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우크라이나 전쟁과 고려인>‘우크라이나’ 이름 1187년 키예프 연대기 첫 등장
(22) 우크라이나-러시아 역사 전쟁
우크라인, 러 변경 살았던 사람들 지칭
키예프 루스 직계 상속인 러시아 주장
하나의 민족 거부한 통합지배자 야욕
현대 우크라를 레닌 작품으로 선전
러시아 군사 침략을 정당화하는 것
입력 : 2023. 11. 16(목) 13:46
노보로시야는 우크라이나 영토인 하르코프, 루간스크, 도네츠크, 크림반도, 헤르손, 니콜라예프, 오데사까지를 의미하고 있다. 노보로시야는 지도상에서 붉은색으로 표시된 곳이다.
 전쟁은 포병과 군인뿐만 아니라 역사와 함께 싸우기도 한다. 국가 지도자가 자신의 행동을 합법화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므로 역사로 향하게 된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도 전쟁 상황 속에서도 역사 전쟁이 진행되고 있다. 주요 쟁점으로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하나의 민족인가, 현대 우크라이나는 레닌의 작품인가, 노보로시야 개념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등이 있다. 분석은 주로 러시아의 입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원인을 찾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우크라이나라는 이름은 1187년 키예프 연대기에 처음 등장한다. 그런 다음 사라지거나 다시 사용되지만 코사크 시대, 즉 16~17세기부터는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18세기에 코사크 국가가 러시아 제국에 편입되면서 우크라이나라는 단어는 정치적으로 다시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 이름은 민속 문화에서 보존되었다. 우크라이나는 민족부흥기인 19세기 정치와 고급문화로 회귀한다. 그리고 20세기에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보통 우크라이나인은 러시아 변경에 살았던 사람들을 지칭했다. 이처럼 우크라이나는 외곽(окраина)을 의미한다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크라이나가 크라이나(краина), 즉 국가(страна)(우크라이나어로 кра?на, край)를 뜻하기도 한다. 이 단어의 의미는 누가 어디서 사용했는지에 따라 달라졌다고 가정할 수 있다. 이 영토 밖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변두리’였다. 지역 주민에게는 ‘우리가 사는 나라’로 단순히 ‘사람들이 사는 땅’을 의미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하나의 민족인가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하나의 민족, 단일의 통합체’라고 말했다. 현대 러시아에서는 우크라이나를 별도의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우크라이나인을 러시아인과 ‘한 민족’이라고 부르기를 원하고 있다.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은 ‘인위적으로 분리된 한 민족’이라는 것이다. 11세기, 12세기, 13세기 이전에는 언어에 차이가 없었다. 그리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통치하에 영토에 살았던 우크라이나인 일부의 폴란드화 결과로 16세기에 처음으로 언어 차이가 나타났다.

 동유럽의 역사를 공부한 거의 모든 사람은 그것을 “키예프가 있었고, 모스크바가 나타났고, 권력이 이전되었고, 모스크바는 한때 키예프에 있었던 것과 같은 국가였다”라는 식으로 이해한다. 즉, 키예프와 모스크바는 항상 함께 있었던 것 같고 이것이 표준으로 인식된다. 그런 이야기 전개로 보면 우크라이나는 주변적이며, 지방적이거나 어떤 의미에서 의심스러운 것이 있어야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아무도 러시아에 이런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은 모두 유럽에서 가장 큰 국가였던 고대 루스(Rus)의 상속인이다. 역사는 모스크바가 고대 러시아 국가의 전통을 이어온 통일의 중심지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푸틴 대통령도 키예프 루스의 직계 상속인이 무엇보다도 우크라이나가 아니라 오늘날의 러시아라고 반복해서 주장했다. 푸틴 대통령은 키예프 루스와 러시아가 동일한 개념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키예프 루스라는 용어는 러시아어 버전의 위키피디아에서 사라지고 고대 러시아 국가(Old Russian state)로 대체되었다.

 신학자 라자르 바라노비치는 “사실 우리는 모두 한 나라이다. 그리고 당신 나라의 역사는 실제로 키예프에서 시작되었다”라고 했다. 이것은 키예프를 단지 모스크바가 정복한 곳이 아니며 러시아의 역사는 우크라이나와 함께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었다.

 반면에 우크라이나에서는 러시아와 러시아인이라고 말하지 않고 모스크바 주변에 형성된 국가라는 의미로 무스코비(Muscovy)라고 부른다. 러시아는 러시아 제국이 수립된 1721년에 루스에 가까운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스코비라고 부르는 것은 루스에 대한 역사적 언급을 제거하고 현재보다 적은 국가라는 의미를 주고자 한 것이다.

 러시아 역사의 시작은 862년 슬라브인의 초청을 받아 바랑기아인(바이킹의 일원)의 류리크가 트루보르, 시네우스 등 두 형제와 함께 러시아 북서에 노브고로드 공국(루스)을 설립했다. 이어 882년 노브고로드의 올레그 공은 키예프를 점령했다. 그리하여 동부 슬라브의 북부와 남부 땅을 하나의 권위 아래 통합하고, 10세기 말까지 통치 중심을 키예프로 옮기고, 북부와 남부 지역은 상당한 자치권으로 유지되었다. 중요한 것은 키예프 루스는 러시아 노브고로드의 스칸디나비아 류리크 왕조 대표가 통치했다는 점이다.

 푸틴 대통령은 민족 친화력, 언어 및 물질문화의 공통 요소와 함께, 당시에는 안정된 경계, 영토, 공통 경제 활동 및 왕자(대공)의 권력으로 윤곽이 잡혀 있지는 않았지만 공통된 기독교는 루스를 강력한 영적 통합 세력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단일 러시아 국가의 형성과 전체 동슬라브 세계의 부족 연합은 바로 이 영적 기반에서였다는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2016년 11월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미르 왕자(대공) 기념비를 열면서 그를 ‘러시아 국가의 영적 창시자’라고 불렀다. 또한 푸틴 대통령은 모스크바가 건국되기 100년 전에 키예프를 통치했던 현공 야로슬라브를 ‘우리 왕자’라고 불렀다. 그는 상징적인 인물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두 나라가 ‘한 나라’임을 주장할 때 그 근거로 야로슬라브가 최전성기로 키운 ‘키예프 루스’를 들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가 키예프 루스의 직계 상속인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푸틴 대통령은 키예프 루스와 우크라이나를 언급하지 않고 크림반도 남서부에 존재했던 케르소네소스(현재의 세바스토폴 부근)에서 키예프 루스 블라디미르 왕자(대공)의 세례를 러시아와 연결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것을 우크라이나가 아닌 러시아의 과거 유산인 엄청난 역사적 사건으로 간주했다. 푸틴 대통령은 크림반도 합병 이후 이 주제에 주목했으며, 특히 그는 케르소네소스는 신앙과 러시아 국민 모두의 탄생 원천이며 이곳은 우리에게 신성한 곳이라고 했다.

 케르소네소스는 세바스토폴이다. 세바스토폴은 2014년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와 크림반도 최남단에 있는 영토 일부이다. 푸틴 대통령이 언급한 영적 근원과 국가 구성 요소 사이의 연결이 무엇인지를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즉, 케르소네소스를 위한 투쟁은 크림반도 전체를 위한 투쟁을 의미한다. 그래서 러시아 국민은 역사적·영적 차원에서 신성하게 이곳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현대 우크라이나는 레닌의 작품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인이 독립적인 국민으로서 “존재한 적이 없다”라고 하면서 우크라이나 자체는 “레닌이 인위적으로 만든 나라”라고 주장했다. 그는 우크라이나는 볼셰비키 공산주의자들의 지도자인 블라디미르 레닌이 새로운 민족 공화국을 건설하여 원래는 속하지 않던 영토를 부여한 ‘작성자이자 설계자’이기 때문에 ‘레닌의 이름을 딴’ 국가라는 것이다. 이어 레닌의 추종자들인 이오시프 스탈린과 흐루쇼프가 폴란드(갈리치아와 볼린), 헝가리(트란스카르파티아), 루마니아(부코비나와 남부 베사라비아), 러시아(크림)에서 빼앗은 땅으로 우크라이나 영토를 주도화했다. 따라서 현대 우크라이나는 전적으로 소비에트 시대의 발명품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적 러시아를 희생시키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레닌의 볼셰비키에 의해 우크라이나로 이전된 우크라이나의 8개 지역(하르코프, 도네츠크, 루간스크, 드네프로페트롭스크, 자포로지예, 헤르손, 니콜라예프 및 오데사)인 노보로시야에 대해 훨씬 더 광범위하게 제기하며 오스만 제국에서 이들 영토를 탈환되면서 표트르 루먄체프-자두나이스키 백작 및 그리고리 포툠킨과 알렉산드르 수보로프의 지도하에서 많은 러시아인의 피가 뿌려졌다고 했다.

 이는 아마도 우크라이나에 러시아의 군사 침략에 대한 주요 정당화를 위해 역사를 매우 효과적으로 선전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푸틴 대통령은 현재 우크라이나 지도부가 격렬하고 광적으로 일관되게 공격적인 러시아혐오를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우크라이나 통치자들은 식민지화한 러시아 제국에서 물려받은 모든 것을 거부하는 것으로 귀결시키고 있다. 그래서 푸틴 대통령은 ‘레닌의 이름을 딴 우크라이나’를 발표했다. 즉, 공산주의자들이 합병한 영토에서 우크라이나를 해방시키는 형태로 탈공산화가 수행될 수 있다고 하였다.

 

 노보로시야 개념

 2014년 4월 17일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의 광대한 영토를 포함하는 노보로시야(신러시아)에 대한 역사적 기원을 말했다. 그는 이 지역에서 러시아인의 권리를 보장할 것을 요구하면서 헌법에 따라 국민투표를 실시해야 한다고 했다.

 노보로시야는 우크라이나 영토인 하르코프, 루간스크, 도네츠크, 헤르손, 니콜라예프, 오데사까지를 의미하고 있다. 노보로시아는 차르, 러시아 제국 시대, 예카테리나 여제가 합병한 영토를 의미한다. 18세기 후반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이 끝난 후 크림반도마저 러시아 일부가 되었으며 노보로시야라고 불리는 흑해 지역의 땅이 되었다. 모스크바 카네기 센터 소장도 노보로시야는 실제로 크림반도가 있는 흑해 북부 지역인 우크라이나 동남부 하르코프와 오데사까지의 영토라고 했다. 노보로시야는 예카테리나 여제의 통치 기간 동안 형성되었으며 소련 권력이 수립될 때까지 존재했지만 역사적 용어는 잊혀지고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실제로 이 땅들은 차르 시대에는 우크라이나 일부가 아니었다. 이곳은 1920년대 소련이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로 이전된 영토들이었다. 이 당시 공산주의자들은 우크라이나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비율을 높이고자 했다. 농민이 공산주의자들에게 적대적인 소부르주아 환경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다양한 정치 과정에서 더 많은 표를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특히 도네츠크 인민공화국과 루간스크 인민공화국은 러시아의 양도 때문에 인위적으로 만들어져서 우크라이나가 이 영토를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소련 공산당이 자발적인 결정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이런 의미에서 우크라이나 남부와 남동부 영토는 레닌과 볼셰비키의 변덕과 부적절함에 따라 우연히 우크라이나에 주어졌다는 것이 매우 일반적이었다. 이것은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푸틴 대통령은 크림반도와 현재 돈바스는 러시아 영토라고 주장했다. 푸틴 대통령은 크림반도가 러시아의 성지이며 러시아에 신성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사실 이러한 역사적 주장은 각 영토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이루어진다.

 푸틴 대통령은 마치 19세기의 전형적인 제국주의 민족주의자와 같다. 그에게 러시아어의 지위는 매우 중요했다.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러시아인으로 인식했다. 그는 자국민 보호를 위해 국가 독립을 수호할 준비까지 했다.

 키예프 루스는 누구의 민족 국가였는가? 또한 현대 우크라이나가 레닌의 작품인가? 더불어 노보로시야 개념에 대한 역사 논쟁도 격렬하게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통합지배자가 되기를 원하고 있다. 그것은 러시아가 키예프 루스의 직계 상속인이 되는 것이다.
<전남대 글로벌디아스포라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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