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가을의 끝자락이다. 한 해의 끝은 12월이지만 11월이 더 끝 같다. 끝에 다다른 것 보다 끝에 도착하기 직전이 더 끝 같다. 은행잎이 진 자리는 땅이 노랗게 물들었고, 단풍잎이 진 자리는 붉게 물들었다. 나목은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있다. 가을비에 젖어 검은 갈색으로 변한 가지는 육탈한 뼈처럼 보인다. 긴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또 초록의 새순들이 돋을 것이다. 대지는 다시 호흡하며 한 생을 순환한다. 그렇게 한 바퀴, 두 바퀴, 꽃은 피었다가 지고, 바람은 불었다가 멈추고, 눈비가 내렸다가 그치고, 물이 얼었다가 녹고 나면, 떠날 것들은 떠나고 남을 것들은 남아 다시 거대한 자연의 윤회 속으로 들어간다. 공자가 제자들을 데리고 세상을 주유(周遊)하다가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년 어느 물가에 앉아 "가는 것이 이와 같구나, 밤낮 없이 흐르는 것이 이와 같구나(子在川上, 曰 逝者如斯夫 不舍晝夜)"라고 하였다.
나주 정렬사(旌烈祠). 임란의 의병장, 건재 김천일(1535~1593)의 사당이다. 본관은 언양, 자는 사중, 호는 건재, 극념당. 나주 흑룡동 태생으로 아버지 김언침과 어머니 양성이씨 사이에서 났다. 유년은 불운했다. 출생 이튿날 어머니가, 7개월 뒤에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외가에서 자랐고 배움이 늦었다. 15세 봄, 창평에서 계부 김신침으로부터 잠시 글을 배우고, 19세에 정읍의 일제 이항의 문하에서 수학하는 만학의 길을 걸었다. 하서 김인후· 미암 유희춘 등과 교유했다. 1573년 37세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군기시주부를 첫 벼슬로 용안현감, 강원도 도사, 임실현감, 순창군수에 이어 담양부사를 지냈다.
김천일은 선조 15년 조정에서 지방 수령 가운데 선정을 베풀고 능력이 뛰어난 관리를 선출했을 때 가장 윗자리에 뽑히어 순창군수로 승진하였다. 용안현감 재직 때는 치군 제일의 관리로 추천되었고 훗날 담양부사 직에 있다가 사임할 때에는 부민들이 그의 사임을 만류한 예도 있을 만큼 청렴하고 위민의식이 투철한 관리였다. 선조 22년(1589), 53세로 다시 한성부 서윤, 군자감정을 거쳐 수원부사로 부임한 것이 그의 마지막 관직이었다. 수원부사로 있을 때의 일이다. 수원은 한양과 가까워 중앙의 사대부나 왕족들이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 특권층은 마땅히 납세대상이었는데도 가난한 백성들만이 세납에 응하는 폐단이 지속되어 왔다. 김천일은 자신이 특권층을 위한 관리가 아니라 국가를 위한 관인임을 분명히 밝히면서 지주들에게 과세하는 등 폐단을 바로 잡았다가 그들의 비방을 받아 파직된다. 조선의 조정이라는 곳이 그러했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나 나주에 극념당을 짓고 은거했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적의 대군이 북상해 한양이 함락되고 국왕이 파천했다는 소식이 날아든다. 그는 제봉 고경명· 회재 박광옥, 최경회 등에게 격문을 보내 창의기병(倡義起兵)할 것을 제의하는 한편, 나주에서 송제민 양산숙 임환 등과 함께 의병의 기치를 들고 300명을 모아 북으로 출병하였다. 정렬사 비에 따르면, 김천일은 한양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울부짖고 통곡하며 까무러칠 정도까지 되었다가 이윽고 떨쳐 일어나, 여럿이 피로써 맹세를 결의한 뒤 말에 올라 힘차게 외쳤다. "내가 울기만 해서 무엇하리오, 나라에 변란이 있어 임금께서 도성을 떠나 피난을 하였으니, 나는 신하로서 어찌 새처럼 도망하여 구차하게 살겠는가. 의병을 일으켜 전장에 나아가리라. 싸움에서 이길 수 없으면 오직 죽을 뿐이다. 죽지 않으면 나라의 은혜를 갚을 길이 없다." 붓을 내던지고 노구를 일으켜 창의에 나서는 그의 언행이 바위처럼 단단하다.
수원의 독성산성, 인천, 강화도에 진을 친 뒤 김천일은 부하 양산숙·곽현 등에게 장계를 줘서 조정에 그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조정은 그의 공로를 기려 창의사(倡義使)라는 군호를 내리고 장례원판결사에 임명했다. 창의사는 의병에게 내려진 최초의 사호(賜號)이다. 적을 추격하라는 임금의 교지가 내려오자 병상에서 일어나 "내가 이제 죽을 곳을 얻었다"고 기뻐하며 3백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남하했다. 당시 진주성에는 왜군 대병력의 공격이 예견되었기에 진주성을 버리고 물러나야 한다는 주장이 강했는데, 김천일은 "호남은 나라의 근본이고 진주는 실로 호남의 울타리"라며 고립무원의 진주성으로 들어갔다. 그해 6월 10만에 가까운 적의 대군이 대공세를 감행하자 아군은 중과부적으로 분전했으나 끝내 함락되고 말았다. 그는 아들 김상건과 함께 촉석루에서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했다. 차남 상곤이 분상하여 진주 촉석루 섬돌사이에 침모를 찾아 혼을 받들고는 그의 손톱과 치아로 장의를 갖추어 고향 나주의 남쪽 영산 언덕에 장사하였다.
명나라 지휘사 오종도는 제물을 갖추어 제사 지내며 "무릇 사람이 천지 사이에 있으되 죽어서 사는 이가 있고, 살아있으되 오히려 죽은 이가 있으니, 무릇 죽었으되 오히려 살아있는 것 같은 이를 나는 창의사 김장군에게서 느낀다"고 하였다.
1603년(선조 36) 좌찬성에, 1618년(광해군 10)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나주 정렬사, 진주 창렬사, 순창 화산서원, 태인 남고서원, 임실 학정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건재집(健齋集)』이 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극념당 앞 흐르는 저 강물은
용용(溶溶)이 살아서 쉬지를 않나니
큰 바다를 가리켜 그리로 통하여 가
오히려 돌아가 그칠 줄 아는 것 같구나
이부(尼父)가 감탄을 하였던 그 까닭,
만고의 배우는 법칙이 되었어라
같은 것이 다르고 또 다른 것이 같기도 하나니,
만 가지 다른 것들이 일관(一貫)으로 통하네
누가 이 일관의 도를 깨우칠거나
솔개 날고 물고기 뛰노는 것과 같은 그 이치를'
극렴당은 김천일의 당호이다. 스승 이항이 그의 당호를 지어주고 기념으로 쓴 '제극념당(題克念堂)'이라는 시다. '같은 것이 다르고 또 다른 것이 같기도 하나니/ 만 가지 다른 것들이 일관(一貫)으로 통하네' 이 구절이 충으로 일관된 그의 한 생을 잘 설명해주고 있는 듯하다. 김천일은 관리로서 청렴했으며, 노년에 이르러 나라가 위기에 처하는 상황에서 분연히 일어나 전장에서 한 생을 마친 대표적 의병장 중 하나로 오늘날까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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