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우크라이나 전쟁과 고려인>유로마이단, 우크라선 ‘혁명’ 러시아선 ‘쿠데타’
(21) 유로마이단 사건: 우크라이나 전쟁의 촉매제
우크라 정부, 유럽연합과의
통합 협정에 서명 안해 촉발
독단적 국정운영·부정부패
“유럽의 우크라를 위해” 시위
해산 과정 100명 이상 사망
크림반도 합병·돈바스 전쟁
오늘날 우크라 전쟁을 초래
입력 : 2023. 11. 02(목) 13:17
우크라이나 전쟁 전 키이우 독립광장(마이단)의 필자의 모습
유로마이단의 사망자들 (사진 필자 제공)


우크라이나 전쟁은 세계 공동체에 심각한 우려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전쟁은 2013~2014년에 있었던 우크라이나 키이우 독립광장(마이단) 사건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 사건은 국가 권력 변화로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지금 목격하고 있는 지정학적 위기의 촉매제가 되었다. 분명히 2013~2014년에 우크라이나에서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고려하지 않고는 왜 2014년에 크림반도가 러시아에 합병되었고 돈바스 전쟁이 일어났는지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2013년 11월 21일 우크라이나 정부가 유럽연합과의 통합 협정에 서명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한 후 이 결정에 대응하여 키이우 중심가에서 시위가 시작되었다. 여기에 처음에는 언론인, 사회 운동가와 야당 정치인이 마이단에 모였다. 시위 주최 측은 ‘유럽 우크라이나를 위하여’를 외쳤다. 이렇게 유로마이단이 시작되었으며 이는 시위대와 정부 사이의 유혈 충돌로 확대되고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국가에서 도주하면서 끝났다. 이 사건은 후에 유로마이단(Euromaidan) 또는 존엄의 혁명(Revolution of Dignity)이라고 불리었고, 11월 21일은 존엄과 자유의 날로 기념되고 있다.

유로마이단이라는 용어는 유럽을 뜻하는 유로와 광장을 뜻하는 마이단의 합성어다. 키이우 시내 가장 중심가 광장의 지명이 독립광장이어서 여기서 광장, 즉 마이단을 따서 유로마이단으로 부르고 있다.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유럽을 향한 광장인 셈이다.

우크라이나 마이단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관점이 있다. 유로마이단은 우크라이나 측에서는 야누코비치의 독재 정권에 맞서 싸운 대중의 노력 덕분에 승리한 존엄의 혁명이라고 하고, 반면에 러시아 측에서는 쿠데타로 특징짓고 있다. 또한 일부 학자 중에는 유로마이단은 본질적으로 대중의 적극적인 참여로 일어난 잘 조직된 혁명적 쿠데타인 색깔 혁명이며 실제로 정당한 정치권력을 변화시키는 도구로 사용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영국 학자 디 레인(D. Lane)에 따르면 색깔 혁명 현상은 정치변동의 패러다임으로 구축되어야 할 새로운 형태의 정치 운동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왜 마이단 사건이 발생했으며 과정과 결과는 어떠했는가! 첫째는 우크라이나 측의 입장이다. 역사적으로 시위의 시작은 우크라이나 정부에 대한 체제 항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유럽연합과의 통합 협정 중단에 대한 항의였다. 이는 가치와 개념을 가진 시스템으로서의 국가에 대한 투쟁이었다. 우크라이나 시민들은 유럽을 향했고 그곳을 열망했다. 그러나 많은 정치인은 유럽에서처럼 살아야 하는 그런 정치적 문제에 관심이 없었다. 우크라이나가 유럽연합에 통합을 원하는 목표는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가치 체계에 대한 투쟁이었다. 야당이 처음 조직한 이 행동은 유럽의 가치와 우크라이나의 유럽 선택을 이루겠다는 슬로건 아래 마이단에 모였다. 유럽으로의 길, 즉 국가 발전 방향으로 유럽의 가치로서 국가 노선 선택은 공공 이니셔티브가 아니라 시민적?정치적 투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크라이나인들의 꿈은 러시아에 속한 것이 아니라 우크라이나가 유럽에 통합되는 미래였으며, 우크라이나 국민의 단결 및 야누코비치가 없는 삶에 관한 것이었다. 광장의 집회 무대에는 ‘야누코비치의 유럽 선택을 위해’와 ‘우크라이나의 유럽을 위해’라고 쓰여 있었다. 이들은 유럽으로 가는데 비자 면제 입국을 원했다.

유로마이단은 유럽연합과의 빠른 통합과 친러시아 성향의 야누코비치 대통령 사임을 요구하는 반대파 진영의 시위였다. 야당 지도자들은 유럽통합을 거부한 대통령을 반역자라고 불렀다. 이 과정에 우크라이나 정부의 잔인한 해산이 있었다. 시위는 더 계속되었고 폭력적이고 피비린내 나는 비극이 발생했다. 공식 추산에 따르면 키이우에서 시위가 진행되는 동안 100명 이상이 사망했고 참가자 600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사망자 중에는 베르쿠트 특수 경찰 부대의 군인이 있었다. 새 정부는 그들을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2월 22일과 23일은 키예프에서 사망한 사람들을 위한 애도의 날로 선포되었다.

이처럼 마이단은 우크라이나의 유럽통합 시도의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그러나 2013년 5월 키이우 국제사회학연구소는 이 문제에 대해 전 우크라이나 국민 여론조사를 했다. 설문 조사에 따르면 시민의 40%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벨라루스, 카자흐스탄과 함께 관세 동맹 및 공동 경제 공간에 빠르게 가입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동시에 응답자의 36%만이 나중에 유럽연합에 가입하기 위해 유럽연합과 통합 협정을 체결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2013년 우크라이나는 경제가 심각하게 정체되고 있었다. 우크라이나는 2012년에 비해 국내총생산(GDP)과 산업 생산 증가율이 감소했다. 경제의 이러한 상황은 높은 에너지 가격, 높은 대출 비용 및 상당한 포퓰리즘적인 예산으로 인해 발생했고 그것은 정치적 불안정으로 연결되었다. 특히 우크라이나 야누코비치 정부의 국가 권위주의 정치 체제의 관료화, 부정부패 및 기타 사회 전체에 만연한 총체적 불만의 목소리가 유럽으로의 길로 향하게 했다.

사실 유로마이단의 주요 발생원인은 우크라이나 내부의 깊은 모순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우크라이나 정치학자 블라디미르 말린코비치는 아직 치유되지 않은 역사적 문명 분열, 지역적 차이 및 다양한 외교 정책 지지자들 간의 대립,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급진주의, 러시아-우크라이나 관계 분야에서 크렘린의 장기 전략 부족, 우크라이나의 특정 국가 경제 및 이 과정에서 과두 자본이 수행하는 역할의 결과를 언급하였다. 우크라이나는 정치 체제의 구성 요소의 민주화를 목표로 한 변형 과정인 유럽 국가이다. 우크라이나는 두 문명의 이익이 충돌하는 국가의 지정학적 위치에 존재하며 유로마이단은 우크라이나에서 질적으로 새로운 사회 정치적 상황의 출현으로 이어진 사건이었다.

이외에도 중요한 문제는 빅토르 야누코비치의 축출로 이어진 마이단 시위에서 미국의 지원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미국 예산에서 자금을 조달하고 전 세계에 보조금을 분배한 전미민주주의기금(NED)은 키이우 시위의 초기 단계(유로마이단 2013~2014)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4년 동안(2011년부터 2014년까지) 재단은 우크라이나 비영리 단체를 지원하기 위해 거의 1,400만 달러를 할당했다. NED는 아르메니아, 키르기스스탄, 몰도바 등 구소련 공화국에도 계속 참여해 왔다.

스트랫포 코퍼레이션(Stratfor Corporation)의 책임자인 조지 프리드먼은 우크라이나 마이단 사건이 미국인들이 자금을 지원한 쿠데타임을 확인했다고 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실제로 2014년 2월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쿠데타에서 “우리는 우크라이나의 권력 이양을 중재했다”라고 미국의 역할을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둘째는 러시아 측의 입장이다. 러시아는 마이단 사건을 쿠데타로 간주하고 도네츠크와 루간스크 지역에 대한 침공과 크림반도 합병을 정당화한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서 나치 협력자 스테판 반데라의 지지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민주적으로 선출된 친러시아 성향의 지도자 빅토르 야누코비치를 전복했다고 반복해서 보도했다.

또한 러시아는 마이단이 우크라이나의 친 러시아 지배 계급을 제거하고 친 서방 꼭두각시로 대체하기 위해 다른 국가 및 일부 외국인에 의해 조직되고 지원되었다고 했다. 마이단의 잠재적 조직자는 유럽연합, 나토 및 미국과 조지 소로스가 포함된다고 했다. 이처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서 유로마이단이 명백한 외국의 간섭으로 쿠데타가 일어났다고 보고 있다.

미콜라 아자로우 전 우크라이나의 총리에 따르면 2000년대부터 서방 국가는 우크라이나에서 힘으로 권력을 장악하는 임무를 맡은 신나치 극단주의 그룹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했다. 막심 그리고리예프는 저서 <유로마이단>에서 외국 개입 및 지원을 언급하면서 유럽과 미국 정치인들이 주권 국가 내부 문제에 대한 무례한 간섭을 하였다고 주장했다. 스타니슬라브 비쇼크와 알렉세이 코체트코프의 저서 <스테판 반데라의 이름을 딴 유로마이단. 민주주의에서 독재로>에서 러시아 정치인 세르게이 젤레즈냐크는 “신나치주의 출현의 역사와 마이단에서 학살의 관련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오늘날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많은 미국 및 서유럽 정치 세력의 선동, 키이우의 새로운 당국의 지원 및 저지른 범죄에 대한 완전한 면책으로 신나치주의와 급진 민족주의자 운동이 점점 더 전개되었다”라고 주장했다.

한편, 2014년 5월 25일 무소속 후보 페트로 포로셴코가 우크라이나 조기 대선에서 54.7%의 득표율로 승리했지만 마이단 후 상황은 지역 대결로 바뀌고 우크라이나의 정치적 위기로 이어졌다. 특히 마이단에서 급진적 조직의 활동이 우크라이나의 혼란, 붕괴 및 내전으로 이어졌다.

2014년 크림 지방 정부는 친서방 쿠데타 유로마이단으로 인해 등장한 새 정부를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고 시민들에게 계속해서 우크라이나 일부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러시아에 다시 합류할 것인지를 대중 투표를 통해 결정하도록 요청했다. 2014년 3월 16일 크림반도에서 러시아로의 합병에 대한 국민투표가 시행되었다. 이것은 마치 시민들이 그러한 결정을 내린 것처럼 크림 합병을 정당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러시아는 그것과 아무 관련이 없는 것처럼 진행되었다. 투표자의 약 96% 이상이 러시아에 합병하는 데 찬성했다. 러시아에서는 크림 지역민이 자발적으로 국민투표를 시행하기로 한 결정이라고 하였다.

이어 5월에는 도네츠크 인민공화국과 루간스크 인민공화국에서 독립을 위한 국민투표를 시행한 후 주권 국가임을 선언했다. 2014년 마이단 사건은 우크라이나 남동부 돈바스 지역의 시민들이 분리주의자가 되어 우크라이나에서 탈퇴하기로 결정한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도네츠크와 루간스크 지역에 독립 공화국이 선포되어 본격적인 군사 작전이 시작되면서 지역 위기가 발생했다. 그러나 돈바스 지역의 분리 과정은 크림반도 지역만큼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당국은 크림반도에서 거의 회복하지 못한 상황에서 돈바스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우크라이나의 새로운 지도자들은 놀랍게도 소규모 민병대에 대처할 수 없었다. 몇 달 후, 군대는 파괴된 도시와 수천 명의 희생자를 남기고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2016년 6월 기준 유엔(UN)에 따르면 최소 9,470명이 사망하고 21,880명이 부상당했다.

유로마이단의 결과는 우크라이나 차원에서 보면 국가 경제 붕괴, 빈곤 국가, 분단국가 및 사회적 위기로 이어졌다. 공식 데이터에 따르면 인구는 2013년부터 2019년까지 350만 명이 감소했다. 이는 전체 인구의 약 10%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크림반도와 돈바스의 손실로 인해 우크라이나는 영토의 6%를 통제하지 못하고 산업 잠재력의 상당 부분을 잃었다. 크림반도의 상실과 동부의 내전은 분명히 원하는 결과가 아니었다. 더불어 2022년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본격적인 전쟁을 시작하였다.

이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며 우크라이나는 더 나쁜 상황에 처할 수 있다. 문제는 우크라이나가 전쟁에서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지 못하고 장기간의 군사적 충돌이나 분단의 길로 가게 되면 우크라이나 내부에서 새로운 마이단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에서다.

김영술 <전남대 글로벌디아스포라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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