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간절한 민주의 새벽이 오길’… 망자를 위한 진혼곡
394)김대성의 교향시 ‘민주’
김대성은 말한다. “망월동에서 본 묘비문 ‘민주주의의 신새벽으로 부활하여라’에서 작품의 영감을 얻었다. 진정한 민주주의의 새벽이 시작되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마음으로 이 곡을 썼다.”
입력 : 2024. 05. 16(목) 17:44
2018년 김대성 작곡 연주회 포스터-광주문화재단
익숙한 멜로디인 듯 낯선 멜로디인 듯 일련의 선율이 흐르기 시작한다. 어떤 물체가 안개 속으로 어렴풋하게 보이는 풍경이다. 대칭의 음들이 서로를 휘감아 짓이긴다. 음들의 교접이 괴기스럽다. 국악 장단으로 치면 음양의 균열이 심하다. 이른바 ‘물리는 장단’, ‘물리는 선율’, 허튼 선율이다. 선명하지 못한 선율들이 드러내는 것은 불안, 초조, 압박의 감정이다. 아니 분노의 감정이다. 혹은 슬픔의 감정이다. 파동들이 알갱이로 바뀌어 내 머리를 친다. 아니 어쩌면 윌리암텔의 활이 아들의 머리에 올려놓은 사과를 겨냥하고 있는 풍경이다. 메시지가 뚜렷하지 않은 서사, 협화를 훼방하는 불명확한 시퀀스의 파동, 전체 서사의 ‘내드름’이 이러하니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움츠린 소릿길을 한참 지나서야 낯익은 선율 하나가 잡힌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손에 잡힌 시퀀스를 따라잡는다. 이내 선율들이 흩어졌다 모으기를 반복한다. 이야기가 급박해 진다. 말발굽 소리 같기도 하고 군화 소리 같기도 한 탁음들이 배치된다. 탁탁 내딛는 소리, 밀리거나 도망가는 분주한 소리, 옛 전남도청과 금남로와 충장로의 샛길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호흡을 따라가지 못할 만큼 벅차게 끌어올린 정점에서 음악이 일시 정지한다. 적막이 흐른다. 활대를 최대한 잡아당겨 화살을 쏜 바로 그 순간이다. 날아가는 화살이 적중할 곳은 어디인가? 고도의 긴장감이 흐르는데 플루트(초연에는 대금이 쓰였다)의 성음이 흐른다. 오케스트라의 장엄도 수백 명 합창도 정적 후의 단선율에는 비하지 못한다. 굉음보다는 적막이, 연설보다는 말 없음이 주목을 이끌듯, 미세한 선율이 오히려 전체 음악을 압도한다. 사과를 인 아들이 살아난 것일까? 비로소 음들이 안정을 찾기 시작한다. 얼핏 스치는 선율, 민요 ‘파랑새’가 머리를 내밀다 사라진다. 아니 시퀀스에 포획된다. 후반부, 음들이 안정될수록 이야기가 많아지는 것은 전체 서사에 자신감이 생겼다는 뜻이다. 박진감 넘치는 선율과 리듬이 한곳을 지향한다. 작곡가 김대성은 말한다. ‘빼앗기고 싶지 않은 아름다운 민주의 새벽’을 노래하고 싶었다고. 내 방식으로 말하면 공명(共鳴)이다. 가락을 흩뜨렸던(散) 것은 이 울림(調)에 이르기 위한 여정, 항쟁 이후 불혹에 이르렀던 알아차림이었던 모양이다.



황호준, 윤이상의 ‘광주’에서 김대성의 ‘민주’까지



음악이 한 폭의 그림이라면, 2018년 광주문화재단 위촉곡, 김대성의 교성곡 ‘민주’를 내 나름대로 한 장의 캔버스에 그려봤다. 초연 이후, 합창을 뺀 관현악을 위한 곡으로 편곡되어 자주 연주된 곡이다. 광주시향의 초연부터 다양한 연주들이 있지만, 독일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연주를 참고하니 소릿길이 보다 선명하다. 가사 없는 편이 상상의 폭을 더 넓혀준다. 김대성은 말한다. “김남주 시인의 시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월의 싸움은’ 등을 비롯해 망월동에서 본 묘비문 ‘민주주의의 신새벽으로 부활하여라’에서 작품의 영감을 얻었다. 진정한 민주주의의 새벽이 시작되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마음으로 이 곡을 썼다.” 합창곡에는 ‘달이여 피 묻은 오월의 달이여’, ‘열두 겹 포근히 즈려밟고 오소서’ 등의 노랫말이 등장한다. ‘민주주의 신새벽으로 부활하여라’로 맺는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대상으로 한 번안곡(飜案曲)이기도 하다. 끄집어내다가 미끄러지고 가지런히 하다가 흐트러뜨리며 반복 변주하는 구절이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다. 또 이렇게 말한다. “망월동 묘지에서 펑펑 통곡도 했다. 그러나 나에게 다가오는 것은 부끄러움과 능력의 부족함에 대한 자각이었다. 이 곡을 쓰는 내내 난 망자와 산자들의 원한과 분노를 담아내고자 했다. 그들의 원혼을 부르고 그들의 아픔을 산자들 앞에 다시 깨어나게 하고 싶었다.” 관현악곡이긴 하지만 사실상의 진혼음악이자 씻김 음악이라는 고백이다. 당시 광주문화재단 위촉곡으로 김대성뿐 아니라 황호준의 곡도 초연되었다. 기회가 되면 다시 풀어쓰겠지만, 김대성 곡의 특성을 말하기 위해 견주어본다. 황호준의 곡이 서정적이라면 김대성의 곡은 서사적이다. 황호준의 곡이 조선백자라면 김대성의 곡은 분청사기에 가깝다. 맨흙의 질감이 그대로 살아있다. 거칠고 투박하다. 거친 빗자루로 쓸어내린 귀얄의 문양을 닮았다. 덤벙 담갔다가 꺼낸 안료를 닮았다. 황호준의 곡이 백색 저고리 치마, 남도의 씻김굿을 닮았다면 김대성의 곡은 강신무의 타살군웅굿을 닮았다. 1981년 윤이상의 ‘광주여 영원히’의 질감에 가깝다. 날 선 작두에 올라탄 황해도 무당의 몸짓이 윤이상의 곡들을 에워싼 풍경이란 점에서 그렇다. 삼라만상 산천초목 들고 일어나 두 주먹 불끈 쥐고 포효하는 음들의 직조들, 낱개의 음들이 날카로운 파동으로 흩트려 보듬어 비로소 한 폭의 모시 옷감을 직조한다. 5·18민중항쟁 44주년을 맞아 김대성의 곡 ‘민주’를 다시 듣기 하며 떠오르는 감상들이 대개 이러하다.



남도인문학팁

작곡가 김대성에게 거는 기대

이 글을 쓰기 위해 김대성의 곡들을 두서없이 여러 편 들었다. 바이올린, 피아노, 가야금, 대금, 양악기와 국악기를 넘나든다. 그중 <생황협주곡>이 인상적이다. 김대성은 “나의 자화상과 같은 곡으로 꿈과 현실의 갈등 그리고 봉황의 날갯짓”이라고 했다. 피아노 반주는 마치 판소리의 소리북과 같다. 가야금은 술대로 내리치는 거문고 같다. 술대를 품은 가야금, 북채를 쥔 피아노, 여러 카피가 내 머리를 휘젓는다. 시나위로 치면 서로의 악기들에 애드리브를 주는 격이다. 생황의 찢어질 듯한 굉음들이 지나간 자리를 또 다른 음들이 안착한다. 봉황은 끊임없이 날아오르고 솟아오르기를 반복한다. 관현악곡 ‘민주’가 또한 그러하다. 내드름을 끊임없이 반복하지만 차마 제대로 날아오르지 못하는 풍경, 불협화음들이 드러내는 것은 작곡가의 어떤 두려움, 상실과 좌절이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산화했던 오월 영령들을 차마 끄집어내지 못하는 풍경이다. 그래서 음들은 끊임없이 뭉개지고 흩어진다. 가지런하지 못한 내드름의 선율을 중반에 도입된 휴지 지점을 지나서야 알아차릴 수 있다. 광주의 오월을 오역하지 않기 위해, 왜곡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비틀어지고 넘어지고 일어섰던 것, 허튼 풍경으로 시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들의 머리 위에 놓은 사과를 쏘아야 하는 윌리암텔의 운명 같은 것, 바들바들 떨리는 손과 굳은 오금을 간신히 굽히는 굴신, 긴장, 관현악곡 ‘민주’의 전반적인 풍경을 나는 그리 읽었다. 연주 중간의 휴지와 적막이 내게는 백미 같은 것이었다. 곡의 후반부는 선율들이 비로소 자신감을 얻는다. 장엄하고 당차게 시퀀스를 변주한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를 약속하기에 이른다. 얼핏 비친 민요 ‘파랑새’ 선율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우연한 삽입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김대성이 한국 작곡가 중 누구보다 열심히 곡을 쓰고 민요를 채집하며 현장을 답사한다는 점 때문일까. 관현악곡 ‘민주’는 광주와 남도의 리토르넬르로 시작하였다. 김대성의 포지션과 지향을 보니 ‘민주’의 재영토화가 보인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 동학으로, 백제로, 아니 그 이전의 마한으로 재영토화를 시도하는 이미저리, 김대성에게 주문하고 싶다. 이제 남도의 마음을 직조해보라. 거슬러 올라 마한의 마음을 그려보라. 청룡 갑진년 광주민중항쟁 44주년, 다시 듣기 한 곡 ‘민주’의 시퀀스가 또 다른 리토르넬로를 변주하게 될 날을 기다린다. 윤이상 이후 참 좋은 작곡가를 우리 곁에 두게 되어 기쁘다.



이윤선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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