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못 보고 눈 감은 아버지 한 대신 풀어드리고파"
● 6·25기획 실향민에게 듣는다 <하>
평안북도 강계군 출신 김명숙(89)씨
12살이던 해방 2년 뒤, 가족과 함께 남하
전쟁 직접 피해보단 숨어 살던 고통 커
아버지 열의로 46년간 교직 인생 지내
"평화통일 위해 서로 양보했으면 바람"
입력 : 2024. 06. 26(수) 18:26
평안북도 강계군 출신 김명숙(89)씨는 6·25 74주년을 맞은 지난 25일 오후 자택에서 파란만장했던 89년 간의 삶을 회상하고 있다. 박찬 기자
6·25 74주년을 맞아 지난 25일 오후 만난 김명숙 씨는 89세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정정했다. 생존해 있는 세 명의 광주평북도민회 회원 중 한 명인 평안북도 강계군 출신 김씨는 이남길에 올라 남한에 정착한 과정부터 교사의 길로 들어서 교장 선생이 되기까지 세월의 잔상을 차분히 설명했다.

김씨는 해방 2년 뒤인 1947년 12살 때 아버지, 어머니, 4살 남동생과 함께 남한 땅을 밟았다. 김씨 가족이 남하한 이유는 북한 체제의 토지개혁으로 인해 숙청 희생자가 돼 전 재산을 몰수당하면서 삶의 터전을 잃었기 때문이다.

김씨는 “당시 북한에는 소작과 지주라는 개념이 있었는데 북한 정권에 ‘지주’로 간주 되면 모든 땅을 빼앗은 뒤 소작하는 신세로 내몰렸다. 또 을의 입장이었던 소작 신분 농민들이 지주로 신분상승을 이뤘는데도 기를 못 필 것을 염두에 둬 지주 출신의 농민을 기존 거주지와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강제 이주시켰다”며 “이로 인해 일가족이 풍요로웠던 강계군에서 외진 벽동군으로 쫓겨났다”고 했다.

이어 “일생의 노력을 쏟아 가꾼 땅과 평생 땀 흘려 모은 재산을 모두 국가에 빼앗겼다는 아버지의 분노와 치욕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결국 일가족이 남하를 결정하게 된 배경이었다”고 덧붙였다.

남하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김씨는 “첫 번째 시도 때는 북한 해경에 붙잡혀 황해남도 해주로 연행됐고 풀려난 뒤 몇 개월 간의 준비를 거쳐 시도한 두 번째 남하는 우여곡절 끝에 성공했다”고 회상했다. 이어 “두 번째 시도 때도 해경이 붙었지만 결국 어선이 38선을 넘자, 그들은 포기하고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남한에 정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터진 한국전쟁은 김씨의 삶을 더 고달프게 만들었다. 김씨는 피신해 있어 전쟁으로 인한 직접적 피해는 없었지만 숨어 지낸 고통이 컸다.

그는 “한국전쟁이 터지자 아버지는 부산으로 피난 길에 올랐고 남은 가족들을 곡성으로 피신시켰다. 아버지는 평안도 사투리를 절대 못 고치셨고 이로 인한 주변의 핍박과 멸시는 당연지사였다. 우리를 떨어트려 놓는 게 더 안전하다고 판단하셨던 거 같다”며 “한국전쟁 기간과 전쟁 복구 기간까지 온 가족이 주민증을 모두 파기하고 북한 출신이라는 걸 숨기고 살아야 했다”고 토로했다.

이어 “아버지는 조국에 땅을 뺏기고 실패자 신세로 쫓겨났다는 복수심에 경제적으로 꼭 성공해 북한으로 귀향하는 꿈을 품었고 이는 온 가족이 평생을 절약하며 어렵게 살아야 했던 이유가 됐다”며 “재산을 모으는 데 혈안이었던 아버지 때문에 평소 죽으로 끼니를 때우는 날이 다반사였고 중학교 재학시절 아버지가 용돈을 주지 않아 소풍, 극장 한번 못 갔다. 심지어 공책 살 돈도 없어 남은 종이를 쓰곤 했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김씨는 순천사범학교 졸업 후, 조선대에 입학했고 이후 임용고시를 통해 고등학교 교사가 됐다. 1999년 정년퇴직 전까지 여럿 초·중·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대촌중학교 교감, 송정중학교 교장, 월계중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그의 46년 6개월 간의 교직 인생은 아버지의 경제적 집념에서 비롯됐다.

그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어느 날 북한 출신이던 교사가 한 은행에 취직 시켜 준다고 해 돈을 벌고 싶어 아버지께 말했지만, 아버지는 곧바로 냄비를 던지며 격노했다”며 “당시 아버지는 시집가면 있었던 직업도 사라지지만 교사를 하면 혼자로 남더라도 돈 걱정 없이 평생 소속감을 갖고 살 수 있다고 하셨다”고 말했다.

이어 “아버지가 그때 해주셨던 말씀과 사범학교 입학을 강요한 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참 고맙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김씨는 최근 경색국면에 있는 남북관계에 대해 실망과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그는 “현 정부의 대북정책은 그동안 쌓아 놓은 모든 평화의 불길을 꺼지게 만들 만큼 적대적”이라며 “북한 출신의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통일 조국을 영영 보지 못하고 눈을 감게 될 거 같아 가슴 아프다”고 통탄했다.

김씨의 소원은 고향 땅을 다시 밟지 못하고 눈 감은 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리는 것이다.

그는 “아버지는 살아생전 꼭 부를 모아 성공한 사람으로 북한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며 “결국 1947년도 남하 이후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의 뜻을 잇지 못하고 함께 남한 땅에 묻힐 거 같아 송구스럽다”고 말했다.

이어 “아버지는 북한을 떠나기 전 강계군에 호텔만한 큰 집을 지어놓으셨는데 그 건물이 인민학교로 탈바꿈돼 이용되고 있다고 들었다”며 “살아생전 꼭 보고 싶어 하셨던 그곳에 가지 못하고 영면하신 아버지의 뜻을 받아 죽기 전에 그곳을 직접 가보는 게 꿈이다”고 밝혔다.
박찬 기자 chan.park@jnilbo.com
사회일반 최신뉴스더보기

기사 목록

전남일보 PC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