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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각설이
'버스킹'의 원조 '각설이'… 왜 죽지도 않고 또 왔을까
2017. 12.17. 14:00:00

각설이 품바 보존회 공연 모습. 필자 제공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 산 인물은 누구일까? 흔히 구약성경 창세기의 므두셀라를 든다. 에녹이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다. 므두셀라는 라멕을 낳고도 칠백팔십 이년 동안 아들딸을 더 낳았다. 라멕이 노아를 낳았기 때문에 그 유명한 노아의 방주가 만들어졌다. 므두셀라는 대홍수가 나던 해에 죽었다. 합하니 969살이다. 동양으로 눈을 돌리면 동방삭이 있다. 삼천갑자를 살았다. 일갑이 60년이니 18만년이다. 서왕모의 복숭아를 훔쳐 먹고 살았는데 마고가 계교를 꾸며 죽었다. 경기도 용인 탄천의 지명유래담에서는 염라대왕의 사자가 꾸민 계략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므두셀라도 동방삭도 각설이 앞에서는 명함을 못 내민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오기 때문이다. 해마다 오는 가히 불사의 인물이다. 내가 편한 자리에서 농담 삼아 하는 얘기들이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각설이는 왜 죽지 않을까? 글쎄다. 지난 칼럼에서 품바의 기원으로 각설이를 소개했고 공옥진의 비틀어 추는 춤이야말로 진정한 각설이춤이라는 얘기를 했다. 무안지역에서 실제 거주하며 노래했던 자근이패(김자근 혹은 천자근이라 한다)가 각설이패의 전통을 이어왔고 한 마을 사람이던 김시라(본명은 김천동이다)가 품바라는 모도드라마를 재창조했다는 점을 들어 주장한 얘기다.

공옥진도 실제 광주의 다리 밑에서 각설이패들과 두 번에 걸친 생활을 했기 때문에 곱사춤 등의 춤사위들을 고안할 수 있었다는 뜻이었다. 더 반복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문자 그대로 각설(却說)하고, 각설이의 기원이 걸식하는 자들에 있음은 불문가지다. 흔히 구걸이라 한다. 박전열의 연구에 의하면 종교적인 탁발의식까지 연결시킨다. 얻어먹는 것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를 두타(頭陀), 두타행(頭陀行)이라 하고 범어로는 'Dhuta'라 한다.

풍찬노숙하며 음식을 구걸하는 목적이 불도에 있다는 뜻이다. 기독교 초기의 수도자들, 불교 전반의 탁발의례가 여기에 속한다. 일부 연구자들이 각설이에 이런저런 의미를 부여하고 심지어 원효의 무애사상까지 거슬러 해석하려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단계의 연구결과들만으로는 각설이를 무한대로 확장 해석하기가 곤란하다.



구걸하던 놀이패들, 달단, 화척(禾尺), 재인(才人)들은 누구일까?

1526년 중종실록에 중요한 기록이 나온다. 유랑패들과 함께 곡예를 하고 가무를 하며 푼돈을 받아 생활하던 걸식 재인(才人)들에 대한 기사다. 이때의 재인들은 달단에서 흘러 들어온 유랑민들이라 한다. '달'은 종족 이름을 뜻하고 '단'은 오랑캐를 이르는 말이다. 곧 '타타르족'을 말하며 원나라 멸망 후 사방으로 흩어진 몽골족을 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록의 기록대로라면 이들은 절도, 방화, 살인 등을 거침없이 자행하여 많은 민폐를 끼치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주된 연행이 얻어먹는 즉 걸식에 있다는 것이고 무복(巫卜)이나 창우(倡優)를 업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점을 보고 관련 의례를 하며 노래를 하고 춤을 추어 대신 음식이나 돈을 받았다는 뜻이다.

실록에는 이를 ‘사당패, 걸립패, 무동패, 탈놀음패, 인형극패들과 함께 가무(歌舞)로 푼둔을 받아가며 생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독자적으로도 유랑했겠지만 기왕의 여러 놀이패들과 융합하거나 연대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보다 앞선 1456년 세조실록에 보면 걸식하는 자들에 대한 기사가 더 있다. 대개 백정(白丁)을 화척(禾尺)이라고 하고 혹은 재인(才人), 혹은 달단이라 칭하여 그 종류가 하나가 아니라 했다. 노래하고 춤추며 걸식하던 유랑패들이 각양의 이름으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푼돈을 받던 작악개걸자

세조실록의 기록을 좀 더 본다. 이들 재인들이 "구적(寇賊)을 행하고 혹은 악기(樂器)를 타며 구걸하는 자를 경외(京外)에서 엄히 금(禁)하여, 그것을 범한 자는 아울러 호수(戶首)를 죄 주고 또 3대를 범금(犯禁)하지 않는 자는 다시 백정이라 칭하지 말고 한가지로 편호(編戶)하게 하면 저들도 또한 스스로 이 농상(農桑)의 즐거움을 알게 되어 도적이 점점 그칠 것입니다"고 했다.

백정이라 불리던 재인들이 도둑질하거나 약탈을 하고 혹은 악기를 연주하며 구걸하는 것을 금하게 해달라는 뜻이다. 노래하고 춤추며 유랑하던 재인들이 무리를 이루어 횡행하므로 사회문제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원문에는 이들을 '작악개걸자'라 쓰고 있다. '개걸'은 구걸한다는 뜻이므로 '음악을 만들어 즉 노래, 춤, 악기 등으로 연행해 구걸'하던 무리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이 전통적인 여러 유랑패들과 연대하면서 행했을 음악형태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알기는 어렵다. 아마 관련 연구가 진행되면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지금 추적할 수 있는 것은 이후 각설이라 불리던 유랑패들의 연희 양상이 이 백정들의 유랑연희와 매우 흡사하다는 점이다.

호명하는 방식만 가지고 이를 연결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이지만 음악을 팔아 구걸한다는 맥락에서는 양자를 연결해도 별 무리는 없다. 여러 연구자들이 '각설이'라는 이름에 대해 분석하고 의미를 부여했지만 여기서는 생략한다.



박타령과 변강쇠가의 ‘각설이패’는 소멸되었을까?

각설이패에 대한 최최의 기록은 신재효가 정리한 박타령에 나온다. "놀보가 더 반겨 동자가 한 쌍이제. 그 뒤에 사람더리 꾸역꾸역 나온단디 압피 션 두 아희는 검무장이 북재비라 풍각장이 각서리패 방정시런 외쵸라니 동물이 짓그러 나오더니"라는 대목이 그것이다. 변강쇠가에서는 옹녀가 강쇠의 주검을 치우려할 때 "근쳐 마을 차져가서 삭군을 얻잣더니 마침 함 각설이패 셔이 달여드난디"라 하여 각설이가 등장한다.

이 연구를 가장 먼저 시작했던 박전열은 신재효의 사설집에 나타나는 유랑패들을 "걸인들, 각셔리패, 잡색군들, 풍각장이패, 가리내패, 거사들, 사당들" 등으로 다양하게 소개한다. 이들이 단순히 걸식만 일삼은 것이 아니라 노래와 춤을 포함한 각양의 음악을 연행하였다는 점에 무게를 둘 필요가 있다. 왕조실록에 등장하는 백정, 재인, 달단 등의 유랑연희의 맥락을 잇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근대기로 접어들며 이들 각설이패들은 점차로 와해되거나 소멸단계로 접어든다. 해방 후와 6.25 이후까지도 이들이 떼거리로 모여 살면서 걸식했다는 점은 공옥진이 일본에서 건너와 광주의 각설이패들과 함께 생활했다는 사실을 통해 소개한 바 있다. 그렇다면 각설이는 이대로 소멸되고 말았을까?



무안 일로의 '자근이패'에서 찾는 버스킹

무안 일로읍의 일명 '자근이패'가 아마도 마지막 남은 각설이패였을 것이다. 적어도 무안지역의 노년층이라면 '자근이패'들이 장타령이며 각설이타령을 부르며 남도 일대 특히 오일장터를 돌며 걸식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이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각설이라는 전통과 품바라는 난장연희를 '각설이품바'라 불러왔다. 각종 축제장이며 이벤트장에서 왕성하게 연행되는 속칭 '난장품바'들의 권위를 우리의 전통에서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그렇다면 알려진 것처럼 버스킹은 서양에서 비롯되었을까? 물론 아니다. 이른바 각설이의 전통, 더 거슬러 오르면 백정, 재인, 달단 등의 유랑연희가 버스킹의 원조격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버스킹은 '길거리에서 공연한다'는 버스크(Busk)에서 유래한 말이다. 거리에서 고용인, 물주 등을 찾으며 공연하거나 홍보하는 행위다. 음악가들이 길거리에서 공연하는 것을 통칭하는 개념이다. 하지만 그 뿌리는 거지들의 구걸행위로부터 비롯되었다. 집시족들을 버스킹의 원조라 하거나 각설이를 집시에 비유해 설명하는 예들이 이를 말해준다.



길거리 연희, 각설이에서 얻을 지혜

한 해가 시작하는가 싶더니 벌써 연말이다. 이 시기가 되면 불우한 이웃들을 돕는 행사들이 줄을 이룬다.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야말로 공동체 구성원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일 것이다. 하지만 정작 가난한 것은 시기하고 질투하고 조바심 내며 욕심 부렸던 우리 마음 아닐까? 그래서다. 이른바 노래와 음악을 팔아 얻어먹고 살던 각설이에 대한 시대적 의미를 환기해보는 것도 의미 있을 듯싶다.

예컨대 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사당패, 걸립패, 무동패, 탈놀음패, 인형극패들은 이미 우리문화의 중요한 유산으로 인정받고 있다. 유랑에 수반되었던 매춘, 걸식 등의 보고 싶지 않은 맥락들을 제거해버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에 비하면 각설이품바들의 연희는 아직도 매우 비천하고 부끄러운 장르로 취급받고 있다. 상기 연희들이 마당장르인데 비해 명실상부한 버스킹 즉 길거리 연희의 대표성을 갖는 것인데도 말이다.

시대가 변해 종된 것들이 주인 되는 세상이 되었다. 연행의 종목이나 양상은 물론 집단을 호명하는 이름들도 계속 바뀐다. 각설이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도 바뀔 필요가 있다. 패러다임이 변했다고 말하면서 머릿속은 왕조시대 그대로 유지하고 산다.

종교적 탁발에서 각설이의 의미들을 찾으려 했던 것처럼 '나를 내려놓는 방식'으로서의 연행에 각설이품바만한 것이 없다. 연말연시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의 내 역할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일 수 있다. 내 안의 꾸며진 마음들 속이는 마음들 다 내려놓고 내안의 흉한 몰골 그대로 그려내어 콧물, 눈물 흘리며 노래하고 춤추는 각설이 연희로 한바탕 놀아보면 어떨까.




남도인문학 TIP

1456년 세조실록 3월 28일자 기사 중에서 일부를 발췌 인용해둔다. 각설이의 전통을 상고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백정(白丁)을 구처(區處)하는 것입니다. 대개 백정을 혹은 '화척(禾尺)'이라 하고 혹은 '재인9才人)', 혹은 '달단'이라 칭하여 그 종류가 하나가 아니니, 국가에서 그 제민(齊民)하는 데 고르지 못하여 민망합니다.

백정(白丁)이라 칭하여 옛 이름[舊號]을 변경하고 군오(軍伍)에 소속하게 하여 사로(仕路)를 열어 주었으나, 그러나 지금 오래 된 자는 5백여 년이며, 가까운 자는 수백 년이나 됩니다.

본시 우리 족속이 아니므로 유속(遺俗)을 변치 않고 자기들끼리 서로 둔취(屯聚)하여 자기들끼리 서로 혼가(婚嫁)하는데, 혹은 살우(殺牛)하고 혹은 동량질을 하며, 혹은 도둑질을 합니다.(중략)

이어서 그 다른 군으로 왕래함을 금하며, 그 홀로 산골짜기에 거처하면서 혹 자기들끼리 서로 혼취(婚娶)하거나 혹은 도살(屠殺)을 행하며, 혹 구적(寇賊)을 행하고 혹은 악기(樂器)를 타며 구걸하는 자를 경외(京外)에서 엄히 금(禁)하여, 그것을 범한 자는 아울러 호수(戶首)를 죄 주고 또 3대(三代)를 범금(犯禁) 하지 않는 자는 다시 백정이라 칭하지 말고, 한가지로 편호(編戶)하게 하면, 저들도 또한 스스로 이 농상(農桑)의 즐거움을 알게 되어 도적이 점점 그칠 것입니다.


남도민속학회장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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