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위기" 4·19, 5·18 계엄 경험자들이 본 오늘
12·3 계엄에 '그 시절' 고통 소환
4·19혁명 당시 앞장서서 투쟁해
오월광주 최전선서 시민군으로
계엄군 집단구타에 가족 잃기도
"대명천지에서 있을 수 없는 일"
입력 : 2024. 12. 09(월) 18:55
김영용 호남4·19혁명단체총연합회 상임대표. 윤준명 기자
지난 3일 윤석열 대통령이 선포한 45년만의 계엄이 국회의 저지로 해제된 가운데, 4·19혁명과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서 비상계엄을 경험한 이들은 자유가 억압된 ‘그 시절’이 떠올랐다고 분노를 표했다. 이들은 이번 비상계엄 사태로 오늘날 민주주의의 기반이 흔들릴 수 있다는 경고의 목소리를 냈다.

●“1960년 4월처럼 먼저 앞장설 것”

1960년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이 자행한 3·15부정선거에 대한 국민적 반발이 일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4월19일 오후 3시를 기점으로 서울 지역에 선포한 계엄령은 오후 5시부터 광주와 부산, 대전, 대구, 전주 등 전국 주요 도시로 확대됐다.

당시 광주공고 3학년이었던 김영용 호남4·19혁명단체총연합회 상임대표는 4·19혁명의 삼엄한 분위기를 바로 어제 일인 듯 세세히 기억했다.

그는 “3·15의거 이후 올바르게 된 민주주의를 가져보자는 국민들의 바람이 고조됐다. 광주는 고등학생들이 중심이 돼 정권타도에 대한 열기가 높아졌다”며 “정부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계엄을 선포했다. 이는 민주화운동으로 촉발된 최초의 계엄이다”고 회상했다.

그날 거리로 나가는 과정에서 팔과 머리에 입은 중상은 오랜 상흔으로 남아 그를 평생 괴롭히고 있었다.

이어 “거리에는 군인과 경찰이 깔렸고, 교사들은 학생들이 다칠까 학교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았다”며 “불의를 참는 것은 학생의 도리가 아니라는 마음으로 학우들을 이끌고 탈출하던 중 큰 부상을 입어 팔을 절단할 뻔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헌정상 있었던 17번의 계엄을 모두 겪어온 김 상임대표는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이 ‘내란혐의’로 밝혀진다면 다시 거리에 나가 투쟁하겠다며 의지를 내보였다.

그는 “지난 3일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이 대한민국의 헌정질서를 통째로 무시한 ‘내란범죄’라고 규탄하는 국민적 공분이 이어지고 있다”며 “수많은 이들의 헌신으로 세워진 민주주의를 훼손했다는 사실이 수사를 통해 확실히 밝혀진다면 4월의 그날처럼 앞장서서 싸우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5월 떠올라 고통으로 밤 지새워”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에 의해 사망했고, 다음날 오전 4시10분 제주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됐다.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은 전국적인 민주화 열망을 억제하기 위해 1980년 5월18일 0시를 기해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광주의 들끓는 민의는 5·18민주화운동으로 폭발하게 됐다.

김범태 국립5·18민주묘지소장. 국립5·18민주묘지 제공
1979년 당시 26살의 나이로 고흥군 소속 공무원으로 일하던 김범태 국립5·18민주묘지소장은 박 전(前)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듣게 된 후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찼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국민의 기대와 달리 현실은 더 큰 억압과 고통이 동반된 새로운 군사정권의 시작이었다.

김 소장은 “당시는 정권 비판을 하거나 집회를 열 경우 바로 잡혀가는 시대였다. 그런 엄혹한 시대를 살던 중 ‘드디어 나라가 변화할 수 있겠구나’ 싶어 만세를 불렀다”며 “하지만 혼란스러운 정국이 지속되다가 전두환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물거품이 됐다”고 말했다.

이듬해 조선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해 생업을 병행하던 김 소장은 5·17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 이후 시민군으로, 시민협상대표로 오월광주의 최전선에 섰다.

그는 “당시의 참담함을 헤아릴 수 없다. 총에 맞은 시민군들의 시신을 가까이서 목도하고 직접 수습했다”면서 “그것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끔찍함이나 계엄의 무서움을 공감하지 못할 것”이라며 두눈을 질끈 감았다.

김 소장은 이번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큰 충격과 분노를 느꼈다고 밝혔다.

그는 “이번 계엄선포 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또다시 총을 들어야 하는 상황이 오는가’였다. 윤 대통령을 비롯해 이번 일을 획책한 이들은 민주열사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우리 민주주의를 우습게 여긴 것”이라며 “입으로는 오월정신을 운운하지만, 그것을 마음에 새겼다면 어떻게 대명천지에 이런 일을 꾸밀 수가 있겠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김형미 오월어머니집 관장. 오월어머니집 제공
계엄군의 구타로 인해 오빠를 잃은 김형미 오월어머니집 관장도 오늘날 민주주의가 다시 크게 위협받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김 관장은 “당시 대학교 1학년이던 오빠가 귀가하던 중 공수부대원 8명에게 집단 구타를 당해서 정신질환을 앓게 됐다. 온 가족들이 오빠를 치료하기 위해 애썼지만, 결국 시설에서 사망했다”며 “이번 비상계엄 선포와 TV 속 계엄군의 모습을 보며 1980년의 5월이 떠올라 고통으로 밤을 보냈다. 정말 죽고 싶은 마음이었다”고 밝혔다.

이어 “민주주의가 꽃을 피운 21세기에 일어날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내란을 저지른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에 투표조차 하지 않은 여당도 공범이다”며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위기다. 국민의힘은 오는 14일 예정된 탄핵안 2차표결에는 꼭 참여해 국민들의 명령을 받들어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윤준명 기자 junmyung.yoon@j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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