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삼의 마을 이야기>눈으로 보고 마음에 넣는 곳… 750년 역사 담았다
●나주 철야마을
수백살 느티나무·숲정이 울타리 처진 마을
송덕비·기적비·강학비·정려비·열녀비 빼곡
마을 위한 재일교포 기업인 서상록 흔적도
의병 정도홍·봉황 민간인 학살 위령비 남아
수백살 느티나무·숲정이 울타리 처진 마을
송덕비·기적비·강학비·정려비·열녀비 빼곡
마을 위한 재일교포 기업인 서상록 흔적도
의병 정도홍·봉황 민간인 학살 위령비 남아
입력 : 2025. 07. 17(목) 17:10

철야마을 숲. 마을 안과 밖을 구분하는 울타리다.
별다른 기대 없이 찾았다가 속이 꽉 찬 곳을 만날 때가 있다. 나주시 봉황면(鳳凰面) 철야(鐵冶)마을이 그런 곳이다. 지명부터 별나다. 상스러운 새 봉황이 그렇고, 산악지대도 아닌 데서 쇠를 다룬다는 것이 그렇다.
마을이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마을숲이 남다르다. 산세와 어우러진 마을도 예사롭지 않다. 오감이 반긴다.
먼저 마을숲이 빼어나다. 마을 앞에 수백 살 된 느티나무와 젊은 나무가 한데 어우러진 숲정이가 있다. 마을과 마을 밖 경계를 이루는 숲이다. 좋은 기운은 붙들고, 바깥의 나쁜 기운을 막아준다. 마을 울타리 같다. 숲에 의자도 놓여 있다. 쉼터다. 논밭 일 잠시 내려놓고 땀을 식히기에 맞춤이다.
마을 숲정이가 또 있다. 정자 만호정을 둘러싼 숲이다. 느티나무와 팽나무, 회화나무가 한데 숲을 이뤘다. 정자와 숲이 오랜 친구처럼 다정하다. 만호정(挽湖亭)에는 세월의 더께가 배어있다. 기둥과 마룻바닥의 격이 다르다. 정자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크다. 한때 무송정(茂松亭), 쾌심정(快心亭), 영평정(永平亭)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
만호정에선 조선시대 자치규약인 향약을 시행했다. ‘정사기(亭史記)’와 ‘철야대동계안(鐵冶大同契案)’을 통해 확인된다. 크고 작은 일을 서로 논의하고 도왔다. 빼어난 시와 글을 적은 편액도 많이 걸려 있다. 옛사람의 풍류와 교류, 쉼터 역할을 한 융복합 정자다.
만호정은 자작일촌을 이룬 이천서씨, 진주정씨, 해남윤씨 세 성씨가 관리했다고 한다. 고려 중기에 처음 지어졌다는데, 기록으로 확인되지는 않는다. 정자 앞에 선 작은 돌기둥이 눈에 띈다. 무엇에 쓰는 물건일까?
“하마석으로도 썼지만, 본디 ‘징벌대’입니다. 큰 죄를 짓거나 못된 일을 한 사람을 잡아다 묶어놓고 벌을 줄 때 썼어요. 마을 전통의 향약과 관련 있습니다.” 윤여정 나주문화원장의 말이다.
마을과 뒷산 덕룡산도 조화를 이룬다. 덕룡산골에서 내려온 물이 마을과 들을 고루 적신다. 물은 영산강으로 흘러간다. 영산강 하구에 둑을 쌓아 막기 전엔 이 마을까지 배가 드나들었단다. 그땐 배 타고 목포를 오갔다고 한다. 강변에서 재첩과 조개도 많이 잡았다는데, 이제는 옛이야기가 됐다.
마을에 비석도 많다. 송덕비와 기적비, 강학비, 정려비, 열녀비 등등. 주인공도 이천서씨, 진주정씨, 해남윤씨, 남평문씨, 파주염씨 등이다. 혼인한 지 몇 달 만에 남편상을 당하고, 따라 죽었다는 열부도 있다. 하나같이 애틋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재일교포 기업인 서상록(1910~1996)을 기리는 비석도 있다. 이천서씨 서상록은 10대 중반 일본으로 건너갔다. 탄광과 봉제공장에서 일하며 관서공업학교를 졸업했다. 철강회사에서 일할 때 특수기술을 개발, 부자가 됐다. 나고야에 이천공업주식회사를 세웠다.
회사 이름에 자신의 본관을 넣은 것이다. 이천전기, 이천제강, 이천물산, 이천중기 등을 연달아 창업하며 그룹으로 발전시켰다. 광복 이후엔 베(廣木) 20만 필을 정부에 기증했다. 헐벗은 우리 국민을 위해서였다. 마산에 방직공장, 인천에 이천전기도 세웠다.
서상록은 고향을 위한 일에 팔을 걷었다. 마을 진입로를 사들여 지자체에 기부채납했다. 전기도 일찍 끌어들여 불을 밝혔다. 1970년대 중반 나주에 금하장학회를 설립했다. 40여년 동안 장학금 60억원을 지급했다. 나주 남산공원에 있던 금하회관도 나주시에 기부했다. 지금도 시민회관으로 쓰인다.
나주고등학교와 봉황초등학교 교사 신축, 봉황면복지관 건립, 남산공원 가꾸기, 만호정 보수 등에도 힘을 보탰다. 그의 공적을 적은 기적비(記績碑)가 만호정 앞, 송덕비(頌德碑)가 철천사 앞에 세워져 있다. 서상록은 말년에 나주로 돌아와 동신대 부근에 선조를 모시는 경애원을 만들었다. 공원이 된 경애원에도 나주시민이 세운 공적비가 있다.
철야마을에 사당 철천사와 용산사도 있다. 철천사(哲川祠)는 마을에 먼저 들어와 정착한 입향조(入鄕祖) 이천서씨 서린(1222~1305)을 배향하고 있다. 용산사(龍山祠)에선 정준일(1547~1623)과 아들 정현(1570~1616) 제사를 지낸다. 정준일은 임진왜란 때 고경명과 함께 금산전투에 나갔다.
철야마을은 전라남도 나주시 봉황면 철천리에 속한다. 철야(鐵冶)는 예부터 철이 많이 났다고 이름 붙었다는데,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
마을에 정도홍(1878~1951) 선생 창의비도 있다. 학고 정도홍은 의병을 일으켜 일제에 맞섰다. 자신의 논밭을 팔아 자금을 마련하고 무기를 만들었다. 만호정에 설치된 일제 유치소를 부수고,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희생된 지역민을 도왔다. 상해독립군 활동자금을 대는 등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봉황 민간인 학살 위령비도 마을에 있다. 한국전쟁 전후 수십 명이 군경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빨치산 부역자 색출은 만호정 앞에서 이뤄졌다. 위령비에는 그때 무고하게 희생된 주민 이름이 새겨져 있다.
지척의 미륵사도 귀한 절집이다. 마애 칠불상과 석조 여래입상이 보물로 지정돼 있다. 칠불상은 1m 남짓의 고깔 모양 바위 비탈면에 불상 7구가 조각돼 있다. 고려 중기 조각으로 추정한다. 3층 모양 전각으로 보호한 여래입상은 높이 5.38m로 고려 초기 만들어졌다.
눈으로 보고 마음에 담을 데 많은 철야마을이다. 담벼락에 쓴 글씨그림 ‘꽃길만 걸어요’도 멋스럽다. 신발을 신고 걷는 글씨가 웃음짓게 한다. 몹시도 더운 날, 골골샅샅 다니며 땀을 많이 쏟았지만 마음 뿌듯하다. 횡재라도 한 것 같다. 참 좋은 마을이다.
이돈삼/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
마을이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마을숲이 남다르다. 산세와 어우러진 마을도 예사롭지 않다. 오감이 반긴다.
먼저 마을숲이 빼어나다. 마을 앞에 수백 살 된 느티나무와 젊은 나무가 한데 어우러진 숲정이가 있다. 마을과 마을 밖 경계를 이루는 숲이다. 좋은 기운은 붙들고, 바깥의 나쁜 기운을 막아준다. 마을 울타리 같다. 숲에 의자도 놓여 있다. 쉼터다. 논밭 일 잠시 내려놓고 땀을 식히기에 맞춤이다.
마을 숲정이가 또 있다. 정자 만호정을 둘러싼 숲이다. 느티나무와 팽나무, 회화나무가 한데 숲을 이뤘다. 정자와 숲이 오랜 친구처럼 다정하다. 만호정(挽湖亭)에는 세월의 더께가 배어있다. 기둥과 마룻바닥의 격이 다르다. 정자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크다. 한때 무송정(茂松亭), 쾌심정(快心亭), 영평정(永平亭)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
만호정에선 조선시대 자치규약인 향약을 시행했다. ‘정사기(亭史記)’와 ‘철야대동계안(鐵冶大同契案)’을 통해 확인된다. 크고 작은 일을 서로 논의하고 도왔다. 빼어난 시와 글을 적은 편액도 많이 걸려 있다. 옛사람의 풍류와 교류, 쉼터 역할을 한 융복합 정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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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호정. 옛사람의 풍류와 교류, 쉼 그리고 철야마을 자치규약인 향약이 시행된 다기능 융복합 정자다. |
“하마석으로도 썼지만, 본디 ‘징벌대’입니다. 큰 죄를 짓거나 못된 일을 한 사람을 잡아다 묶어놓고 벌을 줄 때 썼어요. 마을 전통의 향약과 관련 있습니다.” 윤여정 나주문화원장의 말이다.
마을과 뒷산 덕룡산도 조화를 이룬다. 덕룡산골에서 내려온 물이 마을과 들을 고루 적신다. 물은 영산강으로 흘러간다. 영산강 하구에 둑을 쌓아 막기 전엔 이 마을까지 배가 드나들었단다. 그땐 배 타고 목포를 오갔다고 한다. 강변에서 재첩과 조개도 많이 잡았다는데, 이제는 옛이야기가 됐다.
마을에 비석도 많다. 송덕비와 기적비, 강학비, 정려비, 열녀비 등등. 주인공도 이천서씨, 진주정씨, 해남윤씨, 남평문씨, 파주염씨 등이다. 혼인한 지 몇 달 만에 남편상을 당하고, 따라 죽었다는 열부도 있다. 하나같이 애틋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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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하 서상록의 공적을 적은 기적비. 만호정 앞에 서 있다. |
회사 이름에 자신의 본관을 넣은 것이다. 이천전기, 이천제강, 이천물산, 이천중기 등을 연달아 창업하며 그룹으로 발전시켰다. 광복 이후엔 베(廣木) 20만 필을 정부에 기증했다. 헐벗은 우리 국민을 위해서였다. 마산에 방직공장, 인천에 이천전기도 세웠다.
서상록은 고향을 위한 일에 팔을 걷었다. 마을 진입로를 사들여 지자체에 기부채납했다. 전기도 일찍 끌어들여 불을 밝혔다. 1970년대 중반 나주에 금하장학회를 설립했다. 40여년 동안 장학금 60억원을 지급했다. 나주 남산공원에 있던 금하회관도 나주시에 기부했다. 지금도 시민회관으로 쓰인다.
나주고등학교와 봉황초등학교 교사 신축, 봉황면복지관 건립, 남산공원 가꾸기, 만호정 보수 등에도 힘을 보탰다. 그의 공적을 적은 기적비(記績碑)가 만호정 앞, 송덕비(頌德碑)가 철천사 앞에 세워져 있다. 서상록은 말년에 나주로 돌아와 동신대 부근에 선조를 모시는 경애원을 만들었다. 공원이 된 경애원에도 나주시민이 세운 공적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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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사.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 참가한 정준일과 그의 아들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
철야마을은 전라남도 나주시 봉황면 철천리에 속한다. 철야(鐵冶)는 예부터 철이 많이 났다고 이름 붙었다는데,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
마을에 정도홍(1878~1951) 선생 창의비도 있다. 학고 정도홍은 의병을 일으켜 일제에 맞섰다. 자신의 논밭을 팔아 자금을 마련하고 무기를 만들었다. 만호정에 설치된 일제 유치소를 부수고,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희생된 지역민을 도왔다. 상해독립군 활동자금을 대는 등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봉황 민간인 학살 위령비도 마을에 있다. 한국전쟁 전후 수십 명이 군경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빨치산 부역자 색출은 만호정 앞에서 이뤄졌다. 위령비에는 그때 무고하게 희생된 주민 이름이 새겨져 있다.
지척의 미륵사도 귀한 절집이다. 마애 칠불상과 석조 여래입상이 보물로 지정돼 있다. 칠불상은 1m 남짓의 고깔 모양 바위 비탈면에 불상 7구가 조각돼 있다. 고려 중기 조각으로 추정한다. 3층 모양 전각으로 보호한 여래입상은 높이 5.38m로 고려 초기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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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야마을 담장에서 만난 글씨그림 ‘꽃길만 걸어요’. 신발을 신고 걷는 글씨가 웃음짓게 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