것 가운데 가장 시기가 오래된 허흥식 소장 <심청가> 창본에는 진양, 중머리, 엇모리, 우조, 평장단, 진장단, 세마치, 삼궁져비, 삼궁졔, 후탄 등이 사용되고 있다. 현재 사용하지 않는 장단 명칭들이 보인다. 1920년대 <대한일보>에 연재되었던 심정순의 창본이나 이선유의 <오가전집>(1933), 정노식의 조선창극사(1940)도 유사하다. 김혜정이 집필한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의 설명이다. 현재 판소리에서 사용하고 있는 장단의 완성이 불과 일제강점기 정도라는 의미다. ‘머리’와 ‘모리’의 변화도 주목된다. 김혜정은 ‘판소리 장단의 형성과 오성삼의 고법이론’(2004)이란 논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성삼이 정리한 것으로 알려진 진양조 24박론, 음양절기설, 기경결해의 생사맥은 현재까지의 고법이론 가운데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으로, 음악을 한 단계 발전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오성삼의 고법 실기와 이론은 많은 제자들을 통해 퍼져나갔다(중략). 특히 그들이 전남을 중심으로 하는 고법의 흐름을 주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주목한다. 첫째는 남도의 소리 문법(전라도 말)으로 된 판소리가 불과 100여 년 전에 전통음악 중 성악 분야를 장악하게 된 내력이다. 이 얘기를 하기 위해서는 충청도 중심의 ‘중고제’를 먼저 거론해야 하는데, 할 말이 많으므로 따로 풀어 설명한다. 둘째는 판소리와 함께 밀고 당기며 발전해온 장단(長短) 또한 남도의 음악 문법에 의해 장악되었다는 점이다. 그 중심에 오성삼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위 논문의 요지다. 우리 음악의 구조론이라고나 할까. 그 핵심이 기경결해(起景結解)다. 이것은 판소리뿐만 아니라, 무속음악, 무용 등 우리 음악 예술 전반에 걸쳐 적용할 수 있는 이론이다. 나는 한발 더 나아가 미술, 문학 등 우리 예술 전반에 대입하여 이를 설명해왔다.



기경결해(起景結解), 밀고 달고 맺고 풀기



흔히 문학의 서사구조로 기승전결(起承轉結)을 얘기한다. 기경정결, 기승전락, 기승전합 등으로도 불리며 시작-전개-전환-끝맺음의 구조로 풀이된다. 기경결해 이론은 이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결이 다르다. 결(結)로 마치는 것이 아니라 해(解)로 마치기 때문이다. 밀고(起) 달고(景) 맺고(結) 풀기(解)라고 한다. 다른 말로 춘-하-추-동이다. 봄에 씨앗을 심고(春) 여름에 가꾸어(夏) 가을에 수확(秋)하고 겨울에 풀어낸다(冬)는 의미다. 우리 국악의 기본 형식인 만중삭(慢中數)이론과도 결이 다르다. 만중삭은 속도가 느린 음악으로 시작하여 중간 빠르기로 진행하고 다시 더 빠르게 연주하는 형식을 말한다. 본래 우리 음악인 향악(鄕樂)의 형식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기경결해는 느리게 시작하여 빠르게 이행하더라도 마지막에 반드시 느린 곡으로 풀어주는 형식을 취한다. 기승전결이 직선적 구조이론이라면 기경결해는 순환적 혹은 원형적 구조이론이다. 우리 전통춤의 전개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전통춤은 느리게 시작하여 중간 빠르기로 전개하고 더욱 빠른 춤으로 이행하지만 마지막에는 반드시 느린 장단으로 풀어서 끝을 맺는다. 이 구조는 이야기를 짓는 방식 곧 문학적 서사에서도 드러난다. 시(詩)가 곧 노래(歌)라는 점에서 예술적 본질은 다르지 않다. 나는 지난 7월에 개최하였던 판소리학회 제104차 정기학술대회 ‘창작판소리와 임진택 소리 50년’ 기조 발제에서 <소리내력>의 장단을 톺아본 바 있다. 예컨대 1978년 소리내력 연행에서는 강독조, 타령조, 자진모리, 선고조, 창조, 탄식조, 웅변조 등의 장단 이름이 등장한다. 지금 사용하는 장단 이름과 전혀 다르다. 이것은 이야기를 노래로 하는 기술 즉 말붙임새를 구성하는 리듬의 묶음이 곧 장단이라는 의미다. 이것이 장차 기경결해 등의 장단 이론으로 이행하게 된다. 이용식은 ‘진도 예인 박병천 음악 세계에 관한 탐구’라는 논문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진도북춤의 굿거리가 기경결해의 완전한 구조를 갖는 것은 박병천이 진도북춤을 짜면서 북의 신성성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는 북이 인간과 신의 중간 매개 역할을 해주는 악기로서, 북을 들고 추는 춤은 단순한 춤이 아니라 북소리를 통해 인간의 만복을 기원하는 철학적 사상을 구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정의한다. “북춤의 신성성은 기경결해라는 전통음악의 구조를 음악적, 무용적으로 구현하는 소리짓이요 몸짓이다.” 기경결해 구조가 전통음악의 철학이라는 주장이다. 물론 언제부터 이 철학이 구성되었으며 연주되었는지 관련 연구는 아직 없다. 앞서 거론한 오성삼의 판소리 장단론이나 이야기를 노래로 풀어 말하는 임진택의 경우가 그 흔적을 말해줄 따름이다. 그럼에도 내가 기경결해론을 한국예술의 구조론으로 확대하여 설명해온 이유는 판소리 장단이나 춤 장단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예술의 결론이 ‘풀이’로 구조화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예컨대 무속굿의 목적은 ‘풀어냄’에 있다. 액풀이, 살풀이, 뜻풀이, 넋풀이 고풀이 등 용례가 너무나 광범위하다. 심지어 산수 문제에 답하는 것도 ‘풀이’이니 이 부분은 따로 지면을 할애하여 소개하기로 한다. 다만 짚어둘 것은, 연주든 춤 연행이든 그것의 지향이 ‘풀이’에 있음을 주목하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우리 문화 전반에 걸쳐 밀고 달고 맺고 풀기의 기경결해 구조가 갖는 의미를 어찌 크게 톺아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 이런 생각은 이미 민화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미술 분석에도 깊이 닿아 있고 발효를 중심으로 하는 우리 음식에도 맞닿아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렇다. 우리 문화는 그리고 우리 예술은 ‘풀이’를 지향한다. 풀이가 목표이고 풀이가 결론이다. 그래서 기경결해론이 중요하다.



남도인문학팁

이보형이 기록한 오성삼의 기경결해(起景結解) 구조론

일주일 전 국악학자 이보형 선생이 돌아가셨다. 우리시대의 마지막 풍류객이라 할 만큼 판소리나 고음반 연구에 독보적인 존재였다. 내가 한국민요학회 총무로 있을 적에 그이와 여러 네트워크를 가진 바 있다. 타계를 애도하며 그의 업적을 기린다. 그가 남긴 ‘호남지방 토속예능조사 판소리 기법(1977년)’이라는 글을 인용하여 오성삼의 기경결해 내력을 새겨둔다. “오성삼은 낙안에서 태어나서 고흥으로 이사해 살았다. 명창 김연수에 의하면 그는 북뿐만 아니라 각종 악기에 능통했다. 진양조 장단을 4각 24박으로 치는데 그 맺고 푸는 것을 기경결해라고 했다. 이 말은 한시(漢詩) 기승전결(起承轉結) 이론에서 나온 것으로 판소리 진양조 장단에서 셋째각에서 맺기 때문에 결(結)이라 하고 넷째 각에서 풀기 때문에 해(解)라고 고쳤다. 김명환에 의하면 송만갑, 이동백, 정재근, 유성준의 소리에 북을 쳤고 실기에도 뛰어나고 이론에도 밝았다.” 그가 세운 북치기 이론에 영향을 받아 김명환의 고법(鼓法)이란 작명이 나왔다고 생각된다. 특히 진양조를 24박으로 쳐야 한다는 동초 김연수의 고법 이론도 오성삼에게 의지하는 바 크다.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기경결해 구조론이 등장한 지 채 1세기도 지나지 않았지만 그 내재적 구조는 우리 문화와 예술의 뼈대일 수 있다는 점이다. 결(結)로 끝맺지 않고 풀어냄(解)으로 끝맺는다는 서사적 맥락이 간단치 않다. 어쩌면 K-문화의 본질을 꿰뚫을 수 있다. 판소리와 산조뿐 아니라 전통춤, 무속의례를 포함한 문학, 미술 등 문화 전반에서 이를 읽어내는 작업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우선은 나 자신을 좀 더 채근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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