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창·하정호>다시 교육의 본질로, 교육은 대화다
하정호 광주시교육청 공무원
입력 : 2024. 11. 17(일) 19:02
하정호 광주시교육청 공무원
지난 토요일(16일), 올해도 작년처럼 ‘광주교육 협치한마당’이 열렸다. 학부모와 학생, 여러 단체들이 공연과 발표대회, 59개의 전시와 체험 부스를 종일토록 엮어내었다. 뱀처럼 꼬리를 길게 늘어뜨린 사람들 사이사이로 부모의 손을 잡은 아이들이 헤집고 다니기 바빴다. ‘우리가 직접 한다’는 의미의 ‘우직한 한마당’에서 학생들은 마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친구와 어른들 앞에서 자랑했다. 학부모 동아리들은 알록달록한 천으로, 도예나 라탄 공예, 가죽 공예 등등으로 부스를 화려하게 치장하고 꼬마 손님들을 맞았다. 기후위기 비상행동실천단들은 쌀뜨물로 비료를 만들고, 천연 주방세제도 만들어 보이며 플라스틱 없는 세상을 꿈꾸었다. 하고 싶은 말들을 붙인 전시와 체험 부스로 사람들이 다가올 때마다 했던 말을 하고 또 해야 했다. 지치고 힘들어도, 그래도 좋았다. 한 해 동안 했던 일들을 내보이며 자신의 무대로 관객을 초대할 수 있어 좋았고, 언젠가는 그들과 같은 무대에 설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협치한마당 이틀 전에는 수능 시험이 있었다. 지난 12년 공교육의 결과를 수험생의 등짝에 등급과 점수로 찍어내는 날이었다. 단 하루 그 시험을 위해 자신의 소질과 적성도 모른 채, 갈 곳 몰라 하면서 삶을 유예해 왔던 학생들이 잠시 족쇄에서 벗어난 날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제는 그 시험을 ‘순응 시험’이라고도 부른다. 근대산업사회의 노동자들을 훈육할 때에나 적합했던 표준획일화 교육이 더 이상 필요치 않다는 것을, 그런 순응은 오히려 살아갈 힘조차 빼앗고 만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그래도 바다로 뛰어드는 나그네쥐들처럼 올해도 50만 명이 넘는 학생들이 순응 시험의 대열로 뛰어들었다.

나그네쥐들은 개체수가 늘어 먹고살기가 힘들어지면 사방으로 흩어져 새로운 서식지를 찾는다. 물을 만나면 헤엄을 쳐서라도 건너려 하는데 바다로 뛰어든 불운한 쥐들은 죽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그런 나그네쥐가 아니다. 아이들이 쉴 수 있는 공간, 먹고 살만한 삶의 터전을 만들어내는 것은 어른들의 몫이다. 삶과 노동의 질서, 복지와 과세의 틀을 바꾸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서로를 옥죄는 순응 시험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마을교육공동체는 아이들에게 쉴 수 있는 공간을 열고, 삶과 노동의 질서를 바꾸는 먼 길의 시작점이다. 우직한 한마당은 학생들이 스스로 우리 교육을 바꾸어 그 문을 열어가는 열쇠이다. 비상행동 실천을 통해 학생들은 어른들도 함께 그 문을 열자고 손을 내민다. 동아리로 정을 엮어가는 학부모들도 등굣길에서 맞이하던 아이들이 순응 시험에 들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물론 이 모든 활동들의 한가운데 교사들이 있다. 교사들은 누구보다 그런 세상을 바라고 또 바라겠지만, 무자비한 사회의 또 다른 요구에 힘들어 한다. 뷔리당의 당나귀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이중으로 구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이중구속을 끊어내고 학교가 지역사회 변화의 거점이 될 수 있을까? 기후위기를 막아내는 자원순환의 거점이 되고, 인구소멸에 대응하고 마을을 돌보고 가꾸는 배움과 돌봄의 공간이 될 수 있을까? 돌봄과 교육을 구별짓고 돌봄은 교사의 일이 아니라고 하기보다, 자신과 이웃을 돌보는 것부터 배우고 가르치는 것이 교육임을 다시 말할 수 있을까?

OECD가 말하는 것처럼 학생들이 변혁적 역량을 갖춘 행위자가 되게 하려면 학교가 그런 공간이 되어야 한다, 갈등과 딜레마를 조정하며 책임감을 갖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갈 수 있는 학습나침반을 학생들에게 쥐어주어야 한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대화가 필요하다. 서로가 무엇을 원하는지, 다른 세상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먼저 묻고 답해야 한다. 말로, 글로, 몸으로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그것이 교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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