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밀물처럼 설움이 밀려왔다
3부 시베리아 횡단기 ● 바이칼에 서다
75시간 달려 내린 이르쿠츠크
자작나무 숲 지나 도착한 호수
'시베리아의 푸른 눈' 바이칼
2017. 10.13. 00:00:00

바이칼 호수는 시베리아 남쪽 이르쿠츠크와 부랴트공화국 사이에 있으며 한민족의 시원으로 여겨진다.


1차 경유지인 러시아 이르쿠츠크에 도착한 것은 오후 11시40분께. 이미 일행은 '한국인들 답게' 1시간 전부터 완전히 내릴 준비를 갖췄다.

표정들은 피곤했지만 저녁엔 호텔에서 잘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솔직히 필자 역시 약간은 설렜다. 겨우 75시간 열차를 타고 왔을 뿐인데, 땅이 그립고 땅에 붙은 건물이 나도 모르게 그리운 것이었다. 이런 얍삽한 마음이라니. 스스로를 잠시 자책하던 와중에 열차는 어느새 빨려 들어가 듯 이르쿠츠크 역에 도착했다.

역에 내린 일행들을 먼저 맞은 것은 빗방울이었다. 인천에서 시베리아로 떠나올 때 내리던 빗방울이 따라온 듯 했다.

어두운 밤, 낯선 역에 모여 있는 한국인들은 누가 봐도 알기 쉬웠다. 잠시 기다리니 (사)문예교류진흥협회의 권정희 대표가 일행들에게 손짓했다. 버스에 몸을 실으니 절로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온다.

어디를 가든지 숙소를 향한다는 것은 그런 것인 듯 하다. 묘한 안정감과 피곤함이 섞여 있는 감정 말이다.

숙소에 도착한 것은 자정이 넘어서였다. 일행들은 피곤한 듯 별말 없이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씻고 침대에 누웠는데, 열차의 덜컹거림이 느껴진다. 낯선 땅, 낯선 기후, 낯선 침대… 그리고 고려인. 몇가지를 생각한 듯 했는데 어느새 잠이 들었다.

아침은 싸늘했다. 8월의 날씨라고는 도저히 생각이 안될 정도였다. 바람막이 위에 또 바람막이를 입고서 호텔을 나섰다.

이르쿠츠크 시(市). 바이칼호(湖) 서쪽과 안가라강(江)과 이르쿠트강(江)의 합류점에 위치한 이 도시는 안가라강이 시가를 종단하고 있다. 동시베리아의 행정ㆍ경제ㆍ문화의 중심지로도 알려졌으며, 과거 카자크가 만든 동계 숙영지에 지난 1661년 목조 성채가 지어지면서 서서히 도시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러시아와 몽골, 중국과의 교역로의 중심지로서 모피와 금 거래가 활발하기도 했다고 한다.

1803년부터는 시베리아 총독부, 1822년부터는 동시베리아 총독부가 있었으며, 1898년 시베리아 철도가 들어선 뒤부터는 공업도 활발해 부근의 체렘호보 탄광의 채굴도 촉진됐다. 무엇보다 이곳이 알려진 것은 제정 러시아시대인 18세기 초부터 정치범의 유형지가 됐기 때문이다. 현재는 광업용 중기계류ㆍ공작기계ㆍ전기기계 등의 기계 제작업, 마카로니ㆍ과자ㆍ식육ㆍ버터ㆍ유지ㆍ제분 등의 식료품공업, 가구ㆍ신발ㆍ펠트ㆍ피혁ㆍ메리야스 등의 경공업 및 운모 가공업, 철근 콘크리트ㆍ건축자재ㆍ항공기ㆍ오토바이 제조업 등이 발달해 있다.

시가는 강을 중심으로 나뉘는데, 이르쿠트강의 합류점보다 상류에 있는 안가라강 우측은 이르쿠츠크 국립대학교(1918년 설립)와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 지부를 비롯해 많은 교육ㆍ연구 기관들이 모여 있다.

안가라강 좌측은 공업지구이고, 안가라강의 우안 하류지역에 있는 구릉 위에 도심지가 자리잡고 있다. 이 지역은 행정ㆍ상업 등의 중심으로 극장ㆍ공원ㆍ키로프 중앙광장 등이 있으며 경관이 매우 아름답다고 들었지만, 일정이 바빠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우리에겐 바이칼호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이칼호로 가기 전 일행들은 잠시 도시를 둘러봤다. 오전에 방문한 카란 교회(러시아 정교회)의 입구에는 구걸하는 사람과 정원의 꽃들이 어우러져 불협화음을 냈다. 구걸하는 이들은 러시아 전역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는데, 생각보다 젊은 사람들이었다.

카란 교회 내부는 엄숙했지만 다행히 사진 촬영은 허용이 됐다. 교회를 둘러 보고 나와 마주한 거리는 반바지와 파카가 공존했다.

우리는 곧 커다란 자작나무의 숲을 지나 한참을 내달렸다. 점심은 바이칼호에서 먹을 예정이었다. 그 전에 들렀던 곳은 바이칼호를 한 눈에 볼 수 있다는 전망대였다. 리프트카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데, 사실 그리 높은 산은 아니었다.

전망대 정상에 오르니 전설로, 소설로만 접했던 바이칼호가 물안개를 머금고 그 거대한 몸을 드러냈다. 호수 하나가 전남지역보다 더 큰 땅. 러시아의 광대함에 사뭇 다시 놀랐고 뒤이어 그 광대한 땅에서 조차 핍박을 받아야 했던 우리 민족의 설움이 밀려왔다.

전망대에서 1시간 정도를 보내고 내려와 드디어 바이칼호에 직접 가 보는 시간이 됐다.

그리 멀지 않았다. 1시간여를 달리니 마치 바다같은 호수가 눈 앞에 드러났다.

바이칼호, 지구 상에는 많은 호수가 있지만 시베리아의 오지에 숨어 있는 바이칼만큼 관심을 끄는 호수는 드물다.

이 호수는 달리 부르는 이름도 많아서 '성스러운 바다', '세계의 민물 창고', '시베리아의 푸른 눈', '시베리아의 진주' 등으로 불린다. 특히 지구 상에서 가장 깊은 오지에 묻혀 있고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아서인지 지구 상에서 가장 깨끗한 물로도 알려져 있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바이칼 호는 러시아의 이르쿠츠크 시 부근에 위치하며, 호수의 넓이는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넓다. 호수의 최대 깊이는 1621m로 세계에서 가장 깊고, 주변은 2000m급의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호수에는 전 세계 민물(담수)의 1/5이 담겨 있다고 한다. 바이칼 호의 표면적은 북아메리카 5대호의 13%밖에 안 되지만 물의 양은 5대호를 합친 것보다 3배나 더 많기 때문에 '세계의 민물 창고'라고 불린다.

더욱이 바이칼호에는 약 365개의 강에서 물이 흘러 들어오고 있지만, 물이 빠져나가는 곳은 오직 앙가라강 뿐이다. 이 물은 시베리아의 예니세이강으로 합쳐져 북극해로 흘러든다.

바이칼호의 바닥은 바다의 표면보다 약 1295m 낮으며, 이는 주변 산정으로부터 약 3750m 낮은 위치에 호수의 밑바닥이 있는 셈이다. 호수의 길이는 636㎞, 평균 너비는 48㎞로, 면적이 남한의 1/3이나 된다.

호수의 최대 투명도는 42m로 물 밑이 훤히 들여다 보인다.

무엇보다 필자가 이곳을 꼭 와보고 싶었던 것은 우리 민족의 뿌리가 여기서 출발했을지 모른다는 학설 때문이다. 과거 바이칼호 주변에는 여러 소수 민족이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부랴트(Buryat)족은 인구 40만의 소수 민족으로서 자치 공화국을 이루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우리의 '선녀와 나무꾼'과 같은 설화를 갖고 있고, 특히 그들이 간직한 샤머니즘의 원형은 우리 민속과 비슷한 점이 정말 많다. 그래서 우리 민족의 기원지가 아니냐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이밖에 이 민족은 오색 천 조각을 두른 나무 말뚝을 수 없이 만날 수 있는데, 이것은 우리의 솟대나 서낭당과 비슷한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 부랴트족도 우리의 '개똥이'처럼 아기에게 천한 이름을 지어 주어야 오래 산다고 믿어 '개'란 뜻의 '사바까'란 이름이 흔하다고 한다. 아기를 낳으면 탯줄을 문지방 아래 묻는 전통도 우리와 비슷하다. 함께 따라서 추는 춤은 강강술래와 비슷하다.

바이칼호를 보며 이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 가운데, 호남필하모니오케스트라 앙상블 현악4중주팀이 공연을 준비했다.

하나둘 관광객과 러시아인들이 모여 들고 그들 앞에서 현악4중주팀이 연주한 곡은 다름 아닌 '아리랑'이었다.

4중주로 듣는 아리랑, 그것도 바이칼호 앞에서 듣는 것은 확실히 달랐다. 음률 하나하나가 심장에 그대로 박히는 느낌이었다. 고려인들이 강제이주 당시 기차 차창으로만 스쳐 보았던 그곳에서 80년이 지난 뒤에야 그들을 위한 추모곡이 연주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현악4중주팀 김수연 악장(바이올린)은 "바이칼 호수 앞에서 연주하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매우 뜻 깊은 일"이라면서 "70시간을 훌쩍 넘긴 시간동안 힘든 열차여행을 한 동행열차 탐방단을 위로하고, 한국과 세계의 평화를 위해 아리랑을 연주했다"고 말했다.

일행들 역시 똑같은 생각이었는지, 연주를 듣고 난 후, 예정에 없었지만 모두 한 목소리로 아리랑을 부르기도 했다.

탐방에 참여한 김갑수 학다리고 교장은 "바이칼 호수에서 '아리랑'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뭉클했다"면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지 못한 것이 아쉬웠고, 80년전 고려인들의 끝없는 이주행에 작은 위로를 보내는 마음으로 불렀다"고 말했다.

공연을 마치고 일행은 바이칼호 선상 투어를 위해 배 위에 올랐다. 이미 오후 2시를 훌쩍 넘겼다.

일행은 모두 알고 있었다. 이 여정에서 이것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유일무이한 사치이며, 관광이라는 것을. 그래서인지 물고기 한마리, 양고기 꼬치구이, 빵과 음료가 주어진 식사에도 표정이 밝았다. 이 식사가 끝나면 우리는 다시 31시간 동안 열차를 타고 중앙아시아를 향해 달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5편에 계속)

글=노병하 기자ㆍ사진=배현태 기자

디아스포라

기사 목록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