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역사 속으로 사라진 '말 달리는 목장'
397)우리나라 마지막 국영 목장, 진도 지력산(智力山)
입력 : 2024. 05. 30(목) 16:08
미수 허목이 그린 진도목장(1678). 변남주 교수 제공
“산곡(山谷)에 금수를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놓고 말을 기르는 곳을 이름하여 거(阹)라고 한다.” <<동국문헌비고>>에 나오는 내용이다. 국어사전에서는 ‘일정한 시설을 갖추어 소나 말, 양 따위를 놓아 기르던 곳’이라고 풀이해두었다. 이 목장을 국가에서 관리하면 국영 목장, 개인이 관리하면 사영 목장이라 한다. 우리역사넷의 설명에 따르면 조선시대 목장은 고려시대부터 전하는 목장을 재건하는 한편으로 수초가 좋은 곳에 발달했다. 사육되는 목축류도 말, 소를 비롯해 양, 돼지, 염소, 노루, 고라니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그 가운데 말 목장이 가장 발달하여 전체 목장의 90%를 차지한다. 대개 국영목장이라 하면 말 목장이라는 뜻이다. 말 목장의 수는 <<세종실록지리지>>에 58개소, <<동국여지승람>> 산천조에 87개소, <<반계수록>>에 123개소, <<대동여지도>>에 114개소, <<증보문헌비고>>에 171개소 등이 전한다. 전라도가 약 43.9%로 가장 많고 경기도 경상도의 순으로 분포하였다. 전라, 경기, 경상 3도에 전체의 약 72%의 목장이 있었고 제주도에 15개소가 있었다. 이 중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국영으로 운영되었던 목장이 진도군 지산면에 있던 목장이다. 기록에는 지력산(智力山), 남도포(南桃浦)로 나온다. 수년 전 내가 책임자로 연구진들과 함께 진도군 읍면 중 하나인 『지산면지』를 쓰면서 제목보다 큰 활자로 새겼던 카피가 ‘말 달리던 목장’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신라 문무왕 시절부터 목장이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명칭을 ‘거(?)’라고 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왕실용 목장을 ‘속내소(屬內所)’라 하였다. 당시 속내소를 비롯한 관영목장과 귀족, 고관들의 사유목장이 많이 있었다고 추측하고 있다. 고려 중기에 들어오면서 말 생산의 중요성이 더욱 커져 목장의 건설이 서남해 도서지방으로 확산되었다.



진도 목장 유산의 흔적과 역사, 진도군 지산면 관마리의 관마청



며칠 전 ‘진도학회’ 주관으로 목장 관련 학술포럼이 열렸다. 국영목장 관련 관마청과 예술인 단체였던 신청에 대한 것이 주요 내용이었는데, 목장 관련으로는 국민대학교 변남주 교수가 획기적인 발표를 하였다. 나는 진도학회 회장으로 이 포럼을 주관한 입장이긴 하지만, 발표 내용이 귀하다 싶어 여기 인용해두고 공유하기로 한다. 마정(馬政)은 고대부터 교통·군사·축산·외교상의 필요로 크게 중시되었다. 『예기(禮記)』에서 ‘나라의 부를 물으면 목마의 수효로 대답한다.’라고 할 만큼, 전통시대 목마는 국가의 부강을 평가하는 요소였다. 전국 각지에 목장이 설치되어 말 외에도 소〔牛〕, 노새〔驢〕, 당나귀〔?〕, 낙타(駱駝)도 길렀다. 여기에 따른 갖가지 시설과 제도 및 관원이 생겼다. 고려 때 목장(牧場)을 설치한 것은 내륙과 섬 10곳이다. 황해도의 황주(黃州), 통주(洞州), 백주(白州), 개성(開城), 강음(江陰) 정주(貞州) 경기도의 견주(見州), 광주(廣州), 충청도의 청주(淸州)이고, 탐라(耽羅)에는 원나라 간섭기인 충렬왕 13년(1287)에 자축별감(滋畜別監)을 두어 목축을 하였다. 섬말〔島馬〕 중에는 탐라(耽羅)에서 나는 것이 가장 많았다. 감목관(監牧官)은 조선시대에 국영 목장을 관할하며 말의 번식·개량·관리·조달 등을 수행한 관직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408년(태종 8)에 제주도에 감목관을 두어 고려시대의 말 관리 제도를 개선하라고 한 기사가 있다(『태종실록』 8년 1월 3일). 15세기 중앙 정부는 진도를 비롯한 전라도 서남해 도서 연안 지역에 목장을 설치하였다. 당시 서남해 도서 연안 지역에 설치된 목장은 총 34개소이다. 나주(9)·진도(6)·고흥(5)·무안(3)·해남(3)·강진(3)·장흥(2)·영암(1)·순천(1)·영광(1) 순이다. 특히 나주와 진도에 목장이 가장 많이 개설되어있는 것이 주목된다. 조선시대 각 목장의 감목관이 때로는 전임관, 때로는 수령이 겸임해 목장의 관리, 마필 사양과 번식 및 목자의 보호에 힘썼다. 1426년(세종 8)에 각 도의 목장 소재지에 전임의 감목관을 두었다. 그 뒤 목장 부근에 있는 역승(驛丞)과 염장관(鹽場官) 가운데 6품 이상의 관원을 뽑아 겸임케 하였다. 전임 감목관은 주로 무과 출신자와 중인층에서 임용되었다. 각 도의 목장에서는 암말 100필과 수말 15필을 1군(群)으로 편성하였다. 1군마다 군두 1명, 군부 2명, 목자 4명을 배치하여 말을 관리하게 하였다. 이들은 매년 85필 이상을 번식시키는 임무를 지녔다. 진도군 지산면 관마마을의 지명은 ‘말을 관리하는 마을’이란 뜻이다. 조선 전기에는 관마마을에 점마가 머물렀던 점마관(點馬館)이 있었다. 1628년 이후 진도목장에는 감목관 관아가 30여 년간 설치되어 운영되다가 해남현 화원으로 이거 되었다. 대신 관마마을에는 지력산 목장의 말을 관리하는 관청이 있었는데, 이를 ‘관마청’이라 했다고 전한다. 1757∼1765년에 발간된 『호구총수』에 의하면 목장면 전체 호수는 667호에 인구 2,373명(남 1,061 여 1,312) 이었다. 당시 관마마을 이름은 ‘관마청리(觀馬廳里)’라 하였다. 이로 보아 관마청(觀馬廳)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목장에는 말의 무병과 번식을 기원하는 마사단(馬社壇)을 설치하였으므로 관마리에도 있었을 것이다. 바로 옆 마을인 지산면 인지리에는 몇 개의 감목관비가 전하는데, 모두 조선 말기의 것들이다. 감목관 금용돌(金鏞突)(1861), 도호부방어사겸감목관 이후근(李候根)(1870), 감목관 송휘로(宋徽老)(1888), 감목관 민후영(閔候泳)(1894)의 것이 그것이다. 이중 송휘로는 해남 화원소재지에도 건립되었다.



남도인문학팁

16세기 관마 마을의 관청명은 점마관(點馬館)이었다.

이번 학술포럼에서 변남주 교수의 발표가 특별하였던 것은, 진도군 지산면 관마리의 관마청이 우리나라 마지막 국영 목장이었다는 점이다. 말이나 목장을 거론할 때 흔히 제주도를 생각하게 되는데, 차제에 진도지역 국영목장의 존재도 함께 거론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다시 생각하게 해주었다. 우리나라는 중국 제도를 본떠서 모든 도에 감목관(監牧官)을 두고 때때로 사복시에서 임시관원을 파견하여 말을 점검하고 그 수효를 기록하게 하였다. 이때 파견한 임시관원을 ‘점마(點馬)’라 한다. 이칭으로 점마별감(點馬別監), 점마차사원(點馬差使員), 점마사(點馬使), 점마관(點馬官)라고도 한다. 점마는 보통 춘추로 목장에 파견되지만 한해나 흉년과 같은 자연재해에는 말을 모는 부역으로 농사에 방해나 민폐가 우려될 때는 파견하지 않기도 하였다. 백담(栢潭) 구봉령(具鳳齡 1526~1586)의 시문집을 보면, ‘사정봉은 지력산 장내에 있고 점마관의 서남에 있다(駟精峯 智歷山 場內 點馬館 西南 有峯奇秀)’고 했다. 따라서 관마청의 정확한 표기는 ‘점마관(點馬館)’이다. 구봉령은 1583년(선조 16) 전라도관찰사를 지낼 때 지력산 목장에 와서 전거의 시를 지었다. 관마마을 서남쪽에 기이하고 수려한 암벽 봉우리가 있는데 이를 사정봉이라 한 것이 분명하다. 관마리 주민들은 ‘서당꼭대기’라 칭하는 곳으로 추정된다. 인근 사람들은 ‘부엉산’이라 칭하는데 지산면 소재지인 인지리와 접해 있다. 백담은 1574년과 1583년 두 차례 전라감사로 임명받았다. 16세기 중앙에서 파견된 점마들은 점마관이라는 관아에서 업무를 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점마관 위치는 관마리 마을이지만 관련 비석들이 인지리(독치리)에 있는 점과 모종의 연관이 있어 보인다. 귀한 발표를 공유할 수 있게 해준 변남주 교수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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