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에세이·김영석> 매화이야기
김영석 시인·광주문협회 사무처장
입력 : 2022. 12. 29(목) 13:18

김영석 시인·광주문인협회 사무처장
매화하면 춘설에 피는 꽃으로 시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시상에 젖는 꽃이다. 화가나 사진작가 역시 화폭에 담아보고 순간을 놓칠세라 촬영하는 중요한 대상이다. 매화는 눈발이 흩날리는 이른 봄부터 꽃을 피운다. 그러다 보니 많은 이들이 대지에 생명이 깨어남을 알려주는 첫 신호를 매화로부터 듣는다.
매화는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수수하지도 않는 품격 높은 동양의 꽃이다.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과 일본 모두가 좋아한다. 그래서 매화가 필 때면 광주에서 가까운 광양이 꽃구경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본인 역시 매년 광양을 찾아 매화꽃을 구경하고 구례 산수유 축제까지 즐겨 보곤 했다.
중국 쓰촨이 고향인 매화나무는 오래전부터 중국 사람들이 곁에 두고 아끼는 나무였다. 처음 사람과의 인연은 꽃이 아니라 열매로 출발했다. 청동기 시대에는 소금과 함께 식초를 만드는 원료로서 매실을 귀하게 썼다
‘시경’ 국풍편에 보면 ‘매실다기’란 이름으로 꽃이 아니라 열매부터 등장한다. 매실은 차츰 약으로 이용된 것이며, 신농본초경에는 약효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나온다. 우리나라 동의보감에도 불에 쬐어말린 오매, 소금에 절인 백매 등 매화나무 열매에 대한 약효를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오늘 날 매실은 피로 회복은 물론 해독작용, 위장장애, 피부미용, 항암 효과까지 건강식품의 왕좌를 차지하고 있다.
매화나무는 매실이용과 함께 차츰 꽃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고 매화가 관상 식물로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은 한무제 (기원전 141~87)때 상림원에서 심기 시작하면서부터 이후 매화는 시인과 묵객들이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소재로서 선비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이후 송나라에 들어오면서 문학작품 속에서도 활짝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매화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비교적 이른 시기이다. 고구려 대무신왕 24년의 삼국사기기록에서 매화를 찾을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모랑의 집 매화나무가 꽃을 피웠네’라는 시가 있다. 이를 미루어 볼 때 적어도 삼국시대 초기 이전에 매화 문화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매화는 중국을 떠나 한국으로 건너 오면서 몸만 달랑 온 것이 아니다. 사람과 맺은 소중한 인연도 고스란히 함께 갖고 왔다.
하지만 매화가 널리 알려지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시대까지 매화의 흔적은 그리 많지 않다. 고려후기에 들어오면서 매화는 서서히 선비들의 작품 속에 녹아 들어갔다.
그래도 매화가 만개한 시기는 아무래도 조선왕조에 들어오면서 부터다. 난초, 국화, 대나무와 더불어 사군자의 첫머리에 꼽히고 세한삼우 송죽매로 자리를 차지하면서 매화는 조선사회를 대표하는 지식인들의 문화이자 멋이었다.
매화를 노래한 수많은 조선의 선비들 중에 퇴계 이황만큼 매화 사랑이 각별했던 이도 없다. 매화 시 91편을 모아 ‘매화시집’이라는 시집으로 묶어두었고 무려 107편의 매화 시를 남겼다.
그는 매화를 그냥 매화로 부르기조차 삼갔다. 퇴계 시 속의 매화는 흔히 매형 아니면 매군, 때로는 매선이 되기도 했다. 매화나무는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으며 수많은 품종이 있고 쓰임에 따라 매실, 수확을 목적으로 심는 실매와 꽃을 보기 심는 화매로 크게 분류한다. 그래서 나무 이름도 매실나무와 매화나무 양쪽을 다 쓴다.
바야흐로 겨울이 익어가면서 지난 주 광주와 전남에 이례적으로 많은 눈이 내렸다. 영하 10도 아래로 떨어지는 동장군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하지만 ‘기울면 차고 차면 다시 기우는 것’이 우주 삼라만상의 이치다.
봄은 이미 우리 눈앞에 있고 지금의 겨울은 다가올 봄에 대한 준비일 뿐이다. 다가오는 2023년은 검은 토끼의 해라고 한다. 내년에 피는 매화의 향기가 검은 토끼의 기운으로 1000리를 덮어 한반도와 지구촌이 신비로운 매향에 가득 담기길 기대한다.
편집에디터
매화는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수수하지도 않는 품격 높은 동양의 꽃이다.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과 일본 모두가 좋아한다. 그래서 매화가 필 때면 광주에서 가까운 광양이 꽃구경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본인 역시 매년 광양을 찾아 매화꽃을 구경하고 구례 산수유 축제까지 즐겨 보곤 했다.
중국 쓰촨이 고향인 매화나무는 오래전부터 중국 사람들이 곁에 두고 아끼는 나무였다. 처음 사람과의 인연은 꽃이 아니라 열매로 출발했다. 청동기 시대에는 소금과 함께 식초를 만드는 원료로서 매실을 귀하게 썼다
‘시경’ 국풍편에 보면 ‘매실다기’란 이름으로 꽃이 아니라 열매부터 등장한다. 매실은 차츰 약으로 이용된 것이며, 신농본초경에는 약효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나온다. 우리나라 동의보감에도 불에 쬐어말린 오매, 소금에 절인 백매 등 매화나무 열매에 대한 약효를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오늘 날 매실은 피로 회복은 물론 해독작용, 위장장애, 피부미용, 항암 효과까지 건강식품의 왕좌를 차지하고 있다.
매화나무는 매실이용과 함께 차츰 꽃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고 매화가 관상 식물로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은 한무제 (기원전 141~87)때 상림원에서 심기 시작하면서부터 이후 매화는 시인과 묵객들이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소재로서 선비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이후 송나라에 들어오면서 문학작품 속에서도 활짝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매화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비교적 이른 시기이다. 고구려 대무신왕 24년의 삼국사기기록에서 매화를 찾을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모랑의 집 매화나무가 꽃을 피웠네’라는 시가 있다. 이를 미루어 볼 때 적어도 삼국시대 초기 이전에 매화 문화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매화는 중국을 떠나 한국으로 건너 오면서 몸만 달랑 온 것이 아니다. 사람과 맺은 소중한 인연도 고스란히 함께 갖고 왔다.
하지만 매화가 널리 알려지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시대까지 매화의 흔적은 그리 많지 않다. 고려후기에 들어오면서 매화는 서서히 선비들의 작품 속에 녹아 들어갔다.
그래도 매화가 만개한 시기는 아무래도 조선왕조에 들어오면서 부터다. 난초, 국화, 대나무와 더불어 사군자의 첫머리에 꼽히고 세한삼우 송죽매로 자리를 차지하면서 매화는 조선사회를 대표하는 지식인들의 문화이자 멋이었다.
매화를 노래한 수많은 조선의 선비들 중에 퇴계 이황만큼 매화 사랑이 각별했던 이도 없다. 매화 시 91편을 모아 ‘매화시집’이라는 시집으로 묶어두었고 무려 107편의 매화 시를 남겼다.
그는 매화를 그냥 매화로 부르기조차 삼갔다. 퇴계 시 속의 매화는 흔히 매형 아니면 매군, 때로는 매선이 되기도 했다. 매화나무는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으며 수많은 품종이 있고 쓰임에 따라 매실, 수확을 목적으로 심는 실매와 꽃을 보기 심는 화매로 크게 분류한다. 그래서 나무 이름도 매실나무와 매화나무 양쪽을 다 쓴다.
바야흐로 겨울이 익어가면서 지난 주 광주와 전남에 이례적으로 많은 눈이 내렸다. 영하 10도 아래로 떨어지는 동장군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하지만 ‘기울면 차고 차면 다시 기우는 것’이 우주 삼라만상의 이치다.
봄은 이미 우리 눈앞에 있고 지금의 겨울은 다가올 봄에 대한 준비일 뿐이다. 다가오는 2023년은 검은 토끼의 해라고 한다. 내년에 피는 매화의 향기가 검은 토끼의 기운으로 1000리를 덮어 한반도와 지구촌이 신비로운 매향에 가득 담기길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