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와 '사단칠정 논쟁'벌인 고봉의 학문 담긴 곳
희대의 로맨틱 사상(思想) 배틀
2017. 10.13. 00:00:00

월봉서원은 2008년부터 시작한 문화재활용사업을 토대로 3년 연속 문화재청 살아 숨 쉬는 향교ㆍ서원 활용 우수사업선정 등 인문학 프로그램 운영의 선두주자로 주목 받고 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자신이 성취한 것에 비해 높게 평가받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그렇지 못한 경우도 종종 있다. 특히 옛 유현들의 경우 학문하는 마음가짐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부끄럽게 여기거나 굳이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개의치 않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런 사람들 중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기대승이다.

고봉 기대승((高峯 奇大升, 1527~1572)은 광주 출신으로 16세기 조선의 대표적인 성리학자다. 본관은 행주,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峰),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그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과의 사단칠정을 비롯한 성리논변을 통해 자신의 학문적 지평을 넓혔고 그 후 율곡 성리학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퇴계와 더불어 사단칠정(四端七情) 논변을 통해 우리 유학사상을 보다 심화 발전시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사단(四端)은 측은지심(惻隱之心)ㆍ수오지심(羞惡之心)ㆍ사양지심(辭讓之心)ㆍ시비지심(是非之心)의 네 가지 마음으로 각각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의 착한 본성에 기인하여 나오는 감정이라 하여 단서라고 이름 붙였는데, 단(端)이라 함은 선(善)이 발생할 가능성을 가진 시초를 뜻한다. 이것은 맹자 공손추편(公孫丑篇)에 나온다. 칠정은 희(喜)ㆍ노(怒)ㆍ애(哀)ㆍ구(懼)ㆍ애(愛)ㆍ오(惡)ㆍ욕(欲)의 일곱 가지 감정인데, 예기(禮記) 예운편(禮運篇)에서 비롯하여 당(唐)의 한유(韓愈)가 원성편(原性篇)에서 칠정(七情)으로 나누어 논하였다. 이것은 중국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온 사상으로 인간이 외부 사물에 접하면 여러 가지 정(情)이 표현되는 심리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기대승이 어떤 인물인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희대의 일화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 6차례에 걸친 손 편지를 통한 로맨틱 사상논쟁이 시작된다. 기대승은 조선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인 퇴계 이황과 장장 8년 가까이 주고받은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이 바로 그것이다. 이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무려 스물여섯, 당시 고봉은 갓 과거에 급제한 서른 두 살의 신출내기 선비에 불과했다. 고봉과 퇴계의 사단칠정이기 논변의 전말은 이렇다. 어느 날 퇴계가 서울에 들러 원암 이교(遠巖ㆍ1531~1595)가 소유한 천명도설(天命圖說)을 본 후 저자가 추만 정지운(秋巒 鄭之雲ㆍ1509~61)인 것을 알고 그를 직접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퇴계가 가져온 것과 추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약간 차이가 있었다. 퇴계가 본 천명구도(天命舊圖)에 의하면, 분명 '사단은 이(理)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氣)에서 발한다(四端發於理 七情發於氣)'라고 쓰여 있었다. 반면, 정지운의 천명도설의 천명구도는 이와 달리 사단의 발동은 순수한 이(理)이기 때문에 선하지 아니함이 없고 칠정의 발동은 기질을 겸하기 때문에 선악이 있다(四端之發 純理故無不善 七情之發 兼氣故有善惡)라고 되어 있었다. 이에 퇴계는 계축년(1553) 10월에 '사단은 이의 발동이며 칠정은 기의 발동이다(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라고 정정하였다. 이것이 결국 논쟁의 발단이 되었다. 사단의 선(善)과 칠정의 선(善)을 같이 볼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두 가지의 선은 질적으로 다른 것인가? 퇴계는 이 양자가 다르다고 해석한 것이다. 반면 고봉은 이것은 하나의 선으로 취급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요컨대 퇴계는 사단과 칠정을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구분하여 보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는데 고봉의 끈질긴 합리적 반박에 의해 퇴계는 자신의 논리를 일부 수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율곡 이이 (栗谷 李珥, 1537~1584)도 한 수 거들었는데 임신년(1572) 우계 성호원(牛溪 成浩原)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퇴계와 고봉의 사단칠정논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어 자못 흥미롭다. '퇴계가 기명언(고봉)과 사단칠정을 논한 것이 무려 수만을 헤아릴 수 있지만 명언의 이론은 분명하고 똑바로 갈라져 마치 대나무를 쪼개는 것과 같고, 퇴계는 변설이 비록 상세하나 이치가 밝지 않아 반복하여 음미하여도 마침내 틀림없이 확실한 점을 찾을 수 없다. 명언의 학식이 어찌 감히 퇴계를 따를 수 있겠는가마는 다만 재능이 있어 우연히 이러한 처지에 도달한 것이다.' 율곡의 이와 같은 평가는 비록 개인적인 견해이긴 하지만 고봉의 논증이 명쾌하고 설득력 있음을 칭찬하고 있다. 퇴계 자신도 고봉의 학문적 깊이를 인정했다. 퇴계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선조(宣祖)임금이 묻기를 "조신(朝臣)들 중에서 누가 학문이 가장 뛰어나다고 보는 가"라고 물었는데, "기모(寄某)는 글을 넓게 섭렵하였고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으니 참으로 달통한 선비라고 할 수 있나이다" 라고 답했다고 한다. 고봉은 지천명(知天命)이라고 하는 50세에도 이르지 못한 짧은 생을 살다갔지만, 그가 남긴 영향력이 어떠했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요즘 인문학이 죽었느니 혹은 철학의 부재라느니 한탄하며 작금의 물질만능주의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시대는 다르지만 지척에 이렇게 탁월한 분이 있었다는 것에 주목하고 월봉서원에 들러 정원의 꽃들도 구경하고 고봉이 추구했던 학문과 삶에 대한 진지한 철학에 대해 잠시 관심 기울여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본다.


조선 최고의 철학정원, 월봉서원

월봉서원은 고봉선생 사후 7년(1578), 호남유생들이 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인 낙암 아래에 망천사라는 사당을 세우면서 시작된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피해를 입어 광산구 산월동인 동천으로 옮겼으며 1654년에 효종이 월봉이라는 서원명을 내리면서 사우와 동재, 서재, 강당 등을 갖추게 되었다. 그 후 월봉서원은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毁撤)되었고 1941년 현재 위치인 광산구 광산동에 빙월당을 새로 짓고 1978년 사당과 장판각, 내삼문, 외삼문 등을 건립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월봉서원에는 사계절 꽃이 핀다. 봄에는 매화가 선비의 향기를 머금고 꽃을 피워 겨우내 얼었던 마음을 사르르 녹여주고 여름에는 배롱나무가 탐스런 꽃망울을 터트리며 그 무더운 여름도 무사히 견뎌내게 해준다. 산들바람 불어오는 가을에는 주렁주렁 탐스럽게 익어가는 주황색 감들이 가을꽃을 대신하여 감성을 자극한다. 겨울에도 꽃이 있다. 새하얀 눈 꽃 속의 따스한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꽃차의 그윽한 향기가 한 해 동안 쌓인 고단함을 말끔히 씻어준다. 월봉서원에서 피는 사계절 꽃들은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주고 무엇보다 정원 곳곳에 서려 있는 한 선비의 고결하고 맑은 정신은 우리의 마음 꽃이 되어준다. 고봉정신은 빙심설월(氷心雪月), 즉 백성의 마음으로 국가를 바라보고 정의를 위해 누구 앞에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올곧은 선비정신이다. 월봉서원에서는 이런 고봉정신을 선양하고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삶의 중심을 잡아주는 방향타 역할을 하기 위해 그저 역사 흔적을 보존하는데 그치는 박제된 공간이 아닌 삶에 지친 도시인들에게 솔깃할만한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생생한 철학정원이 되어주고 있다. 월봉서원은 2008년부터 시작한 문화재활용사업을 토대로 3년 연속(2014~2016)문화재청 살아 숨 쉬는 향교ㆍ서원 활용 우수사업선정, 전국 서원 최초 국회 초청 및 명예의전당상 수상 등 인문학 프로그램 운영의 선두주자로 주목 받고 있다. 2017년에는 고봉다움을 전하는 '선비의 하루', '드라마 판타지아', '꼬마철학자상상학교', '살로 드 월봉', 그리고 고봉의 정신을 바탕으로 월봉서원을 재해석한 서원마을축제 월봉유랑 등 흥미로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곳이 있는데 다시(茶時)라는 호남선비문화카페다. 다시는 예전에 사헌부의 벼슬아치가 매일 한 번씩 모여 차를 마시며 업무를 논의하던 일이나 그런 때를 이르던 말인데 여기서는 다시(again)라는 의미를 포함하여 중의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차(茶)공방에서는 선비의 차를 체험하고 나만의 차를 만들어보기도 하고 손(手)공방에서는 한 땀 한 땀 바느질로 완구류나 생활용품 등을 만들어보는 재미에 흠뻑 빠져볼 수 있다. 옛 선비들은 차를 즐겨 마셨다. 그들에게 차를 마신다는 것은 하루를 시작하거나 마칠 때, 또 일과 중에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가다듬는 일종의 의식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커피를 마시는 머그잔이나 음료수를 마시는 유리잔과는 사뭇 다른 자그마한 찻잔을 두 손으로 공손하게 감싸 쥐고 의식을 거행하듯 차를 마신다. 차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차와 교제하는 시간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지 모르겠다. 차를 마시는 일은 어쩌면 음악하는 사람이 제대로 리듬을 타기 위해 놓쳐서는 안 되는 중간 중간의 쉼표 같은 역할이 아니겠는가 생각된다.

가을 기운이 완연한 월봉서원의 다시(茶時)에서 차 한 잔을 마주한다. 열린 창문을 통해 정원의 가을풍경을 실컷 감상하며 잠시 여유로운 시간을 만끽한다. 무엇보다 차를 마시며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채근하며 성찰하고자 했던 옛 선비의 마음을 잠시 헤아려본다.



광주전남연구원 문화관광연구실장 송태갑의 정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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