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이윤선의 남도인문학> 내가 의지하는 모든 것들은 나의 지팡이다
369)지팡이
“인간은 모두 장애를 가진 존재다. 서로 의지하고 기대지 않으면 쓰러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보이는 장애와 보이지 않는 장애가 있을 뿐이다. 보이는 장애보다 심각한 것은 보이지 않는 장애다.”
“인간은 모두 장애를 가진 존재다. 서로 의지하고 기대지 않으면 쓰러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보이는 장애와 보이지 않는 장애가 있을 뿐이다. 보이는 장애보다 심각한 것은 보이지 않는 장애다.”
입력 : 2023. 11. 02(목) 12:59
제12회 장애인국악공연, 2022년 사람사랑 주최, 남도소리울림터. 필자 제공
판소리 <심청가> 중 어미 잃은 심청이를 안고 동냥젖 얻어 먹이는 장면에 지팡이가 등장한다. 영화나 연극 따위의 풍경을 고려한다면, 지팡이 짚고 더듬거리는 이 장면이야말로 ‘프롤로그’에 해당한다. 누군가 심청가를 영화나 음악으로 재구성할 때는 참고해도 좋겠다. 서사의 얼개로 본다면 심청이가 첫 이레를 지나지 않은 점을 주목해야 한다. 대문에 걸어둔 금줄을 세이레 지나고 나서야 걷어내는 이유가 있다. 모친의 죽음과 심청의 출생은 ‘죽고 살고’라는 사건의 배치라는 점에서 내가 늘 주목하는 방식이고 장면이다. 이야기의 전개에서 심학규는 늘 지팡이를 들고 나선다.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노래 곳곳에 지팡이가 출현하는 것은 이것이 가장 중요한 미장센이라는 뜻이다. 길을 갈 때는 앞잡이가 되어주고 목욕할 때는 옷을 눌러놓는 도구가 되며 춤을 출 때는 무용 도구가 된다. 단막 창극이나 다시래기의 봉사 장면에서는 출산할 아이를 점쳐보는 도구로 활용되기도 한다. 이래저래 우여곡절 풍경들이 연출되다가 이야기가 끝나갈 즈음 지팡이의 대미가 장식된다. 심학규는 황후가 된 심청이를 만나 눈을 뜨고 나서 지팡이를 던져 버린다. 심청가에서 다 말하지 못한 복선이 있다. 지팡이 소거(消去)가 가지는 복선은 심학규가 벌이는 사건들에 중첩되어있다. 차후 기회를 보아 밝혀나가겠지만 심봉사, 지팡이, 거듭되는 죽음 모티프들은 사실은 갱생, 거듭남, 부활의 인유이자 고도의 기술이다. 이게 어디 눈 어두운 자에게만 해당 되겠는가. 내가 의지하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나의 지팡이인 것을.
장애인 한홍수에게 배운 것들
계묘년 11월의 첫날 제13회 장애인 국악공연 ‘마음나눔’에 진행 사회차 다녀왔다. (사)사람사랑 한홍수 대표가 해마다 벌이는 장애인들 잔치다. 내가 아끼는 고향 동생으로 더불어 같이 해온 세월이 깊다. 한대표는 이외 장애인들을 위한 위문 공연만 해도 1,000회를 넘게 해왔다. 관련하여 굵직한 상도 탔다. 이런 활동들은 더 많이 격려받고 더 많이 회자 되어야 한다. 오래전 이 친구에게 질문한 적이 있다. 제자들, 후배들 두루두루 이런저런 코멘트를 하거나 상담을 해주던 터였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그가 답하여 말했다. “나도 형님처럼 달리기를 한 번 해보는 것이 소원이오.” 달리기라니! 그때 이 대답이 내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그렇구나. 다리가 불편한 사람들에게는 달리기 한번 해보는 것이 소원이겠구나. 나는 당장이라도 일어나 달리기를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늘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며 이러쿵저러쿵했구나. 사소하게 생각하는 것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벼락같은 위해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스쳐 지나는 미풍이 된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그가 늘 짚고 다니는 지팡이가 눈에 들어왔다. 잘 알려진 스핑크스의 수수께끼가 주는 교훈이 크다. 공연을 진행하며 관객들에게 질문해봤다. “아침에는 다리가 4개, 점심에는 2개, 저녁에는 3개인 것은?” ‘사람’이라는 답이 합창으로 돌아왔다. 그렇다. 사람은 결국 지팡이에 의지해 살아가는 존재다. 그 지팡이의 형태와 성격과 유무형의 가치가 서로 다를 뿐이다. 다리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만 지팡이가 제3의 다리인 것이 아니다. 국어사전에서는 지팡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걸을 때에 도움을 얻기 위하여 짚는 막대기”, 뭔가 설명이 부족하다. 어찌 걸을 때만 효용이 있을 것인가. 지팡이에 대한 의미의 확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광범위하고 깊다. 졸저 『한국인은 도깨비와 함께 산다』(다할미디어)에서 깊게 다루었던 도깨비방망이도 사실은 지팡이의 변형이다. 이것이 남성 중심사회에서 남근(男根)의 의미로 재구성되며 일종의 남성성의 기호와 상징으로 구동되었다. 반지의 제왕 등 오래된 인류의 신화에서도 이 맥락은 두드러진다. 백발의 간달프가 들고 있는 지팡이는 엄청난 에너지를 작동하는 기기로 묘사된다. 고려 태조 왕건 할아버지를 미화시킨 『작제건 설화』에서는 버드나무 지팡이(楊杖)가 등장한다. 이 방망이가 가뭄에 비를 내리는 등 갖가지 신비를 창조한다. 성경에 나오는 모세의 지팡이, 불교의 신장들이나 고승들이 들고 있는 각양의 지팡이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례는 차차 소개한다. 지금 주목하는 것은 지팡이가 가진 본래적 기능이다. 우리는 늘 무엇인가에 의지하며 살아간다. 혹은 누군가에 의지한다. 사회적 동물이고 관계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육신의 의지이건 마음의 의지이건 다르지 않다. 인간은 장애인과 비장애인 두 종류로 나뉜다. 아니, 인간은 모두 장애인이다. 장애의 크기가 크거나 작을 뿐이다. 늙어서야 지팡이가 ‘몸성’을 가지는 게 아니라, 태생부터 규정된 조건이다. 서로 의지하고 기대지 않으면 쓰러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가 짚고 있는 지팡이에 대해 묵상한다. 내가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내 가족과 벗과 이웃은 물론이요, 나라와 인류에 미치는 생각들이다. 나는 장애인 한홍수를 통해 이 귀한 진리를 알아차렸다.
남도인문학팁
보이는 장애와 보이지 않는 장애
10여 년 전 가고시마 대학 외국인 교수로 근무할 때 나는 ‘눈중풍’으로 한눈을 실명하였다. 망막이 회복되지 않으니 참으로 불편하였다. 공감각이 떨어지니 자꾸 발을 헛디디게 되고 운전면허증도 2급으로 강등되었다. 중증장애인들에 비하면 하찮은 장애에 불과하다. 하지만 내 직업이 책 읽고 글을 쓰는 것이라 많이 불편하다. 그래도 무엇을 원망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꿋꿋하게 할 일을 해왔다. 지금은 활자를 크게 키워 보는 방식으로 불편을 덜어냈다. 이런 장애를 가진 내력 때문인지 지금까지 장애인 공연이나 행사에 진행사회를 맡기도 하는 등 지속적으로 관여해 왔다. 이번 13회 <남도소리울림터>의 공연자들은 오랫동안 만났던 친구들이다. 영암에 있는 소림학교 친구들은 지난 10월 목포청소년 드림페스티벌에서 최고상인 대상을 받았다. 장애인들의 겨루기가 아니라 무용이나 발레를 전공하고 있는 일반 학생들과의 겨루기였다는 점에서 크게 칭찬할 만하다. 지적장애나 중증장애도 있는데 장애를 장애로 여기지 않고 다만 조금 불편할 뿐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자랑스럽다. 광주놀이심리센터의 ‘내드름 1585’ 친구들은 최근 장애인문화예술제 공모전에서 ‘버나놀이’로 음악 부분 대상을 받았다. 김영숙 지도교사에 의하면 어렸을 때부터 우리 음악을 통해 언어치료를 해온 내력이 있다. 2015년에 다섯 명의 친구들로 시작했다는 의미로 지은 이름이란다. <관현맹인전통예술단>의 시나위 공연이 으뜸이었다. 보통 ‘맹인’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데 그 이유가 있다.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1472년 3월 5일)에 보면 관현맹인(管絃盲人)이라는 기사가 나온다. 지금으로터 600여년 전에 시각장애 악사들에게 관직과 녹봉을 주고 궁중의 악사 삼아 연주하게 했던 것이다. 이를 재현하기 위해 2011년 문체부의 지원을 받아 창단된 단체다. 시각장애인들 중심으로 일부 일반인들을 섞어 구성했다. 기타 공연들은 차차 기회 되면 소개하기로 한다. 인간은 모두 장애를 가진 존재다. 보이는 장애와 보이지 않는 장애가 있을 뿐이다. 보이는 장애보다 심각한 것은 보이지 않는 장애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나 속으로 중증장애를 앓는 이들이 너무 많다. 나는 늘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을 곁에 두고 게을러질 때마다 회초리 삼는다. 그 첫째 말씀을 인용해 해석을 덧붙여 둔다. “몸에 병(장애)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장애)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쉬우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병고(장애)로써 양약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이윤선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장애인 한홍수에게 배운 것들
계묘년 11월의 첫날 제13회 장애인 국악공연 ‘마음나눔’에 진행 사회차 다녀왔다. (사)사람사랑 한홍수 대표가 해마다 벌이는 장애인들 잔치다. 내가 아끼는 고향 동생으로 더불어 같이 해온 세월이 깊다. 한대표는 이외 장애인들을 위한 위문 공연만 해도 1,000회를 넘게 해왔다. 관련하여 굵직한 상도 탔다. 이런 활동들은 더 많이 격려받고 더 많이 회자 되어야 한다. 오래전 이 친구에게 질문한 적이 있다. 제자들, 후배들 두루두루 이런저런 코멘트를 하거나 상담을 해주던 터였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그가 답하여 말했다. “나도 형님처럼 달리기를 한 번 해보는 것이 소원이오.” 달리기라니! 그때 이 대답이 내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그렇구나. 다리가 불편한 사람들에게는 달리기 한번 해보는 것이 소원이겠구나. 나는 당장이라도 일어나 달리기를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늘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며 이러쿵저러쿵했구나. 사소하게 생각하는 것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벼락같은 위해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스쳐 지나는 미풍이 된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그가 늘 짚고 다니는 지팡이가 눈에 들어왔다. 잘 알려진 스핑크스의 수수께끼가 주는 교훈이 크다. 공연을 진행하며 관객들에게 질문해봤다. “아침에는 다리가 4개, 점심에는 2개, 저녁에는 3개인 것은?” ‘사람’이라는 답이 합창으로 돌아왔다. 그렇다. 사람은 결국 지팡이에 의지해 살아가는 존재다. 그 지팡이의 형태와 성격과 유무형의 가치가 서로 다를 뿐이다. 다리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만 지팡이가 제3의 다리인 것이 아니다. 국어사전에서는 지팡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걸을 때에 도움을 얻기 위하여 짚는 막대기”, 뭔가 설명이 부족하다. 어찌 걸을 때만 효용이 있을 것인가. 지팡이에 대한 의미의 확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광범위하고 깊다. 졸저 『한국인은 도깨비와 함께 산다』(다할미디어)에서 깊게 다루었던 도깨비방망이도 사실은 지팡이의 변형이다. 이것이 남성 중심사회에서 남근(男根)의 의미로 재구성되며 일종의 남성성의 기호와 상징으로 구동되었다. 반지의 제왕 등 오래된 인류의 신화에서도 이 맥락은 두드러진다. 백발의 간달프가 들고 있는 지팡이는 엄청난 에너지를 작동하는 기기로 묘사된다. 고려 태조 왕건 할아버지를 미화시킨 『작제건 설화』에서는 버드나무 지팡이(楊杖)가 등장한다. 이 방망이가 가뭄에 비를 내리는 등 갖가지 신비를 창조한다. 성경에 나오는 모세의 지팡이, 불교의 신장들이나 고승들이 들고 있는 각양의 지팡이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례는 차차 소개한다. 지금 주목하는 것은 지팡이가 가진 본래적 기능이다. 우리는 늘 무엇인가에 의지하며 살아간다. 혹은 누군가에 의지한다. 사회적 동물이고 관계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육신의 의지이건 마음의 의지이건 다르지 않다. 인간은 장애인과 비장애인 두 종류로 나뉜다. 아니, 인간은 모두 장애인이다. 장애의 크기가 크거나 작을 뿐이다. 늙어서야 지팡이가 ‘몸성’을 가지는 게 아니라, 태생부터 규정된 조건이다. 서로 의지하고 기대지 않으면 쓰러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가 짚고 있는 지팡이에 대해 묵상한다. 내가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내 가족과 벗과 이웃은 물론이요, 나라와 인류에 미치는 생각들이다. 나는 장애인 한홍수를 통해 이 귀한 진리를 알아차렸다.
남도인문학팁
보이는 장애와 보이지 않는 장애
10여 년 전 가고시마 대학 외국인 교수로 근무할 때 나는 ‘눈중풍’으로 한눈을 실명하였다. 망막이 회복되지 않으니 참으로 불편하였다. 공감각이 떨어지니 자꾸 발을 헛디디게 되고 운전면허증도 2급으로 강등되었다. 중증장애인들에 비하면 하찮은 장애에 불과하다. 하지만 내 직업이 책 읽고 글을 쓰는 것이라 많이 불편하다. 그래도 무엇을 원망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꿋꿋하게 할 일을 해왔다. 지금은 활자를 크게 키워 보는 방식으로 불편을 덜어냈다. 이런 장애를 가진 내력 때문인지 지금까지 장애인 공연이나 행사에 진행사회를 맡기도 하는 등 지속적으로 관여해 왔다. 이번 13회 <남도소리울림터>의 공연자들은 오랫동안 만났던 친구들이다. 영암에 있는 소림학교 친구들은 지난 10월 목포청소년 드림페스티벌에서 최고상인 대상을 받았다. 장애인들의 겨루기가 아니라 무용이나 발레를 전공하고 있는 일반 학생들과의 겨루기였다는 점에서 크게 칭찬할 만하다. 지적장애나 중증장애도 있는데 장애를 장애로 여기지 않고 다만 조금 불편할 뿐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자랑스럽다. 광주놀이심리센터의 ‘내드름 1585’ 친구들은 최근 장애인문화예술제 공모전에서 ‘버나놀이’로 음악 부분 대상을 받았다. 김영숙 지도교사에 의하면 어렸을 때부터 우리 음악을 통해 언어치료를 해온 내력이 있다. 2015년에 다섯 명의 친구들로 시작했다는 의미로 지은 이름이란다. <관현맹인전통예술단>의 시나위 공연이 으뜸이었다. 보통 ‘맹인’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데 그 이유가 있다.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1472년 3월 5일)에 보면 관현맹인(管絃盲人)이라는 기사가 나온다. 지금으로터 600여년 전에 시각장애 악사들에게 관직과 녹봉을 주고 궁중의 악사 삼아 연주하게 했던 것이다. 이를 재현하기 위해 2011년 문체부의 지원을 받아 창단된 단체다. 시각장애인들 중심으로 일부 일반인들을 섞어 구성했다. 기타 공연들은 차차 기회 되면 소개하기로 한다. 인간은 모두 장애를 가진 존재다. 보이는 장애와 보이지 않는 장애가 있을 뿐이다. 보이는 장애보다 심각한 것은 보이지 않는 장애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나 속으로 중증장애를 앓는 이들이 너무 많다. 나는 늘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을 곁에 두고 게을러질 때마다 회초리 삼는다. 그 첫째 말씀을 인용해 해석을 덧붙여 둔다. “몸에 병(장애)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장애)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쉬우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병고(장애)로써 양약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이윤선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