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이윤선의 남도인문학> AI 시대, 귀얄분청 같은 막사발 시대정신이 그립다
373)분청(粉靑)에 커피 한잔 따르며
“청자와 백자를 뛰어넘는 심미적 개념으로 분청의 철학은 마치 물항아리를 머리에 인 처자, 애기를 업고 양손에 옴박지를 들고도 사뿐사뿐 걷는 걸음과도 같은 춤사위다”
입력 : 2023. 11. 30(목) 14:48
김영주 작가의 무안분청. 이윤선
무안분청 명인 김문호 작가의 가마불 고사. 이윤선
달항아리와 귀얄찻그릇에 스민 고대신화

백자대호 즉 달항아리가 지닌 심미적 세계는 삼척동자라도 알 만큼 익히 알려져 있다. 국보로 지정되기도 하고 김환기 등의 거장들에 의해 자주 그려지기도 했다. 수많은 도공, 예술가들에 의해 빚어지기도 했다. 이 심심한 백자 항아리가 한국을 대표하는 이미지 나아가 한국미의 전형으로까지 대접받았다. 시대정신이 그리 만든 것이다. 하지만 백자의 출현 이후 그저 생활 도기의 하나로 치부했던 시절이 길었다.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호명되는 대부분의 것들이 그러할 것이다. 법고창신의 행로에는 늘 부침이 있기 마련이다. 현대에 이르러 달항아리에 대한 해체와 재구성이 이루어지며 새로운 시도들이 행해지는 경향도 이를 반영한다. 전통이 단절된다는 것 혹은 전통을 잇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달항아리에 견줄만한 법고창신의 사례가 분청(粉靑)이다. 그중에서도 ‘덤벙’과 ‘귀얄’이 내가 의도하는 비교 대상이다. 백자의 출현과는 별개로 달항아리에 보름달이라는 풍요와 생성의 이미지를 부가한 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풍요와 다산의 이미지 혹은 철학으로 보름달을 상징한 것은, 세계 보편의 내력을 지닌다. 분청의 대표적 문양이라고 할 수 있는 귀얄문은 어떨까? 귀얄은 풀이나 옻칠할 때 쓰는 솔의 하나로 수수붓이라고도 한다. 주로 돼지털이나 말총을 넓적하게 묶어서 만들기 때문에 투박한 느낌을 준다. 빗살 모양,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를 닮았다. 즐문토기(櫛文土器)보다는 오히려 우문토기(雨文土器)라고 호명해 맞다. 빗질하여 칠한다는 것은 표면을 설명하는 방식이고 풍요와 다산의 신화, 비(雨)를 상징하는 것으로 읽는 것은 이면과 내력을 읽는 방식이다. 달항아리에 조선백자의 출현과 별개로 고대로부터의 풍요와 다산의 의미가 스며들었듯이, 귀얄 또한 분청의 출현과 별개로 고대로부터의 비와 여성과 달과 풍요 다산의 의미가 그윽하게 스며들었다는 뜻이다. 견강부회가 아니다. 시대정신이다. 무안분청을 주목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이를 말해준다.



무안분청, 중성염(中性焰)과 귀얄의 허튼 세계관

야마다만키치로(山田萬吉郞)라는 사람이 일제강점기에 무안 분청에 매료되어 책을 낸 적이 있다. 무안문화원에서 이태 전 이를 번역하였다. 지난 시월에는 ‘야마다 만키치로와 무안분청’이라는 주제로 학술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졸저 『무안만에서 처음 시작된 것들』(다할미디어)에서도 크게 다루었다. 분청은 고유섭이 1941년 <조광>이라는 잡지에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라고 언급한 이후 널리 쓰이는 말이다. 하지만 이 종류의 도자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용어다. 풀어 말해 ‘분칠을 한 청자’ 정도이니 그 안에 담긴 철학이나 역사는커녕 맛과 멋의 뉘앙스도 살려내지 못한 용어다. 장차 또 다른 이름을 제안하기로 한다. 분청의 기법에는 상감, 인화, 박지, 철화, 조호, 덤벙, 귀얄 등이 있는데 이중 귀얄기법을 가장 선호한 것 같다. 상감기법과 귀얄기법은 조선의 독창적인 기법으로 인정받는다. 분청 자체를 귀얄이라고 불렀던 내력이 여기 있을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전국에 자기소 139개, 도기소 185개 등 모두 324개의 도자소에서 분청사기를 생산했음이 확인된다. 전국적으로 분청사기를 제작했다는 뜻이다. 야마다만키치로가 주목했던 ‘무안분청’도 사실은 행정구역상의 무안이 아니라, 함평, 영광, 광주, 장성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졸저에서는 이를 남도로 확장 해석하였다. ‘무안분청’이라는 호명이 남도지역을 수렴하거나 적어도 포섭하는 이른바 ‘남도분청’의 다른말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삼남(충청, 전라, 경상)이던 남도 혹은 하남 등의 용어가 후대에 광주전남지역으로 수렴된 것과 같은 이치다. 지금의 행정구역인 무안지역에 요지가 얼마나 있는지, 발굴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와는 별개로 ‘무안분청’은 ‘남도분청’의 다른 말로 호명되었다. 주목할 것은 중성염(中性焰)이다. 야나기무네요시(柳宗悅)의 <조선과 그 예술>(1994)에 나오는 ‘조선의 찻잔’이라는 단원에서 빌려와 졸저에 풀어두었다. 도자기를 굽는 기술에는 완전연소인 산화염과 불완전 연소인 환원염 두 가지가 있다. 전부는 아니겠지만 조선의 찻그릇은 그 중간인 중성염(中性焰)으로 굽는 게 많다고 한다. 중성염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던 사람들에 의해 구워진 이 찻잔에 차를 따르면 맛부터가 달라진다고 찬탄한다. 임진왜란 이후 끌려간 도공들에 의해 분청이 만들어졌고 이것이 일본의 국보급 대우를 받는 과정들이 이해되는 주장이다. 이 대목에 착안하여 나는 청자와 백자를 뛰어넘는 심미적 개념으로 분청의 철학을 말해 왔다. 우리 음악 중 산조(散調)에 견주어 설명할 수 있다. 이를 본래 ‘허튼 음악’이라고 했던 이유는 단지 산조의 산(散)이 ‘흐트러짐’이라는 뜻을 지닌 낱말이어서가 아니라, 이 음악적 토대와 철학이 바로 흩어지고 풀어놓은 가락들의 정수라는 데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를 다시 남도문화의 정수인 ‘귄’에 대입해 설명하곤 했다. 마치 물항아리를 머리에 인 처자, 애기를 업고 양손에 옴박지를 들고도 사뿐사뿐 걷는 걸음과도 같은 춤사위다. 이를 유홍준은 남도의 서화를 설명하면서 인용하고 김지하는 ‘기우뚱한 균형’이라고 표현했다. 진도북춤 사위 중 ‘갈뚱말뚱’ 사위가 여기에 해당한다. 허튼춤, 허튼 세계관이다. 나는 이것이 청자나 백자에 비하면 형편없이 거칠고 투박한 분청의 세계관이 대변한다고 이해해왔다. 근대기를 넘어서면서 비록 일본인들에 의해 주목받긴 했지만, 이름도 빛도 없던 민중이 주인되는 시대, 아무런 예술적 기교도 들어있지 않은 듯한 막사발과 마치 거칠게 빗질한 듯한 귀얄분청의 세계관이 그리고 철학이 시대정신을 담아냈다. 챗지피티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시대, AI에 의해 모든 것이 압도당하는 시대로 접어들면서 더욱 간절한 것은 이같은 철학과 세계관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다. 달항아리보다 오히려 주목해야 할 것은 덤벙과 귀얄의 세계관이지 않을까? 이것이 생활도자로서의 보편성 맥락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고.



남도인문학팁

무안도자발전산업특구 지정과 무안도자산업

2023년 11월 28일 중소벤처기업부의 제55차 지역특구위원회에서 청계농공단지 일원의 ‘무안도자산업특구’가 ‘지역특화발전특구’로 신규 지정되었다. 무안군 청계농공단지 863,000㎡ 면적에 2028년까지 3개 분야 12개 특화사업에 5년간 총 232.5억원을 투입하게 된다. 3개 분야는 도자산업 기반 조성, 도자산업 활성화, 도사산업 지원체계구축 등이고 12개 분야는 공용장비 구축, 전문판매장 조성, 공동브랜드 개발, 원료 표준화, 제품개발 및 마케팅 지원, 도자산업복합지원센터 구축 등이다. 아마 가스비 등 세금혜택이나 각양의 정책 지원이 이루어질 것이다. 무안군과 목포대학교도자클러스터사업단(단장 조영석)에 의하면, 이를 통해 생산유발효과 423억, 부가가치 유발효과 196억 등 총 616억의 경제적 파급효과가 있다고 한다. 지역특구제도는 기초지자체가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일정 지역을 특구로 지정하고 선택적으로 규제 특례를 적용하는 제도다. 무안에서 전국 생활도자기의 70%를 생산한다. 따라서 분청에 국한될 필요는 없지만, 장차 세계로 나아갈 시대정신을 위해서는 남도를 수렴하고 생활자기를 대표할 철학이 필요할 듯싶다. 무안사람 초의선사와 찻사발이 한 묶음으로 묶이듯이 15세기를 전후하여 중흥했던 분청이 오늘 여기 다시 부상하는 이유를 톺아볼 수 있으면 금상첨화 아닐까. 문호형이 주신 분청에 진한 커피 한잔을 내렸더니 맛과 향이 이리 그윽할 수가 없다.
이윤선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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