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뉴욕 맨해튼 연방 광장에 길이 36m, 높이 3.6m의 오목한 강철판이 설치되었다. 일상적 공간을 대담하게 가로 지르는 이 녹슨 대형 철판에 대해 "보행을 방해하는 폭력적 점거", "정부청사로 대변되는 국가권력을 향한 정치적 투쟁" 등 존폐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결국 이 작품은 법적 소송과 공청회 등의 과정을 거쳐 철거되었다.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의 '기울어진 호'는 8년 간 논쟁 끝에 추방의 운명을 맞이한 것이다. 이 때 리처드 세라는 법정에서 "작품을 설치된 장소에서 제거하는 것은 그것을 파괴하는 행위"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리처드 세라가 각인시킨 '장소 특정성'은 1970년대 이후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하게 된다. 20세기 초 모더니즘 미술은 장소와 연관성이 제거된 작품 자체의 자율성과 순수성을 최고 가치로 여겼다. 모더니즘을 견인했던 화이트큐브 미술관이 전시공간의 규격화와 몰 개성화를 비롯해 사회와 괴리된 공간으로 인식되었으며,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작품이 놓이는 장이 외부로 전환된 것이다. 장소 특정적 미술은 이후 대지미술, 프로세스 아트 등 포스트모더니즘 흐름 속에서 변화 발전하면서 '외부'와 상호작용하는 미술 실천 영역으로 부각되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동시대 미술 현장에서 장소 특정적 작업은 더욱 다각적·적극적으로 실행되고 있으며, 광주비엔날레 신작 프로젝트 'GB커미션'은 이를 최대치로 구현한 사례이다.
5·18민주화운동의 상처를 예술로 승화하고자 태동한 광주비엔날레는 1964년 개원했으나 함평으로 2007년 이전하면서 오랜 시간 비어있었던 구 국군광주병원을 '지금, 여기'로 소환했다.
5·18 당시 계엄사에 연행돼 심문하는 과정에서 고문과 폭행으로 부상당한 시민들이 치료 받았던 곳에서 과연 어떠한 미술의 언어가 어떻게 그 슬픈 역사와 결합되었을까?
2011년 베니스비엔날레 영국관 참여 작가였던 마이크 넬슨(Mike Nelson)은 구 국군광주병원의 물질성에 주목한다. 무언의 증인인 건물 부속품을 제거하고 이를 재구성하는 행위에서 기억과 현존성을 가시화했다. 카데르 아티아(Kader Attia)는 병원 등록과의 고요함과 어두움이 교차하는 7개의 방에 의자와 의족 설치 작품으로 트라우마와 대면하게 한다. 시오타 치하루(Chiharu Shiota)는 성경책의 낱장들과 실타래를 복잡하게 엮어내면서 영혼들이 공명하는 초현실적인 세계를 창출했다. 이곳에서는 세월 속에서 켜켜이 쌓인 먼지와 잔해까지도 역사의 잔상이자 증언이며 미술의 오브제로 작동한다.
권미원은 그의 저서 '장소 특정적 미술'에서 미술의 장소는 단순히 물리적인 장이 아니라, 사회·정치·역사적인 거대 서사가 생산되는 곳이라고 말한다. 미술이라는 매개체가 구 국군광주병원에서 시공간을 초월한 무한하고 다층적인 이야기들을 재생하고 증식시키듯 말이다.
도시 역사와 교류하는 장소 특정적 미술은 때론 공동체의 삶에 침투하기도 한다. 2012년과 2016년 광주비엔날레 전시 장소로 서구문화센터 앞 전광판이 활용되었는데 커뮤니티 삶 속에 자리한 매체의 특성상 미술과 전략적 제휴가 수월했다.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텍스트 작업으로 불특정 다수에게 소구해온 제니 홀저(Jenny Holzer)는 '광주를 위하여' 작품에서 광주와 시민들을 미술의 맥락 안에 직설적으로 개입시켰으며, 아흐멧 우트(Ahmet Öğüt)는 진압 경찰에게 희생당한 이스탄불 초등학생이 최루탄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하는 방법을 설명하는 영상작 '단결된'을 통해 광주의 정체성을 환기시켰다. 즉 일상적 장소가 미술과 화학작용하면서 도시가 추구해온 비전을 발산하는 플랫폼으로 변이된 것이다. 클레어 비숍(Claire Bishop)이 주창한 우리 사회 근본적인 문제들이 제안되는 '사회적인 전환'이 일어난 셈이다.
"예술은 정치가 되고 정치는 예술이 될 것"이라며 요셉 보이스(Joseph Beuys)가 공언했듯이, 미술이 서술구조가 되면서 순수성이라는 명분으로 단절되었던 미술의 공간 또한 사회적·물리적으로 개방되었음을 체감한다. 이젠 관람자는 시공간을 유영하고 횡단하는 '장소'로 내딛기만 하면 된다. 미술이 구축한 그 '장소'가 유토피아 혹은 디스토피아일지언정 우리는 열린 마음만 있으면 충분하다.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