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일찍이 나라를 지탱하는데 조그만 공도 없었으니
오직 인(仁)일 이룸이요 충(忠)은 아니로다
겨우 윤곡(尹穀)을 따를 수 있음에 그칠 뿐
때를 당하여 진동(陳東)을 따르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노라'
- 황현의 절명시 중 4수
윤곡은 송나라 담주 사람이다. 거란의 군대가 담주성을 포위하여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두 아들에게 서둘러 관례를 행하였다. 지하에서 조상을 뵙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집에 불을 놓아 가족과 동반 자결했다. 진동은 송나라 태학생으로 고종 때 간신 황잠선, 왕백언의 처단을 직언하다가 참혹하게 처형당했다. 진동과 윤곡, 단지 죽음의 방법이 다를 뿐 스러져 가는 나라에 목숨을 던진 절의의 대표로 후세에 회자되는 인물이다.
그로부터 800여년 후인 1910년 대한제국에 4수의 절명시를 남기고 순국 자결한 선비가 있었다. 조선의 지식인으로서 죽음으로 망국의 치욕을 대신한 것이다. 그의 절명시에 등장하는 윤곡과 진동, 그들의 뒤를 따른 이가 한말의 마지막 선비, 황현(1855~1910)이다. 시인이며 비평가이고 우국지사였던 황현, 본관은 장수, 자는 운경, 호는 매천(梅泉)이다. 1855년(철종 6) 전라도 광양 서석촌에서 황시묵과 풍천 노씨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매천의 선조로는 세종 때의 황희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충청병사 황진, 병자호란 때 의병장을 지낸 황위 등이 있다. 이후 몰락한 가문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다가 조부 황직에 이르러 남원에서 가산을 크게 일으켜 세웠다. 조부는 광양으로 이주하여 1천여 권의 책을 구비하고 후손 교육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
11세가 되는 해에 구례로 유학하여 천사 왕석보의 문하에서 배웠다. 매천은 추금 강위, 영재 이건창, 창강 김택영 등과 친교를 맺고 오래도록 교유하였다. 황현은 평생 벼슬하지 않았지만, 28세 때 보거과(保擧科)에 응시한 적이 있다. 보거과는 뛰어난 인재를 추천받아 시험을 치르는 별시다. 초시에서 1등으로 뽑혔지만, 시험관은 그가 한미한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2등에 두었다. 34세에 성균관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했으나 역시 과거장의 문란을 목격하고는 더 이상 관직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의 공식 이력은 여기까지였다.
한양과 절연하고 구례 만수동으로 이사하여 1890년 '넉넉하지는 않지만 편안하다'는 의미의 구안실(苟安室)이라는 초가집과 삿갓모양의 일립정(一笠정)을 지었다, 선비의 절의를 상징하는 매화나무를 심고, 조그만 샘을 만든 것에 연유하어 매천(梅泉)이라 자호했다 한다. 이곳에서 3천여 권의 책 더미에 묻혀 독서와 저술에 전념, <매천야록>과 <동비기략> <오하기문>등의 저술을 남겼다. 간전면 만수동 상전마을에 구안실과 일립정의 옛 터가 남아있다. 그가 글을 썼던 구안실은 대밭으로 변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매천야록>은 1865년~1910년까지 47년 동안 우리나라 주요 사건을 비평을 곁들여 기록한 전 7권의 기록이며 살아있는 역사서이다. 매천의 학문과 예리한 비평정신이 애국심과 함께 잘 드러나 있다. <오하기문>은 구례에 칩거하면서 보고 듣고 읽은 것들을 모아 비평하면서 기술한 원고본이다. 또 동학농민혁명운동에 대해 기록한 <동비기략>이 있다는데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매천의 문집으로는 지우 창강 김택영이 중국에서 지원금을 모아 간행한 <매천집>이 있다.
1902년 향촌의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자금을 모아 구례군 광의면 지천리에 호양학교(壺陽學校)를 세웠다. 1910년 망국의 소식이 전해지자 9월10일 절명시 4수를 남기고 구례 대월헌에서 다량의 아편을 복용하여 자결했다. 매천은 "무릇 선비를 기른 지 500년, 나라가 망하는 날에 한 사람도 죽는 사람이 없다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느냐"고 하여, 일국의 지식인으로서 순국을 결행하는 고결한 선비의 정신세계를 보여주었다.
1962년 매천사가 건립되었고,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매천사에는 당시 최고의 초상화가 채용신이 그린 초상화가 있다. 황현이 자결한 이듬해 그의 사진을 보고 추사(追寫)한 것이다. 실제 인물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만큼 뛰어난 사실적 묘사를 보여준다. 보물 제1494호로 지정되었다.
매천은 학(學), 의(義), 절(節)을 겸비한 한말의 대표적 선비였다. 학은 중국에서 간행된 <매천집>이나 <매천속집>이 이를 잘 증명하고, 옳고 그름을 명석하게 판별하여 지킬 것은 지키고 버려야 할 것들은 버렸으며, 둘 사이에서 타협하지 않았다. 그런 정신은 그가 얼마나 '의(義)'에 충실한 선비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매천은 망국에 순절함으로써 나라는 사라지더라도 선비로서 지켜야 할 '의'를 영원히 지켜냈다. 자정은 절의의 극치이다. 그의 절명시가 이를 증명한다. 구한말 나라가 흔들리고, 기울고, 급기야 조선 500년의 사직이 끝을 향해 치닫던 시절, 이 땅의 귀족계급, 선비와 사대부, 관료라는 이름으로 온갖 특혜와 부귀를 누렸던 이른바 유교 지배계급들은 다 어디로 숨어 사라져버렸는가? 그 치욕의 역사 위에서 우리가 애절하게 손꼽아 기억하고 옷깃을 여미며 묵념 추모하는 순국선열 몇 분이 있었으니, 그것은 후세가 떳떳하게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우리의 자존에 관한 일이었으며, 어둠 속에서 찬란하게 발하는 한줄기 빛과 같은 것이었으니, 그 맨 위에 매천 황현이 있음은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매천이 태어난 광양의 생가 '매천헌', 묘소가 있는 매천역사공원, 구례로 이주하여 정결한 선비의 삶을 살았던 '구안실', 후세 교육을 위해 지은 호양학교, 매천이 배향된 매천사, 오동나무 아래서 '오하기문'을 썼다는 오동나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순국의 방 '대월헌', 그의 발자취를 두루 둘러보고 사당에 모셔진 그의 초상 앞에 절하고 물러 나왔다. 마당 한쪽에 겨울하늘로 높이 솟은 오동나무의 헐벗은 가지들을 바라보면서 기어이 '의(義)란 명(命)이로구나!' 그런 생각이 지나간다.
'문향' 연재를 마치며
구랍과 설날은 이부자리에서는 하루 상간이지만, 창을 열고 멀리 하늘을 내다보면 지구가 해의 둘레를 한 바퀴 돌았던 한 해이기도 하다. 그 공전(公轉)의 시간들, 그러니까 세 바퀴 돌았다. 호남의 서원을 찾아, 그들의 발자취를 찾아, 고봉에서 매천까지 '문향(文香)'이라는 이름으로 유랑하던 시간들. 그것은 과거와 현재의 '이음'이고, 옛 사람과 우리의 '만남'이었으되, 내가 진정으로 찾고자 했던 것은 '지혜'였다. 인의예지의 사단 중에 세상의 이치를 분별하는 지(知)는 어디에서 올까? 그 답을 찾지는 못했다. 그것은 애초에 답이 없는 물음이었는지도 모른다. 3년의 유랑에서 가만히 엿본 것은 그들의 '수기(修己)'였다. 명유와 명현, 성리학의 거목, 서원에 배향된 성현의 삶이란 한마디로 '닦음'이었다. 삼가고 삼가며, 일촌을 방일하지 않으며, 불씨를 꺼뜨리지 않으려는 자세, 그것이 충(忠)이든, 의(義)든, 절(節)이든, 학(學)이든, 시(詩)든 간에 하나같이 공통된 것이었다. 초상으로 혹은 위패로 남아있는 그분들이 가르쳐 준 것은 오직 그것이었다. 쓰는 이에게는 행복한 시간이었으되, 잘 쓰지도 못하고 고루한 옛 이야기를 인내로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는 고역의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깊이 감사드린다. 3년의 '문향' 연재를 마치며, 아쉬움으로 흐르는 섣달그믐과 소망으로 다가오는 새해, 행복한 시간이 되시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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