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열며·이승현>여름은 동사의 계절
이승현 강진 백운동 전시관장
입력 : 2025. 07. 02(수) 16:27
이승현 강진 백운동 전시관장.
‘여름은 동사의 계절, 뻗고, 자라고, 흐르고, 번지고, 솟는다.’가 올여름 광화문 교보생명 외벽에 걸리는 현판 글귀로 선정되어 게시되었다. 이재무 시인의 ‘나는 여름이 좋다’에서 가져왔다.

여름은 덮고 지치는 계절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변화하며 성장하는 시간으로 바라보고 각자의 무궁무진한 가능성과 에너지를 끊임없이 펼쳐나가자는 메시지를 담았다고 한다.

문안 선정은 시인, 소설가, 카피라이터, 언론인 등으로 구성된 ‘광화문 글판 선정위원회’와 시민 참여를 통해 다가올 계절과 사회상을 고려하여 선정된다. 필자도 선정위원회에 참가해 본 적이 있는데 많을 때는 2000편 정도 접수될 정도로 호응이 뜨겁다. 선정된 문안은 전국 교보생명 빌딩에 걸리는데 광주 금남로 사옥에서도 볼 수 있다. 35년간 120여 편의 문안이 선정, 게시되어 시민들에게 소중한 힘이 되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사랑받는 문구는 나태주 시인의 ‘풀꽃’ 중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와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 중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오랫동안 시민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고 힘이 되어 준 광화문 글판 명문들을 더 소개한다.

정호승 시인의 ‘풍경 달다’ 중 “먼 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찾아간 줄 알아라.”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 중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저 안에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

이성진 ‘벌레 먹은 나뭇잎’ 중 “나뭇잎이 벌레 먹어서 예쁘다/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정희성 시인의 ‘숲’ 중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 중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김경인 시인의 ‘여름의 할 일’ 중 “올여름의 할 일은 /모르는 사람의 그늘을 읽는 일.”

시바타 도요의 ‘약해지지만’ 중 “있잖아, 힘들다고 한숨짓지만/햇살과 바람은/한쪽 편만 들지 않아.”

아!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격려가 되는 언어들인가? 주옥같은 문구들이 어느 순간 가슴에 와닿아 불가에서 말하는 화두처럼 길이 되고 지혜가 되어 준다. 윗글에서 소개한 시인 중 몇 분이 백운동 시를 쓰셨는데 백운동 원림을 경영하는 필자에게 힘를 솟구치게 해준다.

정현종 시인의 ‘마음의 과잉을 어쩔 줄 모르겠네!’ 중 “누가 숨겨 놓았는지/백운동 별서정원./필경 월출산이 숨겨 놓았고/오래전부터/우리 마음이 숨겨 놓았으며/하늘도 합심해서/비밀을 지키고 계시니/쉬 발설하기 어렵네./저 불멸의 숲 요정들을/여기서 만나니/숲이야 계곡이야/꿈의 도가니/내 마음 오래전부터/ 여기 있었네./우리 꿈, 세상 이래 여기 깊어 있었네./꿈도 마음도/여기 참 많이 붐벼/이 과잉을 어쩔 줄 모르겠네.”

도종환 시인의 ‘산다음’ 중 “모멸의 시간을/담대하게 지나는 그대여/삶의 곳곳은 낭떠러지이나/벼랑을 만나 더욱 수려해진/월출산 옥판봉 같은 산도 있으니/바위틈에서도 우뚝하게 살고 있는/팽나무 같은 나무도 있으니/상처 많은 그대여/길이 보이지 않아도 동백은 피고/길이 없어져도 별은 반짝이리니/산다화처럼 피어서/이 세월을 견디시게/나는 유거에서/그대는 초당에서.”

시인들의 언어는 아름답고 가치 있다. 방문객들에게 넌지시 길을 귀띔해주고 마음의 그늘도 되어 준다.

요사이 품위도, 사랑도, 위트도, 풍류도, 영감도 없는 더럽고 시끄럽고 험악한 언어들이 시중에 넘쳐나 걱정스럽다. 몇몇 지도층 인사들의 언어는 국민을 너무도 부끄럽게 하고 자질을 의심케 했다. 시간, 감정, 돈을 쏟아부어 뱉어내고 만든 거짓과 증오의 언어가 난무한다. 이를 공유하는 한통속끼리 연대와 유대는 단단히 결속되어 갈등과 불신은 커지고 풍속은 너무나 사나워지고 폭동으로 이어진다. 이들이 쓰는 언어는 놀랍게도 유사하다. 마치 종교의 ‘말씀’이나 ‘음성’처럼 예배하고 이행한다. 이스라엘이나 러시아가 일으킨 전쟁도 말씀에서 비롯되었다. 언어가 폭동, 혁명, 전쟁의 명분과 연료가 된 역사는 많다. 어마어마한 위력을 가진 언어가 갈수록 천하고 너절해져 오늘날 우리 사회가 처한 심각한 병리의 근원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세상 사람들이 시적 언어를 쓰고 순진한 감성이 쑥쑥 자랐으면 좋겠다. 아름다운 말과 글, 뜻을 전하는 광화문 글판의 경구들은 생각 깊은 사람들에게는 호수에 던진 조약돌처럼 평화로운 파문을 일으킨다. 그리고 필시 세상에 긍정의 동사가 되어 파동을 줄 것이다. 나의 올여름 동사는 무엇일까? 뻗지 못한 것은 닫혀서 일 것이고, 흐르지 못한 것은 막았기 때문일 것이고, 자라지 못한 것은 벽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솟구치지 못한 것은 웅크렸기 때문일 것이다. 장마와 불볕더위를 견디고 달라진 세상을 살아야 할 올여름, 나와 가족, 친구, 이웃, 국가가 뻗고, 자라고, 흐르고, 번지고, 솟아야 할 것이 무언인지, 그러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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