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우크라이나 전쟁과 고려인>돈강 지역, 전쟁과 반란의 땅이자 교류와 교역 루트
(20) 돈강의 도시 로스토프 나돈누
예카테리나 2세 크림반도·돈강 모두 장악
소설 ‘고요한 돈강’서 동족상잔의 배경지
로스토프 주, 고려인 벼농사의 주요 거점
젊은 세대 고려인들 다양한 분야서 일해
입력 : 2023. 10. 19(목) 14:03
돈 강의 최초의 고려인은 1940년대 후반에 나타났으며, 이들로 인해 이곳 러시아 영토에서는 벼 재배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사진 출처=로스토프 주 고려인 신문 <이스크라>
돈강 지역 볼고돈스크의 스테판 라진의 조형물.사진 출처=드미트리 크라피빈


2023년 6월 23일과 24일 바그너 용병그룹의 프리고진이 주도한 러시아의 푸틴 체제에 대한 반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러시아 남부의 도시 로스토프 나돈누(Ростов-на-Дону)가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프리고진의 반란은 개인 프리고진, 러시아, 우크라이나, 유럽, 그리고 세계의 운명과도 연결되어 수많은 서사가 만들어져 왔다. 특히 길고 긴 러시아의 역사 속에서 돈강 위에 있는 로스토프 등에서의 이번 반란사태가 러시아의 역사의 또 다른 변곡점이 될 것인지는 오늘도 유유히 로스토프 나돈누를 휘감아 흐르는 돈강은 알듯하다. 그리고 고대에서 현재까지 돈강 지역에서 이루어져 온 변환의 역사는 거대하기만 하다.

로스토프 나돈누는 ‘돈강 유역에 있는 로스토프’라는 뜻이다. 돈강은 러시아 모스크바 남동쪽의 툴라 지역의 노보모스콥스크 우르반카 실개천에서 발원하여 리페츠크, 볼고그라드, 보로네시, 로스토프 주 등 러시아 연방의 15개 지역을 통과하여 아조프 해에 이른다. 돈강은 유럽에서 다섯 번째로 긴 강으로 길이는 약 1,870km이다. 돈강은 아조프 해에서 보로네시 지역의 리스키 시까지 3/4 정도는 배로 항해할 수 있다. 돈강은 길이 101km가 볼가강까지 운하로 연결되어 있다.

고대에는 돈강을 탄(Тан)이라고 불렀다. 그것에서 그리스 항해자들은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나중에 이란 이름 돈(Дон)이 뿌리를 내렸고, 번역하면 이는 강을 의미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돈강을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물의 경계로 여겼다. 즉, 유럽과 아시아를 분리하는 것이 돈이라고 믿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3세기에 그들은 무역의 주요 중심지가 된 삼각주에 타나이스(Танаис) 혹은 기르기스(Гиргис)라는 도시를 건설했다.

돈강은 그리스 신화에서 전설적인 아마존(아마조네스)의 거주지로 언급되었다. 아마존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전설의 여성 부족이다. 이들은 종족 보존을 위해 이웃 부족을 침입해 이웃 부족의 남자들을 빼앗아 아기를 낳은 뒤 죽이거나 다른 부족으로 돌려보내고, 태어난 아기는 여자만 거두었고 남자 아기는 죽이거나 이웃 나라로 보냈다고 한다. 헤로도토스는 아마조네스가 사르마트족의 스키타이 국경 지역(현재의 우크라이나)에 위치한다고 했다. 그는 돈강을 ‘여덟 번째 스키타이 강’이라고 했다.

돈강은 고대에는 유목민족인 스키타이족의 발상지이다. 헤로도토스는 스키타이족이 흑해 북부 지역(돈강 지역 포함)의 야만인들 이라고 했다.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말을 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야만인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스키타이족의 야만인을 연구하면서 헤로도토스는 그들의 전통이 그리스의 전통보다 오래되었다는 것을 인식했다. ‘원초 연대기’(Повести временных лет) 저자가 돈강을 언급하고 있다. 이 연대기에서 이 강은 아조프 해로 흘러 들어가는 대규모 무역 및 경제 대상으로 묘사되었다.

돈강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교역 루트이다. 특히 돈강은 실크로드의 일부였다. 실크로드는 무역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중세 세계화의 생생한 실제였다. 또한 사상, 지식, 발명이 전파되는 고대 문명의 동맥이기도 하여 여러 나라와 민족의 문화가 혼합되고 서로 풍요로워졌다. 과거에 주요 길 중에는 볼가강, 돈강을 따라 더 나아가 아조프까지 가기도 하였다.

1380년 돈강 변에서 몽골-타타르(킵차크한국) 전쟁에서 핵심사건 중 하나인 쿨리코보 전투가 일어났다. 14~16세기 연대기에 따르면, 러시아군은 돈 너머(즉, 돈 서쪽) 그들의 깨끗한 들판, 마마에프 땅, 네프랴드바 강어귀에서 전투를 준비했다고 되어 있다. 많은 러시아 공국의 전사들이 쿨리코보 전투에 참가했다. 모스크바 대공국이 적과의 싸움을 이끌었다. 전쟁은 몽골-타타르의 패배로 끝났다. 쿨리코보 전투는 몽골-타타르의 멍에에 맞서는 러시아와 다른 민족들의 투쟁에서 해방의 시작으로 간주하는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또한 쿨리코보 전투의 중요한 결과는 러시아 국가 형성에서 모스크바의 역할 강화였다.

1696년 표트르 대제 시기 이곳에서 발생한 군대와 1772년 예카테리나 2세가 크림반도의 곡물 무역을 위해 돈 무역 회사를 설립하였다. 전체 돈강은 18세기에 아조프가 합병되면서 러시아의 일부가 되었다. 러시아 상인들은 돈강을 따라 아조프와 페오도시야로 상품을 보냈다. 돈강은 러시아 남부 함대의 요람이다. 러시아 국가의 업무도 크림반도 및 짜르그라드와 함께 주로 돈강 문제를 다루었다.

예카테리나 2세는 1783년 4월 19일에 크림반도, 타만 섬, 쿠반 지역의 러시아 제국 가입에 관한 선언문에 서명하였다. 러시아는 흑해에 접근할 수 있었고 표트르 대제가 정복한 카바르다, 아조프 지역에 대한 권리도 가졌다. 크림한국은 오스만 제국에서 분리되어 독립을 선언했다. 이때부터 돈강 지역도 러시아 제국의 통제 하에 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일설에 따르면 스테판 라진은 왕의 분노를 피해 돈강 유역에 숨어 있었다고 한다. 그는 17세기 러시아의 농민 혁명 운동가로 러시아 제국의 전제적 통치에 반발해 반란을 주도한 카자크 지도자이다. 이 당시 러시아의 경제적, 사회적 상황은 소작농과 서민을 극도로 어려운 위치에 놓이게 만들었다. 돈강 지역에서 자발적인 농민 반란이 발생하여 곧 실제 반란으로 변했다. 1670년 5월 라진은 돈 강에서 볼가 강으로, 볼가 강에서 러시아로 가겠다고 발표했다.

식량 부족으로 기근이 시작되자, 돈 카자크의 통수인 스테판 라진의 지휘 아래 도망 농민들은 돈에서 볼가강 강변으로 이동했다. 라진 부대는 대상인의 곡물이나 상품 운반선을 습격했다. 후방 기지를 확보한 라진은 군대를 이끌고 볼가를 넘어 모스크바로 향했다. 농민군은 점차 커져서 정부·지주·대상인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고, 정부는 대군을 파견하여 진압했다. 1670년 가을까지 반군의 수는 20,000명에 달했다. 반란군이 행진했던 러시아 땅은 피로 뒤덮였다.

러시아 제국은 폴란드와의 전쟁이 이미 끝났기 때문에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상당한 군대가 모였다. 이는 유리 돌고루코프와 다니일 바랴틴스키 대공들이 지휘하는 60,000명의 강력한 군대였다. 그들은 잘 훈련된 전쟁 참전 용사였다. 정부군의 상당 부분은 훈련 및 전투 능력 면에서 카자크보다 눈에 띄게 우수한 외국 시스템을 가진 연대로 구성되었다. 라진은 패배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제국 군인들은 볼가 상류에서 반군이 점령한 도시를 해방했다. 심비르스크 근처의 전투에서 라진은 부상을 입었고, 그의 군대는 완전히 패배하고 달아났다. 라진은 체포되어 모스크바로 끌려가 1671년 6월 16일 많은 사람들이 모인 볼로트나야 광장에서 재판을 받고 러시아 제국의 매국노로 처형되었다. 라진을 섬기던 족장들은 볼가 지역 전역에 작은 파견대와 함께 흩어져 늦가을까지 짜르 군대와 싸웠다. 17세기의 가장 피비린내 나는 봉기가 끝났다. ‘스텐카 라진’이라는 러시아 민요에서는 그는 농민 구제의 영웅으로 불리고 있다.

로스토프 나돈누는 러시아의 문호 미하일 숄로호프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고요한 돈강’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이 소설은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 등 세계사적인 격동의 시대적인 배경 속에서 돈강 유역의 카자크 청년 그리고리 멜레호프와 정열적인 여성 악시냐 와의 비극적인 사랑을 통해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맡겨진 개인의 운명을 그렸다.

소설에서 돈강은 조용함, 고요함, 평화로운 삶의 화신이다. 돈강은 제1차 세계대전과 내전의 잔인하고 피비린내 나는 사건 속에서도 동일하게 유지됨을 보여준다. 러시아 동족상잔의 전쟁에서 카자크 영웅들의 삶이 어디로 던지든 돈강은 변함없이 물을 바다로 옮기며 항상 그렇게 할 것이다. 백의군과 적의군들은 돈 마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싸우는 적들로 각기 다른 운명이 복잡하게 얽혀 있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시간이며, 전쟁 기간이나 평온 기간이나 돈강은 여전히 동일하다는 것을 보이고 있다.

돈강의 평균 경사는 0.1%에 불과하며, 돈강의 물은 조용하고 웅장하게 흐른다. 그래서 보통 아버지의 강이라고 부를 뿐만 아니라 고요함이라는 별명도 붙었다.

한편, 로스토프 나돈누의 국경은 우크라이나와 맞닿아 있으며 남쪽으로 카프카스와 중앙아시아, 북쪽은 모스크바와 연결되는 통로여서 유동인구가 많다. 이곳에는 한국교육원이 있으며, 2021년 기준 거주 고려인수도 약 25,000명 정도가 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고려인들은 주로 농사일을 하고 있다. 또한 로스토프 나돈누의 중앙시장에는 고려인들이 반찬도 팔고 있다. 돈 강의 최초의 고려인은 1940년대 후반에 나타났으며, 고려인들이 본격적으로는 거주 및 이동의 자유가 생기면서 1956년부터 이곳에 정착해 살기 시작했다. 고려인들이 이주한 이유는 돈강 지역의 베숄롭스크와 바가옙스크에서 벼가 재배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고려인들은 벼농사의 최고의 전문가들이였다. 이때부터 로스토프는 벼 재배의 번성 시대가 시작되었다. 사회주의 노동의 영웅 황창일과 세르게이 텐, 벼 재배자 최순희, 이성춘, 최하구, 염창준 등의 이름은 잘 알려져 있었다. 러시아에서 로스토프 지역과 크라스노다르 지역은 벼 재배의 가장 유망한 지역으로 간주되었다. 돈강 주변에는 <만늬취스키>, <볼셰비스키>, <로마노프스키>, <두벤쵸프스키>라는 벼농사 전문 솝호즈(국영농장)가 만들어졌다. 1980년에는 벼 수확량 138만 톤이라는 기록을 세웠으며, 이 기록은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현재 돈강 지역의 고려인은 사회, 경제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대표하고 있다. 최초의 정착민은 벼 재배자였지만 오늘날 젊은 세대의 고려인은 대학을 졸업한 후 교육, 과학, 문화, 의학, 군대, 스포츠, 법조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고려인들이 돈강 지역의 땅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돈강 지역의 고려인들은 새로운 땅에서의 고된 노동과 어려운 운명을 겪고 있다. 그들은 끈질긴 삶을 영위하며 새로운 곳에서 성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1991년 로스토프 지역 고려인 협회는 민족의 전통과 문화를 보존하고 언어를 되살리며 인종 간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창립되었다. 처음에는 다른 국적을 가지고 러시아에서 디아스포라를 생성하여 살았다. 하지만 고려인들은 이러한 민족 간의 분리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한민족의 전통을 지키지 않으면 민족이 사라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동안 다국적 사회에서 고려인의 사고방식은 소련식으로 변했고, 고려인 디아스포라는 모국어를 잃어버렸다. 그러나 언어는 국가, 정신, 세계관의 영혼이다. 지금 고려인들은 한국과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 로스토프 나돈누의 한국 문화원에서는 900명의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 다른 국적의 아이들도 한국어에 관심이 있다.

고려인들이 한인사회를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충북 청주시와 로스토프 주가 자매결연을 맺었다. 농업에 종사하는 고려인들을 돕는 비닐하우스 사업도 시행됐다. 로스토프 주는 이 사업에 악사이스키 지역의 땅 5만㎡를 지원했다고 알려졌다. 강원도는 농업기술 이전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김영술 <전남대 글로벌디아스포라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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